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술관료 오바마

공정하다는 착각

by myungworry

마이클 샌델의 '공정하다는 착각'(와이즈베리)을 읽다. 전작 '정의란 무엇인가'와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이 원론적이고 보편적이라면, '공정하다는 착각'은 논쟁적이다. 어떤 면에선 래디컬하기도 해서, 말도 안된다는 반박도 나올 수 있을 듯하다. 이(利)보다 의(義)를 강조하는 입장이 워낙 강경해서, 강고한 유학자의 분위기마저 풍긴다. 한국에서는 전작들보다 덜 팔리겠지만, 내겐 전작들보다 흥미진진하다.


귀족주의 사회에서는 귀족 자제로 태어나면 풍요롭게, 하층 계급에 태어나면 빈곤하게 살았다. 이런 신분제 사회를 타파한 능력주의 사회는 출신에 관계 없이 능력에 따라 다른 사회적 지위를 허락한다. 열심히 공부하고 일해서 좋은 직업을 가지면 잘살고, 그렇지 않으면 못산다. 샌델은 이런 능력주의 사회를 신랄하게 비판한다. 단지 능력을 발휘하는데 여러 왜곡(예를 들어 부잣집 아이들의 대입 성적이 좋다)이 개입되기 때문만이 아니다. 오직 능력주의 자체가 문제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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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너무 당연히 받아들여온 능력주의 이데올로기 때문인지 어안이 벙벙하다. 샌델은 이어간다. 신분제 사회에서는 개인의 능력이 아니라 선택할 수 없는 출신 성분에 따라 계급이 정해졌기에, 능력 없는 사람이 귀족이 되고 능력 있는 사람이 하인이 될 수도 있었다. 귀족도 하인도 그러한 사실을 안다. 그래서 귀족은 때로 자신의 한계를 알아 겸손하고, 하인도 신분과 상관 없이 자부심을 가질 수 있었다. 능력주의 사회에서는 그렇지 않다. 유명대에 진학해 돈 많이 버는 직장을 얻어 높은 계급에 자리한 이들은 그 모든 것이 자신의 노력과 능력으로 얻은 것이라 생각해 당연하게 여기고, 그렇지 못한 이들 역시 자신의 낮은 계급을 당연히 여긴다. 그 결과 능력주의 사회의 상층 계급 사람들은 오만(hubris)에, 하층 계급 사람들은 굴욕(humility)에 빠진다. 신분제 사회를 벗어난 현대의 민주주의 사회에서 능력주의를 채택하는 것은 당연하지 않느냐는 반론이 있겠지만, 샌델은 이처럼 강고한 능력주의의 추구가 1980년대 이후에 본격화됐다고 보고 있다. 레이건, 대처의 보수 정부야 말할 것도 없지만, 뒤를 이은 클린턴, 블레어 등의 진보적 색채 정권도 노동자의 사회적, 문화적 지위가 꾸준히 낮아지는데 일조했다는 것이다.


샌델은 능력주의의 기원을 미국 정신사에서 찾는다. 신의 구원이 정해진 것인가, 인간이 노력으로 구원받을 수 있는가 하는 질문은 기독교의 오랜 딜레마였다. 구원이 정해져있다면 인간은 어떤 노력도 할 필요가 없고, 인간의 노력 여하에 따라 구원 여부가 달라진다면 '전지전능한 신'이라는 개념이 위태롭다. 칼뱅은 구원이란 신의 은총에 따른 선물이라 인간의 노력에 따라 달라지지 않지만, 직업은 소명이며 직업에 매진하는 것은 구원의 징표라고 해석해 이 딜레마를 해결하려 했다. 미국에 뿌리 내린 청교도들은 '소명으로서의 직업'이란 생각에 조금 더 능력주의적인 함의를 담았다. 이제 '신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는 생각이 싹텄다. 미국식 자기계발 이데올로기의 시작이다. 샌델은 이렇게 적었다. "은총 앞에서 느끼는 무력감이 주었던 겸손함. 그것은 이제 자기 자신의 능력을 믿는 데서 나오는 오만으로 대체된다." 이후 번영은 구원의 증표, 고난은 죄의 증표가 된다. 돈을 많이 번 사람은 그럴만한 자격이 있었을 것이라는 추정이 사회에 공유되기 시작한다. '성취의 윤리학'이 '겸손한 희망과 기도의 윤리학' '수혜와 감사의 윤리학'을 압도했다.


샌델은 능력주의의 폭정이 불러오는 세 가지 문제를 정리한다. 첫째, 노골적인 불평등이 이어지고 사회적 이동성이 가로막힌 상황에서도 '우리는 자기 운명의 책임자'라는 생각에 사회적 연대가 사라진다. 둘째, 학력주의 편견 때문에 대학에 가지 않은 노동자들이 존중받지 못한다. 셋째, 기술관료의 손에 사회의 문제를 맡겨 시민의 정치권력이 약화된다.


