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오징팡 '인간의 피안'
'꼬리에 꼬리를 무는 독서'를 하는 편이다. 한 작가의 책을 두어 권 이어서 읽거나, 같은 분야의 책을 두서너 권 읽거나. 그러다 싫증 나면 방향을 틀어 문학에서 비문학으로, 비문학에서 문학으로 옮긴다. 김보영의 SF를 읽은 김에 중국 여성 작가 하오징팡의 SF도 손에 잡았다. 하오징팡은 '접는 도시'로 2016년 휴고상을 받았다. 2015년 류츠신의 '삼체'에 이은 2년 연속 중국 작가 수상이었다. '접는 도시'가 수록된 작품집은 도서관에서 찾을 수 없어, 그 이후 나온 단편집 '인간의 피안'을 골랐다. 중국에선 2017년 발간된 책이다.
한국에선 AI로 떠들썩해진 것이 그리 오래되지 않은 것 같지만, 중국에선 '인간의 피안'이 발간되기 전부터 그랬던 모양이다. 작가 본인이 서문에 "인공지능은 거의 2년 동안 너무나 뜨거운 주제"였다고 밝히고 있다. 2016년 이세돌과 알파고의 역사적 대국 이후 한국에서도 AI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지만, 그 여파에 대해 진지하게 묻거나 산업적으로 AI를 발전시키려는 노력은 부족했던 것 같다. 오히려 한국인들이 AI에 대해 조금 더 진지하게 생각하고 당황하기 시작한 것은 2022년 챗GPT 출시 이후였던 것 같다.
이 책에는 6편의 단편이 수록돼 있는데 대략 시대 변천에 따라 인공지능이 발전해 가는 모습을 그렸다. 예를 들어 첫 번째 수록작 '당신은 어디에 있지'는 인공지능으로 인격의 분신들을 비서로 만들어 동시에 여러 곳에서 회의, 강연, 여자친구와 대화할 수 있게 된 이야기다. 여자 친구와의 약속 시간에 늦은 남자 주인공이 뒤늦게 나타나 변명을 하려 하자, 이미 그 자리에 있던 주인공의 AI 비서가 주인공의 목소리로 대신 여자친구를 위로해 주는, 아이러니하면서 코믹한 내용이다. 두 번째 수록작 '영생병원'에서 인격, 기억, 감정 등은 물리적으로 새 두뇌에 이식할 수 있게 된다. 이런 설정이 연상시키는 익숙한 전개가 제시된다. '사랑의 문제'는 AI가 인간의 감정을 얼마나 이해할 수 있을지 묻고, '전차 안 인간'은 무기와 결합한 AI 이야기다. '건곤과 알렉'에서 건곤은 무소불위의 신과 같은 글로벌 AI인데, "자신의 위치에 어울리지 않는 새로운 임무를 부여"받는다. 바로 "어린아이에게 배우라"는 것이다. 이는 AI가 인간이 제시한 목표만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임기응변으로 목표를 세우기를 배워간다는 걸 뜻한다. 마지막 작품인 '인간의 섬'에서 인간은 배우자나 직업 같이 중요한 인생의 선택을 AI '제우스'에게 의지한다. 두뇌에 칩이 있어 어떤 선택의 기로에 서면 곧바로 제우스에게 물어볼 수 있다. 제우스는 전 세계 거의 모든 정보와 연결돼 있기에, 틀릴 일이 거의 없다고 사람들은 믿는다. 인간은 순간적 충동이나 감정에 휩쓸리지 않고, 많은 정보로 이성적인 판단을 할 수 있다.
하오징팡은 물리학 학사, 천체물리학 석사, 경제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는 중국발전연구원에서 국가정책 연구원으로 일하며, 빈곤 지역 어린이 교육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고 한다. 작가의 이력을 보면 짐작할 수도 있지만, '인간의 피안'은 '문학을 위한 문학', 'SF를 위한 SF'가 아니다. 김보영의 '종의 기원담'이 장르의 오랜 규칙을 되묻고 그에 도전해 SF팬들의 호기심을 자극한다면, '인간의 피안'은 좀 더 현실적, 사회적인 문제를 다룬다. 아마 SF 팬들에게는 대부분 익숙한 전개와 주제여서 밋밋하게 느껴질 수도 있겠다. 어쩌면 이 책이 나온 2017년 이후 AI가 너무 빨리 인간의 삶에 침투했기 때문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