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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과 하루

빔 벤더스 '퍼펙트 데이즈'

by myungwor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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빔 벤더스의 '퍼펙트 데이즈'는 도쿄의 공중 화장실을 알리는 단편영화 프로젝트에서 시작했지만, 벤더스는 '코모레비'라는 일본어에서 작품의 영감을 끌어온 것으로 보인다. 엔딩 크레디트가 다 올라가고 '나뭇잎 사이로 드는 햇살'이라는 코모레비의 뜻이 나오고, 이는 매일 반복되는 현상이지만 똑같은 적은 전혀 없음을 의미한다는 해석도 곁들인다.

화장실 미화원 히라야마는 매일 점심 신사 부근의 같은 벤치에 앉아 샌드위치와 우유를 먹으며 필름 카메라로 코모레비를 찍는다. 영화는 히라야마가 찍은 사진을 보여준다. 매일 같은 자리에서 같은 카메라로 같은 대상을 찍은 사진이라 크게 다르지 않지만, 그렇다고 똑같지도 않다. 마치 히라야마의 일상과도 같다.

히라야마는 휴일을 제외하곤 거의 똑같은 삶을 산다. 골목길을 청소하는 할머니의 비질 소리에 잠을 깨고 싱크대에서 양치질을 한 후 청소도구를 들고 출근한다. 캔커피를 사들고 차에 탄 뒤 테이프로 노래를 듣는다. 대체로 루 리드 같은 1960~70년대 팝이다. 거울을 통해 육안으로 보이지 않는 이면까지 청소한 후 샌드위치 점심을 먹고 다시 오후에 청소한다. 퇴근한 뒤에는 공중목욕탕에 들르고, 지하철 역사의 식당에서 저녁을 먹는다. 자전거를 타고 집에 돌아와 문고판 책을 읽은 뒤 잠에 든다. 포크너, 하이스미스 같은 책들이다. 휴일에는 세탁소에 청소복을 맡기고 사진을 찾으면서 필름을 맡기고 문고판 책을 사러 서점에 들르고 단골 술집에 간다. 다음 근무일엔 다시 평일의 일상을 산다.

이 루틴을 깨는 일들이 있긴 하다. 젊고 책임감 부족한 동료 미화원 타카시가 돈을 빌린 뒤 일터에 나타나지 않거나, 그의 여자친구가 히라야마의 테이프를 마음대로 빌려갔다가 돌려주거나, 오랫동안 보지 못했던 조카니코가 나타난 뒤 그의 엄마이자 히라야마의 여동생 게이코가 딸을 찾으러 오고, 단골 술집 주인이 전 남편과 함께 있는 장면을 목격하거나... 쓰고 보니까 많은 일이 있는 것 같지만, 모두 다음 근무일이면 언제였나 싶게 지나갈 일들이다.

물론 히라야마가 그리 무심한 사람은 아닐 것이다. 사건은 사건대로 히라야마의 마음, 의식 어딘가에 남을 것이다. 다만 히라야마는 그 모든 작은 사건들을 묻고 살아간다. 자세히 밝혀지지 않은 아버지와의 사연처럼. 히라야마의 동작 중 가장 많이 보이는 것은 고개를 45도 정도 하늘로 쳐다보며 가벼운 미소를 짓는 것이다. 날이 흐리든 아니든 같다. 신사 벤치에서 코모레비를 보고 좋아하는 그 자세 그대로다. 하늘을 보고 좋아하는 건가, 하늘 너머의 무언가를 보는 건가. 히라야마는 하루를 살지만 영원을 보는 것 같다. 마치 수도를 하는 듯 같은 루틴을 반복하고 작은 사건의 연속을 겪으면서도 루틴을 또 반복하고 그 하루하루를 살다 보면 영원을 보고 그곳에 이를 수 있다고 믿는 것일까.

히라야마를 폐쇄적인 사람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 같다. 주변에 어떤 일이 있어도 마음 쓰는 척할 뿐 실제로는 아무 행동 하지 않는 사람이라고 볼 수도 있다. 하지만 대승이 있으면 소승도 있는 것 아닌가. 히라야마는 봉쇄수도원의 수도자 같은 사람이다. 이미 세상에서 물러난 뒤 매일 같은 행동을 통해 자신의 내면만을 주시하는 사람이다. 하루를 살며 영원에 이르는 수행을 하는 사람이다. 매일 무언가를 이루어야 하고 발전해야 하고 성장해야 한다는 강박에서 벗어나, 같은 일을 함으로써 궁극의 평안에 이를 수 있다는 전언. 인류 역사상 많은 수도자, 철학자, 명상가가 전해온 말이지만, 스크린에서 만나는 경험은 또 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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