대학 졸업장은 능력주의 사회에서 가장 중요하게 통용되는 자격증이다. 하지만 이로 인해 대학에 진학하지 못한 노동자의 존엄이 무시된다. 게다가 샌델은 "뛰어난 학력과 실천적 지혜 또는 공동선 실현에 대한 본능적인 욕구가 서로 그다지 일치하지 않음"을 지적한다. 최고 명문대를 최고 성적으로 졸업해 변호사 시험에 최고 성적으로 합격했다 해도, 그 사람이 한 사회의 공동선을 실현하는데 최고의 적임자인지는 의문이라는 것이다. 인종주의와 성차별주의가 힘을 잃어도, 학력주의는 '최후의 면책적 편견'으로 작동하고 있다. 통치 집단은 인종, 민족, 성별면에서 다원화되고 있지만, 학력에서만큼은 엘리트에 집중되고 있다.


1980년대부터 하버드에서 강의해온 샌델은 대학의 문제를 심각하게 여기고 있는 것 같다. 대학이 교육이 아니라 학벌 인증소로 바뀐 현상을 개탄한다. 교수도 학생도 그 안에서 행복하지 않다. 샌델은 최소한의 수학능력이 있는 학생들 중 제비뽑기로 입학생을 선출하는 방안을 진지하게 제안한다. 아울러 직업, 명망의 위계질서를 뒤엎어야 한다고도 말한다. 19세기 미국을 찾은 외국인 방문객들은 사회 곳곳에 배어 있는 평등에 놀랐다고 한다. 그 평등이란 부의 평등한 분배, 출세의 기회의 평등이 아니라 "모든 시민이 거의 똑같은 기반에서 독립적으로 생각하고 판단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단지 노동계급에 더 많은 임금을 주는데 그치는게 아니라, 노동계급이 사회에 기여하는 바를 충분히 인정해야 한다고도 주장한다.


샌델이 높이 평가하는 마지막 민주당 정치인은 로버트 케네디다. 케네디는 더 좋은 공동체가 되기 위해서는 사회가 더 부유해지거나 부가 고르게 분배되는 것 뿐 아니라 시민들이 '존경 받는 직업 생활'을 하고 있다는 자긍심을 가져야 한다고 보았다. 하지만 이후 민주당 정치인들은 "공동체, 애국심, 일의 존엄성 같은 것을 대체로 내버렸으며 대신 사회적 상승의 담론만 주구장창 늘어놓고 있다"고 비판한다.


당연히 투기적 금융 활동도 비판한다. 오늘날의 금융 활동은 실물 경제에 투자돼 경제적 가치를 높이기보다는 지대(부당한 불로소득)만 끌어내고 있다. 시장이 금융계에 주는 막대한 보상은 실제 공동선에 거의 기여하지 않는다. 샌델은 "금융 종사자들이 투기 활동을 하면서도 분에 넘치는 명성을 누리는 현실은 실물경제에서 유용한 재화와 용역을 생산하며 생계를 이어가는 사람들의 존엄을 조롱하는 것"이라고 신랄하게 말한다. 예전에 청년들의 주식투자를 놓고 동료들과 이야기한 적이 있다. 안정적인 직장에 대한 전망, 월급을 꼬박꼬박 모으면 집을 살 수 있다는 희망이 사라진 시대에 주식투자를 하는 것이 현실적인 선택일 수 있겠지만, '소는 누가 키우나'라는 생각 역시 내 머리 속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내가 국가를 경영하는 사람도 아니니 그런 걱정할 필요는 없고, '주식투자 하지 말라'고 말릴 이유도 없지만 말이다. 다만 그런 풍조에 의심이 드는 것은 참을 수 없다는 뜻이다.


샌델은 클린턴 이후 민주당 정치인들 역시 비판적으로 소환한다. 재밌는 건, 트럼프를 비판할 때는 거의 아무런 주저함이 없다가, 오바마를 비판할 때는 한 템포 주저하며 양해를 구한다("인기 있는 대통령에 대한 너무 직설적인 독설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설명할 기회가 허락되기를 바란다")는 점이다. 솔직히 이 책에 트럼프 비판은 거의 없다. 트럼프가 비판받을만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그저 안중에 없는 사람이기 때문일 것이다. 많은 이들이 지적하듯이, 트럼프의 등장은 민주당 정치의 실패에 따른 반동이기도 하다. 샌델은 오바바가 '뼛속까지 기술관료'라고 말한다. 과거 오바마가 한국 교육 시스템에 대해 몇번 찬사를 보냈을 때 한국인들은 오바마가 한국 교육의 혹독함을 잘 몰랐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지만, '공정하다는 착각'을 읽으면 오바마가 한국 교육의 능력주의적 시스템을 잘 알았기 때문에 그러한 찬사를 보냈으리라고 짐작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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