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덕구 '익사한 남자의 자화상'
일부 '스타 평론가'를 제외하면 평론집을 읽는 경우는 드물다. 그럼에도 어떤 일인지 강덕구의 '익사한 남자의 자화상'(글항아리)을 꺼내 들었다. "자의식을 전면에 배치하여 각자의 삶을 긍정하고 이를 비평이라는 형식으로 표현하는 필자"(조영일) 중 선두주자라는 평을 받는 이다. 조영일의 말대로, 강덕구의 책을 읽은 뒤, 이 책이 다루고 있는 영화, 음악, 문화현상에 대해 한층 깊이 알게 됐다기보다는, 강덕구라는 사람이 어떤 생각을 하는지 조금 더 알게 된다. 물론 나는 강덕구와 일면식도 없기에, 그의 생각이나 태도가 내게 중요한 것은 아니다. 이 책에서 격렬히 비판하지만 난 끝내 이해 못 하는 생각도 있다. '전유'가 대표적이다. 영국이나 미국 등 '문화 중심부'의 아티스트가 아프리카, 아시아 등 주변부 문화를 차용해 작품을 만들 때, 이를 '전유한다' 혹은 '잔인하게 착취한다'고 표현하는데, 난 그게 크게 문제가 되는 일인지 모르겠다. 아델이나 박재범이 드레드 헤어 하는 걸 두고 '문화적 전유'라고 비판하는 걸 이해하지 못하는 것과 비슷하다. 동시대를 사는 젊은 비평가가 세상을 받아들이는 방식에는 흥미로운 구석이 있다. PC에 대한 관점, 앞선 세대의 '거장'이나 '유명인'에 대한 태도 등이 그러하다. 아래는 흥미로운 인용들.
이것(대중음악이나 영화의 취향 리스트)은 자신의 자아를 애정으로 대하는 나르시시즘의 일환이지만, 동시에 타자에 대한 애착이 온전히 자아를 향하던 애착을 대신한다는 점, 즉 자신의 자아를 외부의 위대한 예술로 구성한다는 점에서 어느 정도의 보편성을 획득한 나르시시즘이기도 하다.
전유는 타자의 문화적 발언권을 교묘히 왜곡해 제 몫으로 만든다고 여기저기에 모두로부터 비난받는다. 백인이 앉아 있는 보편의 자리에서 타자성을 에너지원으로 길어 올리기 때문이다.
검열이 존재하지 않았을 시절에는 "사람처럼 구는 사람이 나오는 영화를 만들 수 있었다"는 말이지요.
이러한 사회적 길들임, 바꿔 말하자면 정치적 올바름이 예술작품이라는 허구를 구속하는 데서 문제가 생겨납니다. 예술은 판단 유예의 장이므로, 사회적 규범의 틀은 뒤로 물러납니다.
이창동의 옛 우주는 리얼리즘과 휴머니즘이 뒤섞인 멜로드라마의 세계였다. 이창동은 사디스틱한 상황으로 인물을 모는 데 능숙했다. 인물은 모종의 이유로 심적 고통을 겪고, 그러한 고통은 내러티브를 움직이는 동인이 된다. 그러나 '버닝'에서 이창동은 모던시네마와 하루키라는 변수를 통해 자신의 영화적 세계로 인해 형성된 그림자까지 방어하는 데 성공한다.
오직 고전을 보는 데만 혈안이 되어 있는, 이미 결과가 정해진 미적 판단을 내릴 수 있다고 착각하는 시네필은 오히려 일반 관객보다도 훨씬 더 안온하고 지루한 상상력을 지닌 이들이다. 그들은 고정된 취향과 합의된 역사에 갇혀 있다.
나는 어떻게 해서 당위가 근거가 될 수 있는지 모르겠다. 세계는부당하므로 올바른 세계로 나아가야 하며, 영화 또한 여태까지의 부당한 세계를 재현했으므로 올바른 예술로 나아가야 한다는 이들의 원칙은 순환 논리에 갇혀 있다. 그들이 제시한 당위적 세계관에서 영화는 세계에 완벽히 종속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