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자람도 넘침도 없이

윤가은 '세계의 주인'

by myungworry

*스포일러 있음


윤가은의 '세계의 주인'이 잘 만든 영화라는 점을 부정하기는 어렵다. 많은 이들이 언급했다시피 시나리오가 매우 잘 쓰였고, 애초의 제작 의도를 모자람도 넘침도 없이 구현한 것으로 보인다. 엄마의 술, 시든 꽃, 동생 해인의 마술, 태권도장의 그을린 벽, 초반에 숨겨졌다가 나중에 드러나는 누군가의 편지, 주인에게 도착하는 의문의 쪽지 등 여러 요소들이 정확한 방식으로 사용되고 용도를 다한다. 특히 마지막 쪽지를 여러 명의 친구 목소리로 함께 읽는 대목은 아마 감독이 시나리오 처음부터 구상했거나, 아니면 도중에 구상한 뒤 스스로 꽤 흡족해했을 것 같은 '킥'이다. 주인이 스스로 성폭력 피해자임을 밝히는 장면을 영화 중간에 넣은 뒤, 곧바로 연기의 밀도가 높은 세차장 장면으로 이어진 것도 좋은 구성이다. 윤가은은 씨네 21 인터뷰에서 이 '고백의 순간'을 영화 클라이맥스로 배치했다가 중간으로 당겨오고 이후 주인의 삶을 생각하면서 동력을 얻었다고 밝혔다. 흔한 악당이 없는 것도 좋다. 가장 악당 같은 사람이라면 아마 법정 장면에서 '피해자다움'을 강조하는 변호사일 텐데, 이 역시 의뢰인의 이익을 위해 노력하는 전문 직업인의 현실적인 모습이라고 볼 수 있겠다.


'우리들'(2016) 같은 전작에서 보여준 어린이, 청소년 배우의 연기를 담아내는 솜씨는 국내 발군이다. 어떤 장면은 마치 학교에 관찰 카메라를 설치해도 이보다 그럴듯하고 생생할 수는 없겠다 싶을 정도다. 피해자로 구성된 봉사 모임의 모습과 비교해 보면, 주인이가 생활하는 학교의 모습이 더 잘 촬영됐다. 홍상수가 술자리 장면을 찍는데 최고듯, 윤가은은 어린이, 청소년 연기를 담는데 최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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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내가 이 영화를 매우 좋아하는지는 조금 다른 문제인 것 같다. 전적으로 취향의 문제지만, 모든 요소가 너무 잘 짜이고 빈틈이 없어서 오히려 거리가 느껴진다고 할까. 이 영화는 창작자가 제시한 것 이상으로 해석할 여지가 거의 없다. 그래서 난 어딘가 영화가 교육적, 계몽적이라고 느껴졌다. 영화의 목적이 교육적, 계몽적이어선 안될 필요는 없지만, 내가 좋아하는 영화는 좀 다른 종류의 영화다. 한국영화사를 꿰뚫고 있지는 않지만, 성폭력을 소재로 한 영화로는 이창동의 '시', 김미조의 '갈매기' 등이 떠오른다. 난 '시'가 '세계의 주인'보다 은유적이어서 곧 예술적이고, '갈매기'가 '세계의 주인'보다 형식적으로 거칠지만 에너지가 있다고 여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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