힐러리 맨틀 '울프홀'
16세기 잉글랜드의 정치인 토머스 크롬웰의 시각에서 헨리 8세와 캐서린, 앤 불린 등 부인들의 떠들썩한 이혼과 결혼 과정을 그리는 '울프홀'(전 2권, 문학동네)을 읽고 나니, 조선 시대 인물을 주인공으로 이런 소설을 쓰면 얼마나 재미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그게 쉬울 리는 없다. 그렇게 쉬웠다면 누구나 맨틀처럼 역사소설로 부커상을 두 번 받을 테니.
물론 '울프홀'이 읽기 쉬운 소설은 아니다. 대작 역사소설이 흔히 그러하듯, 등장인물이 너무 많고 가계도도 복잡하다. 게다가 인물들의 이름도 다 비슷하다. 남자 이름 절반은 '토머스' 같다. 게다가 사람을 이름이 아니라 그 직위로 부르는 때도 있어서 읽다 보면 '이 사람이 그 사람인가' 하고 헷갈리기도 한다. 누가 이순신을 주인공으로 한 1000쪽 가까운 역사소설을 영어로 번역해 이순신, 충무공, 삼도 수군통제사로 번갈아 부르면 어떨까.
요즘 교토식 화법이 '돌려까기'의 정수인 것처럼 밈이 되고 있지만, 살펴보면 옛 영국인들의 언어 감각도 그에 못지않다. 제인 오스틴 소설만 읽어봐도 칭찬, 호감, 냉소, 비난, 비아냥의 경계를 절묘하게 오가는 대화들이 이어진다. '울프홀'은 더하다. 16세기 잉글랜드의 왕, 신하, 왕비, 시녀, 공주, 성직자 등의 대화가 이어지는데 이게 협력하자는 건지, 싸우자는 건지, 시비 거는 건지, 호의를 보이는 건지 알 수 없는 때가 많다. 그때 사람들이 정말 그렇게 대화했을까 의심이 들다가도, 인물 관계도를 얼핏 정리한 뒤 대화를 따라가면 그 유피미즘이 절묘해 이것이 소설 읽는 맛이고 언어의 위대함이라는 생각도 든다.
헨리 8세의 뜻대로 캐서린과의 이혼, 앤 불린과의 결혼을 제도적으로 성사시켰고, 잉글랜드 내의 종교적 권한을 로마 교황청으로부터 분리시키는데 결정적 역할을 한 토머스 크롬웰은, 왕의 이혼과 결혼을 끝까지 반대하다 사형당한 성직자 토머스 모어에 비해 악당으로 여겨지곤 한다. 모어는 '유토피아'라는 현대까지 이어지는 고전과 어휘를 남겼지만, 미천한 신분에서 자수성가해 왕 아래 최고 권력자에 오른 크롬웰은 어딘가 모사꾼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울프홀'의 주인공은 어디까지나 크롬웰이다. 거의 모든 장면에 크롬웰이 나온다. 힐러리 맨틀은 크롬웰을 적에게 자비로운 제안을 하면서도 그 제안 이면에 교활한 책략을 숨긴 것 같고, 국가 운영의 큰 그림을 그리면서도 이를 실천하기 위한 디테일을 놓치지 않으며, 이상을 추구하면서도 실용적인 방법을 놓치지 않는 인물로 그려낸다. 소설 후반부에는 크롬웰이 앓아눕자 왕이 직접 문병 오는 장면까지 나온다. 강직한 근본주의자로서 종교탄압을 자행했지만 목숨을 내놓더라도 신념을 저버리길 거부하는 토머스 모어와 그를 굴복시키려는 크롬웰의 대결은 후반부의 하이라이트다. 당장은 아니겠지만, '울프홀' 출간 3년 뒤 나온 후속편으로 역시 부커상을 받은 '시체들을 끌어내라'도 언젠가 읽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