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반 일리치의 죽음'
톨스토이의 '이반 일리치의 죽음'(창비)을 읽다. 한국어 번역본으로 100쪽 남짓한 중편이다. 45세의 판사 이반 일리치의 죽음 소식이 직장에 알려지면서 시작한다. 이반 일리치가 어떠한 삶을 살았는지는 모르지만, 동료들은 이반 일리치의 죽음 이후 자신들의 인사 이동에 대한 전략과 계획을 짜고, 그날 누군가의 집에서 하기로 한 카드 게임에 지장을 받을지 걱정하기도 한다. 고인의 죽음을 진심으로 애도하는 사람은 없는 것 같다.
슬픔 어린, 그러나 형식적인 장례식 이후 이반 일리치가 어떠한 삶을 살았는지 역으로 보인다. "이반 일리치의 지나온 삶은 지극히 평범하고 일상적이면서 지극히 끔찍한 것이었다"가 2장의 첫 문장이다. 이반 일리치는 19세기 후반 러시아의 상류층 인사였다. '집안의 자랑거리'로 괜찮은 교육을 받으며 자랐고, 학교를 졸업한 후 법관이 된 뒤에는 "젊었고 즐겁게 노는 걸 좋아하는 기질이었지만 업무를 수행할 때는 극도로 조심스럽고 관료적이고 아주 엄격하기까지" 한 사람이었다. 승진 기회 놓치지 않을 정도의 처신을 잊지 않았고, 자신의 신분 상승에 도움이 될 결혼 상대를 고르려고 노력했다. 아내를 고르면서 "자만심이 채워졌고, 동시에 고위층 사람들이 옳다고 하는 일을 행한다는 생각"을 했다. 판사로서의 직업의식에 대해선 "어떻게든 좀 더 부드럽게 권력을 행사하도록 노력했다. 하지만 이런 권력의식과 그것을 부드럽게 행사해야겠다는 마음가짐을 가질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이 새로운 직책의 가장 큰 재미이자 매력"이라고 느꼈다.
결혼 생활은 충분히 만족스럽지 않았다. 겉보기엔 이상적이었던 젊은 판사와 부유층 여성의 결혼은 "예상치 못했던 일이고 어떻게 벗어날 도리도 없는 그런 사태"로 이어졌다. 이반 일리치가 보기에 아내의 불평과 분노에는 별 근거가 없었다. 이반 일리치는 어떻게든 불쾌한 가정에서 벗어나 독립된 권위를 누릴 수 있는 일의 세계에 매달린다. 승진 기회를 얻어 새로운 도시로 이사해 내키는 대로 멋있게 집을 꾸미며 잠시 아내와의 관계가 다시 좋아지지만, 그들의 삶이 다시 행복의 궤도로 접어든 것은 아니다. "그렇게 그들은 살아갔다. 모든 것은 별다른 변화 없이 아주 순조롭게 잘 흘러갔다."
김진영은 '철학자 김진영의 전복적 소설 읽기'(메멘토)에서 이반 일리치의 삶을 "허위의식에 찬 속물의 삶"이라고 표현한다. 부끄러운 일을 하지 않고, 탐관오리 짓을 하지 않으며, 별다른 죄를 짓지도 않는다. "악을 직접 저지르지는 않습니다. 이는 부르주아의 자기 보호 원칙이기도 합니다. (...) 이런 것들을 사회 유지 기능으로 이용한다는 말입니다."
변화 없고 평화롭고 자기만족적이던 이반 일리치의 삶은 가끔 입에 이상한 맛이 돌고 배 왼쪽이 조금 불편해지면서 어긋나기 시작한다. 의사는 이런저런 진단을 하고 자신의 지시를 따르면 곧 치료될 수 있다고 말하지만, 아무리 의사의 말을 따라도 증세는 나아지지 않는다. 통증은 나날이 심해지고 어느덧 오랜만에 만난 친척이 깜짝 놀란 표정을 지을 만큼 이반 일리치의 몰골은 달라진다. 의사들의 말은 매번 달라지고 통증 때문에 날카로워진 이반 일리치의 언행 때문에 가족들과의 관계도 조금씩 악화된다. 이반 일리치와 아내는 형식적인 위안과 감사의 말만 주고받는다.
어느덧 이반 일리치의 통증은 숨길 수 없는 것이 된다. 이반 일리치가 죽어간다는 사실은 명확해진다. 이반 일리치는 '카이사르는 죽었지만, 나는 죽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사람은 누구나 죽는다는 걸 알지만, 자기가 그런 일반적인 사람에 속하리라고는 깨닫지 못했다. 통증과 곧 다가올 죽음은 이반 일리치의 삶의 허위를 낱낱이 드러낸다. 이반 일리치는 강렬한 서치 라이트 아래 알몸으로 선 듯 자신의 처지를 직시한다.
"이제 법원 일도 그를 죽음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게 해주는 방편이 되지는 못했던 것이다. 더욱 기분이 좋지 않은 것은 죽음이란 놈이 다른 어떤 일도 하지 못하도록 자꾸만 그를 끌어당기고 있다는 점이었다. 그저 죽음만을 바라보도록, 피하지 않고 똑바로 죽음을 응시하도록, 모든 일을 손에서 내려놓고 그저 형언할 수 없는 고통을 느끼게만 했다."
절대적인 고독 앞에 마주한 이반 일리치에게는 젊고 건강한 농부이자 시종인 게라심만이 위안이다. 이반 일리치가 이런저런 병시중을 들어주는 게라심에게 고맙다고 하자, 게라심은 말한다. "우린 모두 언젠가는 죽습니다요. 그러니 수고를 좀 못할 이유가 뭐가 있겠습니까?" 이 소설 전편에서 죽음 앞에 가장 담대하고 담담한 사람은 게라심이다.
임종의 순간이 묘사되는 마지막 세 쪽에 들어서야 이반 일리치는 죽음을 받아들인다. 이반 일리치는 자신의 투병이 모든 가족을 괴롭히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아들과 아내에게 방을 떠나달라고 간신히 말한 뒤에야 "돌연 모든 것이 환해지며 지금까지 그를 괴롭히며 마음속에 갇혀 있던 것이 일순간 밖으로, 두 방향으로, 열 방향으로, 온갖 방향으로 한꺼번에 쏟아져나왔다." 떠나지 않던 통증은 한 구속에 조용히 웅크리고 있고, 항상 주변을 맴돌던 죽음은 보이지 않는다.
"임종하셨습니다!"
누군가 그를 굽어보며 말했다.
그는 이 말을 듣고 마음속에 되뇌었다.
'끝난 건 죽음이야. 이제 더이상 죽음은 존재하지 않아.'
그는 길게 숨을 들이마시다가 그대로 멈추고 온몸을 쭉 뻗고 숨을 거두었다.
죽음을 인정한 뒤에야 죽음이 사라지고, 피할 수 없는 고통 앞에서 생활을 감싸던 허위가 벗겨진다. 때로 그러한 강제적인 수단이 없이는, 우리는 좀처럼 깨달을 수 없다.
덧. 예전부터 도스토예프스키의 말들은 도무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톨스토이는 재미있게 읽었다. 곧바로 책장에서 '부활'을 꺼내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