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예제와 스토커

옥타비아 버틀러의 '킨'

by myungworry

1970년대 미국의 흑인 여성 다나는 원인을 알 수 없는 타임슬립을 통해 1815년 메릴랜드의 숲으로 향한다. 그곳에서 우연히 백인 소년 루퍼스의 목숨을 구해준다. 문제는 당시 그곳이 흑인 노예제가 당연시되는 곳이었다는 사실이다. 다나는 책으로만 보던 미국 흑인 노예제의 실상을 직접 체험한다.


옥타비어 버틀러의 1979년작 '킨'(Kindred)은 그의 대표작이자 미국의 교과서에서도 언급되는 작품이라고 한다. 읽고 나면 미국의 교육자들이 이 책을 교과서에 넣고 싶어한 이유를 알 수 있다. 노예제가 폐지된 현대 흑인 여성의 시선을 통해 노예제의 실상을 목격하게 함으로써, 이 제도의 비인간성과 모순을 더 알기 쉽게 설명할 수 있다. 반상 구분의 모순을 서술하기 위해서는, 반상 구분을 당연하게 여기는 조선인들보다는 조선에 타임슬립 한 현대인의 시선을 빌리는 편이 편리할 것이다.


다나가 타임슬립 하는 이유는 소설 끝까지 알려지지 않는다. 어떤 과학적인 장치가 소개되거나, 판타지적인 설정이 설명되지도 않는다. 다나는 루퍼스의 목숨이 위태로워지면 19세기로 타임슬립 했다가, 자신의 목숨이 위태로워지면 현대로 돌아온다. 19세기에서 오랜 시간을 보낸 뒤 돌아와도, 현대로 오면 짧은 시간만 흐른 상태다. 덕분에 다나는 어린 루퍼스가 성장하면서 인간이 다른 인간을 노예로 부리는 제도를 공기처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과정을 목격한다.


흥미로운 건 루퍼스가 또래 흑인 여성 앨리스를 대하는 태도가 데이트 폭력 혹은 스토킹의 멘탈리티와 유사하다는 것이다. 루퍼스는 앨리스를 사랑하지만, 앨리스는 루퍼스를 사랑하지 않는다. 둘 사이엔 이미 농장주와 노예라는 건널 수 없는 간극이 있다. 루퍼스는 그 간극을 느끼지 못하지만, 앨리스는 크게 느낀다. 앨리스는 다른 흑인 남성과 함께 도망치려다가 붙잡히고, 결국 루퍼스의 노예가 된다. 루퍼스는 앨리스가 험한 집안일을 하지 않도록 하고 자신의 침실에 들어오도록 한다. 루퍼스는 그것이 앨리스를 위한 일이며 배려라고 생각하지만, 앨리스는 그것이 결국 '성노예'라고 여길 수밖에 없다. 루퍼스는 앨리스가 자신을 떠나지 못하도록 간단한 계략을 떠올린다. 계략은 궁극적으로 무해한 것이었지만, 앨리스는 아이들이 장난으로 던진 돌을 목숨 걸고 피해야 하는 개구리가 된다. 데이트폭력이나 스토킹 같은 행위가 범죄라는 인식이 없었을 1970년대에 버틀러는 이미 그것의 폭력성을 인식했다. 이 소설이 노예제에 대한 고발을 넘어서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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