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셀 커크(1918~1994)의 '지적인 사람들을 위한 보수주의 안내서'(지식노마드)를 읽다. 원제는 'Concise Guide to Conservatism'. 1957년 처음 나온 책인데, 한국에 나온 책은 개정판인 모양이다. '트럼프 당선 이후'를 언급하는 해제가 실려있다.
커크는 200쪽이 되지 않는 이 짤막한 책에서 미국 보수주의의 정수를 간결하게 소개한다. 보수주의자는 인간 내부의 신성을 옹호하는 신앙인들이고, 인간이 양심에 따라 행동할 수 있다고 믿으며, 비정한 개인주의자가 아닌 한에서 개인의 독립성을 추구한다. 보수주의자는 "사랑과 의무, 그리고 진정한 인간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 우리에게 가르친다"는 점에서 가족의 가치를 중시하고, 집산주의자가 아닌 한에서 공공심이 투철하고, 자유 시민의 의지와 지역적 논의가 활발하다는 전제 아래서 공정한 정부를 지지한다(그러므로 보수주의자는 '중앙 집중화된 민주주의'를 믿지 않는다). 보수주의자는 사유 재산을 옹호한다. "사유 재산이라는 제도는 인간에게 책임을 가르치는 가장 강력한 도구로 활용돼왔기 때문"이며, 그래서 "재산권이 확보되지 않으면 자유권, 심지어 생명권도 보장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보수주의자는 사회가 과거의 아름다운 시절로 돌아가야 한다거나, 어떠한 진보도 받아들이지 않아야 한다고 믿는 사람들이 아니다. 단지 우리는 거인의 어깨에 올라섰기에 조금 더 멀리 볼 수 있는 사람들이며, 그래서 사회에는 영구불변한 가치가 있고 그것들은 반드시 지켜져야 한다고 믿는다. 해제에선 보수주의를 "새로이 발명됐다기보다는 오랜 시간을 거쳐 검증된 지혜의 뭉치"라고 표현한다.
커크는 여러 차례 '집산주의'에 대해 강렬한 적개심을 표현한다. 주로 나치즘과 공산주의가 적대의 대상이다. 비교적 차분하고 정갈한 서술이 이어지다가 '집산주의'에 대해서는 "얍삽한" "시건방진" "절벽으로 향하는 수없이 많은 돼지들의 발자국 소리" "사회를 밀가루 반죽처럼 뭉개버리려는" 같은 표현을 사용한다. 조곤조곤 온화하다가 특정한 대목에서는 화를 삭이지 않는 사람이 있는데, 커크가 그러하다.
'보수주의자'에 대한 한국 사회 일각의 인식은 각자도생의 이윤추구 세상을 지지하는 시장주의자, 북한 체제에 대한 적개심에 불타는 반공주의자, 국가 권력에 권능을 부여하는 국가주의자라는 것이기도 하겠지만, 커크가 말하는 보수주의자는 그 어떤 부류에도 속하지 않는다. 커크는 오히려 신에 대한 믿음, 개인의 양심과 자유, 사회에 대한 책임감에 충만한 이상적인 시민상을 옹호한다. 그가 증오하는 집산주의는 이러한 시민상을 파괴하거나 왜곡할 우려가 있는 것들이다.
사실 이 책이 1957년에 처음 나왔는지 모르고 읽어나갔다. 뒤늦게 알고 나서 책의 낯섬이 이해됐다. 한국 보수도 미국 보수도, 이 책이 말하는 보수주의는 아니다. 트럼프가 보수주의자인가. 황교안이 보수주의자인가. 읽어보지 못한 '대한민국의 설계자들'(느티나무책방)이 말하는 대로, 장준하, 함석헌, 문익환, 김수환, 김준엽이 커크가 말하는 대로의 보수주의자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