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BO 시리즈 '왓치맨'
**스포일러 있음
웨이브에 HBO의 9부작 시리즈 <왓치맨>이 올라와 있기에 며칠간 봤다. 사실 예전에 보려다가 1회만 보고 접어두었던 시리즈다. 당시엔 크게 와닿지 않았다. 인종 갈등을 전면에 내세운 1부 구성이 내 관심사에는 살짝 벗어나 있기도 했다.
이번엔 몇 편을 보다보니 탄력이 붙었다. 인종 갈등이라는 소재 이상으로 구성상 흥미로운 지점이 많이 보였다. 각 에피소드가 저마다 다른 스타일을 보여준다. 중요한 인물이지만 어떤 에피소드에는 전혀 나오지 않는 경우도 있다. 그러면서도 시리즈를 관통하는 일관된 톤을 유지한다.
코믹스 원작, 원작을 살짝 변형한 잭 스나이더의 영화(2009)와는 전혀 다른 내용이다. 닥터 맨해튼, 오지맨디아스, 실크 스펙터2, 후디드 저스티스 등 원작의 인물이 등장하지만, 원작 인물을 따왔을 뿐 새로운 창작물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이들의 후손들의 활약을 다루거나, 원작 캐릭터를 재해석한다. '누가 감시자들을 감시하는가'라는 원작의 주제의식도 거의 사라졌다.
유색인종에게 권리를 빼앗겼다고 생각하는 백인우월주의자 집단 제7기병대의 준동과 이들의 테러로부터 스스로를 숨기기 위해 복면을 한 경찰, 권력층 내부의 백인우월주의자, 복면쓴 자경대를 체포하는 전직 자경대이자 현 FBI요원 등이 등장한다. 1921년 미국 털사 대학살에서 시작해 인종차별이 여전했던 1950년대, 포스트 베트남전 등을 아우르면서 결국 2019년 현재 시점으로까지 이어진다. 유심히 보지 않으면 내러티브를 따라잡기 어렵다.
화성에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었지만 사실 지구로 돌아와 모습을 바꾸고 숨어 살았던 닥터 맨해튼의 존재가 극 후반부 최대 스포일러다(스포일러에 민감하지 않지만, 이 부분은 모르고 보기 잘했다). 닥터 맨해튼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 사는 인물이다. 동시에 여러 곳에 있을 수 있고, 동시에 과거와 미래에 있을 수 있다. 그러므로 미래에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정확히 안다. 자기가 언제 어떻게 죽는지도 안다. 다른 '왓치맨'들이 단지 복면을 썼을 뿐 초자연적 능력은 없는데 반해, 닥터 맨해튼은 전통적인 슈퍼히어로물로 치면 밸런스를 파괴하는 캐릭터다. 닥터 맨해튼이 내다본 미래는 그대로 진행돼 인간의 자유의지가 끼어들 여지가 없다. 원작에는 "신은 있다. 그는 미국인이다"라는 대사가 나온다(물론 풍자적, 냉소적 의미에서 사용된 말이다). 닥터 맨해튼은 헤브라이즘이 상정한 신의 모습에 가깝다.
신이 무소부재하고 전지전능하다면, 그는 왜 인간의 비극에 개입하지 않는가. 이겨낼 수 없는 비극, 비참에 마주할 때 "신은 어디에 있는가?"라고 절규하는 것은 많은 창작물의 클리셰 같은 대사다. 닥터 맨해튼의 능력을 빼앗기 위해 여러 세력들이 얽히고 설켜서 싸우는 종반부 <왓치맨>의 풍경은 이에 대한 답으로 읽힌다. 백인우월주의 제7기병대는 "피부색이 하얗다는 이유로 차별받는" 시대를 뒤집기 위해 닥터 맨해튼의 능력을 가져가려 한다. 베트남 출신의 거부 레이디 트리유는 전세계의 핵무기를 없애는 등 혼란한 세상을 바로잡기 위해 닥터 맨해튼의 능력을 가지려 한다. 특정 집단의 이익을 도모하는 전자보다 인류 보편의 이익을 강조하는 후자가 좀 더 나은 인물인가. 그렇다면 막강한 능력을 갖고도 인류의 비참을 줄이기 위해 아무 것도 안하고 뒷짐 지고 있는 닥터 맨해튼은 자신의 능력을 레이디 트리유에게 양도하는 것이 나은가. 레이디 트리유의 생물학적 아버지 오지멘디아스는 딸의 야심을 저지하려 한다. 트리유는 만족을 모르는 야심가이기 때문에, 모두가 자신의 파란 발에 키스하지 않는다면 멈추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자면 닥터 맨해튼에 의한 평화는 강제적이기에, 어쩌면 강력한 독재자가 다스리는 분쟁 없는 나라 같을 수도 있다. 아무리 은밀하게 사기를 쳐도 닥터 맨해튼이 알아서 막거나 처벌하고, 둘만의 공간에서 성범죄를 저질러도 닥터 맨해튼이 알아서 막아내고 처벌하면, 세상엔 범죄란 것이 있을 수 없고 그만큼 평화롭고 살기 좋아질 것이다. 레이디 트리유가 닥터 맨해튼의 능력을 이어받았다면 그런 세상을 만들었을 것이다. 그 세상이 좋은 세상인가. <왓치맨>은 트리유의 계획을 저지함으로써 신의 부작위엔 이유가 있다고 말한다. 닥터 맨해튼이 인간사에 개입하지 않은 것은 인간의 비극에 무심했기 때문이 아니라, 개입이 결과적으로 '좋은' 세상을 만들지 않기 때문이다. 결국 닥터 맨해튼은 죽지만(혹은 소멸되지만), 그가 있든 없든 세계의 진행 경로는 바뀌지 않는다. 죽이 되든 밥이 되든 그것이 인간이 만들어가야할 세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