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틴 게이퍼드, '현대 미술의 이단자들'
줄리언 반스의 미술책을 읽은 김에 조금 더 본격적인 미술책을 읽고 싶어졌다. 마틴 게이퍼드의 '현대 미술의 이단자들'(을유문화사)이다. 반스의 미술책이 사실상 현란한 인상비평에 가깝다면(이것이 나쁘다는 뜻은 아니라는 점은 이미 설명), 게이퍼드의 글은 진짜 미술책이다. 다만 현대미술을 이해하는데 필수적이라 여겨지는 개념을 설명하고 적용하거나 철학을 전개하진 않으며, 1945~1970년대 런던을 중심으로 활약한 화가들의 삶을 중점적으로 다룬다. 실제 많은 화가, 미술상, 평론가들을 인터뷰했고, 다수의 증언으로 시대와 화가의 삶을 재구성했다. 왜 뉴욕, 파리가 아니고 런던이냐고 묻는다면 아마 저자가 영국을 대표하는 평론가에 속하기 때문일 것이고, 또 이 시기 런던의 미술이 뉴욕이나 파리와는 달랐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좋게 말하면 독특했지만 나쁘게 말하면 세계의 흐름에 동떨어졌다. 내가 다소 전문적인 이 책을 집은 이유를 꼽자면 내가 좋아하는 루시안 프로이트, 프랜시스 베이컨이 이 책의 주요 주제이기 때문이다.
수많은 미술가들이 런던을 중심으로 활동한 만큼, 다양한 사조의 작품들이 나왔다. 이 책이 주로 언급하는 것은 프로이트, 베이컨, 데이비드 호크니 등 영국 화단의 스타가 대표하는 구상 회화다. 미국의 잭슨 폴록, 마크 로스코 등의 영향으로 추상의 물결이 대서양을 건너기도 했지만, 아무래도 런던 미술의 주류는 구상이었다. 추상, 이후로는 설치, 퍼포먼스로 미술이 진격하는 마당에 고색창연한 구상 회화라니. 게이퍼드는 런던의 구상화가들이 3차원의 세계를 2차원의 캔버스에 담아내기 위해 어떤 노력을 했는지 보여준다. 그건 거의 몸과 마음을 갈아넣는 영웅적인 노력이었다. 프로이트, 베이컨, 호크니는 노력의 결실을 맺었지만, 많은 화가들은 그 과정에서 실패하고 잊혔다. 오늘날 거래되는 회화 중 가장 비싼 축에 속하는 작품을 남긴 프로이트조차 10년 이상 거의 잊혔던 시절이 있었다. 비교적 재빠르고 순탄하게 명성을 얻어 이를 지속시킨 사람은 베이컨, 호크니 정도였다. 아랜 줄 친 구절.
어쨌든 베이컨은 작업 전체를 통틀어 작품의 의미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강하게 거부했다. 그는 그렇게 하는 것이 작품을 따분하고 문학적으로 만든다고 생각했다. "이야기가 자세하게 서술되는 순간 지루함이 시작됩니다. 이야기가 물감보다 더 소리 높여 말하기 때문입니다."
그(데이비드 봄버그)는 비범한 자기 확신을 기성의 견해와 명성에 대한 완전한 무시와 결합시켰다. (...) 봄버그는 베이컨처럼 "어느 누구에 대해 칭찬하는 일"이 거의 없었지만 젊은 초보자들을 진지하게 대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베이컨)는 어떻게든 벨라스케스와 렘브란트의 걸작에서 발견할 수 있는 강렬한 현실감과 초현실주의자들이 '자동법'이라 부르는 결과, 즉 의식적인 통제를 포기한 우연의 효과를 결합하길 바랐다. 베이컨은 오직 이 방법을 통해서만 사진을 뛰어넘는 현실의 이미지, 곧 진정한 새로운 구상 회화를 만들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윌리엄 스콧)는 로스코, 프란츠 클라인, 폴록, 데 쿠닝의 많은 작품이 보여주는 크기에 흥분했다. "처음에 내가 받은 인상은 당혹스러움이었습니다. 작품의 독창성 때문이 아니라 크기와 대담함, 자신감 때문이었습니다."
헤겔의 어휘를 반복한 '장식적'이라는 단어는 베이컨이 추상을 폄하하기 위해 즐겨 사용하는 단어였다. 또한 알다시피 베이컨은 대부분의 구상 미술을 그저 '삽화'일 뿐이라고 묵살했다. '장식'은 인간 삶의 드라마, 비극과 관계 없는 것을, '삽화'는 사진 작품을 그저 복제하는 것을 의미했다.
나(프로이트)는 내 작품에 등장하는 사람들이 누드라기보다는 벌거벗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누드'라는 개념은 어떤 측면에서는 자의적인 예술적 느낌을 갖고 있고, '벌거벗은' 것은 사람들이 실제로 어떻게 이루어졌는지와 보다 관계가 깊다.
프로이트와 베이컨은 친구이긴 했지만 매우 다른 미술가였다. (...) 베이컨은 마티스보다는 피카소를 존경했다. 피카소의 작품이 베이컨이 추구하는 '사실의 잔혹성'을 더 많이 담고 있기 때문이었다. 반대로 프로이트는 마티스를 더 좋아했다. 마티스의 작품이 연극성이 덜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피카소의 작품과 달리 마티스의 작품은 충격과 놀라움을 의도하지 않았다. 프로이트의 작품에는 사실감은 있지만 잔혹성은 없다. 그의 그림이 보여 주는 절대적인 솔직함은 때로 충격적이며 이전에는 어느 누구도 얼굴이나 신체를 그토록 철저하게 살핀 적이 없었던 것 같은 인상을 준다.
미국의 팝아트는 근본적으로 사실주의였다. 그것은 일상의 삶과 익숙한 광경을 다루었다. 반면 영국의 팝은 상상하거나 갈망하는 것, 곧 외국인의 눈을 통해서 본 아메리칸 드림을 다루는 경향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