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의와 증오와 음모 없는 세상

퀸스 갬빗

by myungwor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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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일러 있음


에피소드 한 두 개 보고 마는 넷플릭스 시리즈들 중에서, '퀸스 갬빗'은 오랜만에 7부작을 완주한 시리즈였다. 오래전 나온 동명소설을 원작으로 체스를 잘 두는 천재 소녀 베스 허먼의 삶을 그린다. 매 시리즈 초반부 베스와 생모의 이야기가 잠시 회상으로 등장한 뒤, 베스의 현재 삶이 이어진다. 베스의 생모는 수학자였던 것으로 보인다. 생부는 생모와 함께 살기를 원했지만, 생모는 알 수 없는 이유로 거절한 뒤 싱글맘으로 베스를 키운다. 어느 순간 정신적 한계를 겪던 생모는 차량 뒷자리에 베스를 태운 채로 교통사고를 내고(혹은 일부러 차량을 이용해 자살을 기도하고), 결국 생모는 죽고 베스만 홀로 남아 고아원에 맡겨진다. 베스는 과묵한 고아원 관리인 할아버지로부터 체스를 배운 뒤 천재성을 보인다. 그러나 베스가 고아원에서 배운 것은 체스만이 아니었다. 부작용이 제대로 알려지기 전 아이들에게 함부로 배포되던 진정제 역시 베스를 사로잡는다. 이후 베스는 교외의 중산층 가정에 입양돼 체스 선수로서의 장래를 열어간다.


체스라는 종목이 특이하긴 하지만, '퀸스 갬빗'은 전형적인 스포츠 드라마의 길을 걸어간다. 천부적 재능이 있는 아이, 경기에 몰두하기 힘든 가정 형편, 어린 시절의 라이벌과 이어지는 우정, 강적의 등장과 좌절, 결국 최종적인 승리. 단순하고 익숙한 이야기다.


하지만 이를 풀어가는 방식이나 인물 관계는 단순하지 않다. 베스 머문 고아원은 종교적 신념이나 금전적 이윤을 위해 아이들을 억압하는 곳이 아니다. 규율이 조금 엄격해 보이긴 하지만, 1950년대라는 시대 상황을 고려하면 납득 못할 수준은 아니다. 베스를 입양한 양부모도 전형에서 벗어난다. 양모는 피아니스트였지만, 무대 공포증 때문에 커리어를 포기하고 술에 의지해 살아간다. 사랑 없는 결혼 생활을 이어가는 양부는 베스에게 별 관심이 없다. (베스 입양은 양모의 주장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베스에 대한 학대도 없고, 그렇다고 무조건적인 사랑도 없다. 양모는 베스의 명목상 어머니이자 일종의 매니저가 된다. 베스가 체스 대회 상금으로 따오는 돈에 놀란 눈치지만, 그 돈을 빼앗으려 하거나 하진 않는다. 베스가 술이나 남자에 너무 빠지지 않길 바라지만, 매우 부드러운 조언에 그친다. 모녀 관계로 보기엔 서먹하고, 비즈니스 관계로 보기엔 프로페셔널하지 않다. 적당히 거리를 둬 불편하진 않지만, 영 정이 없지도 않은 모녀 관계가 이어진다.


베스와 주변 남자들의 관계도 전형적인 연애는 아니다. 베스는 레즈비언이 아니지만, 남자에 큰 관심은 없어 보인다. 남자와의 잠자리를 마다하진 않지만, 베스의 가장 큰 열정은 체스고, 취미는 음주다. 섹스를 한 남자와의 이후 대화는 냉정하기보다는 무심하다. 섹스 이후 체스 책을 펴들고 연구하는 식이다. 남자가 여기서 잘까, 다른 데 가서 잘까 물으면, 좋을 대로 하라고 말하는 식이다. 베스는 체스 라이벌이었던 남자들과 몇 차례 잠자리를 갖는다. 베스가 속을 알 수 없는 비전형적인 행동을 하는 바람에, 남자들은 베스와의 관계를 어떻게 생각해야 좋을지 몰라 난처함을 느낀다. 베스는 그런 남자들의 난처함에 별 신경을 쓰지 않는 것 같다. 결국 남자들도 베스식의 관계 맺기에 적응하고 베스의 체스를 응원한다. 물론 베스가 진심으로 좋아하는 남자가 있긴 하지만, 그는 게이로 암시된다.


'퀸스 갬빗'의 최종 보스는 러시아 챔피언 보르고프다. 무뚝뚝하고 속을 알 수 없는 기계 같은 플레이어다. 보르고프는 두 차례의 대결에서 베스를 무참히 박살 낸다. 베스는 깊은 슬럼프 끝에 재기해 소련으로 향해 보르고프와 세 번째 대결할 기회를 얻는다. 베스의 소련행 비용을 지원하기로 한 기독교 단체, 베스의 소련행에 동행한 미 국무부 직원(아마 정보기관 요원으로 추정)은 베스를 이념 선전에 활용하려 하지만, 베스는 그런데 아무 관심이 없다. 그저 보르고프를 이기고 싶은 열정뿐이다.


보르고프 역시 악당이 아니다. 그저 최고의 체스 선수일 뿐이다. 베스를 여러 차례 짓밟았지만, 그건 악의나 복수심이나 편법이 아니라 체스의 룰에 충실한 선수였기 때문이다. 절대 미소를 짓지 않던 보르고프는 패배가 명확해지자 미소를 띠며 베스에게 악수를 청한다. 그건 미국에 대한 소련의 패배가 아니고, 나이 어린 여성에게 모욕당한 것도 아니고, 그저 최고의 체스 선수에게 패배한 것일 뿐이다. 어찌 보면 '퀸스 갬빗'의 모든 캐릭터에는 악의가 없다(생모 사후 재산 가지고 지질하게 굴던 생부가 유일한 예외랄까. 그러나 생부는 극중 존재감이 크지 않다). 고아원 원장, 고아원 친구, 양모, 하룻밤의 연인들, 체스 라이벌들... 모두들 자신의 역할에 충실하며 최선을 다한 뒤 보이는 한계를 인정하고 다시 새로운 길을 모색한다. 온갖 악의와 증오와 음모가 없으면 성립할 수 없을 것 같은 드라마의 세상에서, 이런 인물들은 낯설다. 그러나 극적인 감정은 드라마에서나 들끓을 뿐, 진짜 세상에는 '퀸스 갬빗' 같은 사람들이 더 많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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