이상일 '국보'
**스포일러 있음
이상일의 '국보'는 얼핏 흔한 '예술가 영화'처럼 보인다. 미천한 신분이지만 재능 있는 예술가와 고귀하게 태어났지만 재능은 부족한 예술가의 경쟁과 갈등, 오직 예술의 완성을 위해 다른 모든 것을 희생하는 예술가의 삶. '국보'도 죽은 야쿠자 두목의 아들 키쿠오(요시자와 료)가 가부키 배우 가문의 아들 슌스케(요코하마 류세이)보다 가부키에 뛰어난 재능을 보이는 것으로 그려지는 초중반부까지 그런 경로를 보인다.
'국보'의 특이한 점은 키쿠오도 슌스케와 마찬가지로 부침을 겪는다는 것이다. 스승들과 관객들이 입을 모아 키쿠오의 연기를 칭찬한다. 키쿠로는 스승 하나이 한지로(와타나베 켄)로부터 그의 아들 슌지로를 대신해 후계 자리를 물려받는다. 그런데 정작 이후 키쿠오의 경력은 내리막을 걷는다. '예술가 영화'의 흔한 설정은 정상에 오른 예술가가 자만에 빠져 사생활에서 물의를 빚거나 주변 사람들을 적대하면서 예술에도 소홀히 해 비틀거리기 시작한다는 내용으로 이어지지만, '국보'에서 키쿠오가 쇠락하는 이유는 명확히 드러나지 않는다. 야쿠자 아들 시절 등에 새긴 이레즈미, 게이샤와의 연애에서 생긴 딸 등이 미디어에 보도되면서 인기가 떨어진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키쿠오는 예나 지금이나 가부키를 잘하기 위해 온갖 노력을 기울인다. 정말 대단한 재능을 가진 예술가라면 사생활이야 어찌 됐든 작품에 전력을 다하면 정상을 지킬 수 있을 테지만, 웬일인지 키쿠오는 갖은 노력과 가부키에 대한 열정에도 불구하고 조연과 단역을 전전하는 신세가 된다. 이쯤 되면 키쿠오에게 정말 재능이 있었는지 의심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리고 그 틈을 타 아버지로부터 후계 자리를 물려받지 못한 이후 8년간 잠적했던 슌스케가 나타나 다시 재능을 발휘하기 시작한다.
관객, 스승, 프로모터, 동료 등 모두가 키쿠오를 인정했지만 정작 키쿠오는 자신을 인정하지 못했고, 그것이 몰락의 원인이었을 수도 있다. 다친 하나이 한지로의 대역으로 첫 무대에 오르기 전 키쿠오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화장조차 하지 못한다. 분장실을 찾은 슌스케에게 키쿠오는 패닉에 빠져 말한다. 자신에겐 (가부키 배우 가문의) 피가 없다고, 지금 네 피를 벌컥벌컥 마시고 싶다고. 가문의 내력이 중요한 가부키계에서 가부키 혈통이 아니라는 사실은 키쿠오에게 크나큰 콤플렉스가 됐다. 탁월한 재능조차 이 콤플렉스를 완전히 덮을 수 없었다. 하나이 한지로의 후계자임을 공식화하는 무대에서 하나이 한지로가 피를 토하며 부른 이름이 키쿠오가 아닌 슌스케였다는 사실도 이 콤플렉스를 강화시켰다.
가끔 예술은 '기세'라는 생각이 든다. 빼어난 교향악단의 지휘자는 지휘하는 자세부터 다르다고 느끼곤 한다. 악단이 조금 삐끗하더라도, 지휘자가 확신에 찬 몸짓으로 포디엄에서 움직이면 그 음악은 그럴듯하게 들린다. 확신 없이 주저할 바엔 시작을 미루고 확신이 들 때까지 숙고하는 것이 낫다. 주저함과 머뭇거림은 작품에 드러나게 마련이고, 이는 감상자에게 거의 그대로 전해져 의심을 불러일으킨다. 키쿠오도 가부키 혈통을 갖지 못한 콤플렉스, 이로 인한 자기 확신의 부족에 미진한 연기를 했는지도 모른다.
지방의 식당이나 술집에서 그저 그런 공연을 하며 연명하던 키쿠오는 전설적인 배우 만키쿠의 부름을 받는다. 병상의 만키쿠는 영문을 몰라 머리를 조아리던 키쿠오에게 춤을 춰보라며 부채를 건넨다. 자신은 보면 알 수 있다고 말하면서. 영화는 키쿠오가 가부키계 중앙에 복귀한 계기를 자세히 보여주지 않는다. 이후 곧바로 키쿠오가 슌스케가 다시 합동 공연을 하며 인기 몰이를 하는 광경을 보여준다. 연결이 튀진 않는다. 오히려 예술가의 기나긴 삶의 굴곡에서 이런저런 흥망성쇠가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듯 느껴진다.
키쿠오와 슌스케 모두 병에 걸렸다. 어쩌면 슌스케를 죽음으로 몰아간 당뇨병보다 무서운 '예술병'이다. 이 병에 걸리면 예술의 완성을 위해서는 다른 모든 것은 아무렇게나 돼도 좋다는, 악마와의 계약을 맺을 지경에 이른다. 예전에 방기한 딸을 만나고서도 표정에 거의 변화가 없는 키쿠오는 어쩌면 사이코패스처럼도 보인다. 어쩌면 공감이 부족한 것이 아니라, 애초 예술 이외의 것은 포기한다는 체념의 표정인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