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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보코프의 러시아 문학 강의

by myungwor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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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들 도스토예프스키, 톨스토이를 말할 때 난 혼자 나보코프를 좋아한 적이 있다. 지금은 톨스토이가 더 좋지만, 여전히 나보코프도 훌륭하다고 생각한다. 가장 유명한 '로리타'보다는 상당히 통속적이면서도 흥미진진한 '어둠 속의 웃음소리'가 좋았고, 믿을 수 없게 잘 쓰인 자서전도 좋았다. 나보코프 자서전은 샐먼 루슈디 자서전과 함께 내가 가장 흥미롭게 읽은 자서전에 속한다.

러시아 혁명 당시 조국을 떠나 해외 여기저기로 떠도는 삶을 살아온 나보코프는 생계를 위해 여러 곳에서 강의를 했던 모양이다. 글만 써서는 먹고살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물론 몇 편의 히트작을 낸 뒤에는 전업작가의 삶을 살았다.

'나코보프의 러시아 문학 강의'(을유문화사)는 그 결과물이다. 생전에는 순전히 강의를 위한 노트 수준이었기에 출간되지 않았고, 사후 미국에서 출간됐다. 생전 출간했다면 이런 글이 안 나왔을 수도 있다. 그렇게 느끼는 것은 내용이 꽤 신랄하기 때문이다. 대학 강의실이라는 한정된 공간의 특성이 있고, 강의가 몰래 녹음되거나 '문제적 발언'이 곧바로 소셜 미디어에 공개될까 봐 걱정할 일도 없었으니, 앞선 러시아의 작가에 대한 나보코프의 평가는 솔직하고 가차 없다. 생전 글로 써서 출간했다면 널리 반발을 샀을 가능성도 있다.

물론 먼 훗날 이 글을 읽는 독자는 즐겁다. 특히 도스토예프스키에 대한 고평가를 아직까지 이해할 수 없고, 설교자 같다거나 고리타분하고 교훈적이라고 여겨지는 톨스토이를 좋아하는 나로서는, 도스토예프스키보다 톨스토이를 높게 평가하는 나보코프의 입장에 동의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고리키는 당대 사회상을 짐작하게 하는 의미로서만 가치 있을 뿐 2류 작가에 불과하다고 평가하는 대목에 이르러서는, 대학 때 '어머니'를 읽은 뒤 한 번도 고리키를 들춰본 적이 없는 내 상황을 생각해보기도 했다. 물론 그때는 '어머니'를 재미있게 읽었는데, 그건 당시 분위기 때문이었을 수도 있다. 지금으로선 도스토예프스키에 재차 도전을 해볼지언정 고리키를 다시 읽을 생각은 전혀 들지 않는다. 체호프에 대한 고평가 역시 마음에 든다. 연극 '벚꽃동산'을 관람하고 희곡도 읽은 것을 계기로, 그의 단편을 다시 읽어볼까 챙겨두었던 참이다. 체호프는 어떤 의미에서 러시아의 나쓰메 소세키 같은, 상당히 모던한 작가였다는 생각이 든다. 몇 대목 발췌.


좌파 비평가들은 많은 장점에도 불구하고 예술에 관해서는 정부와 마찬가지로 문외한이었다. 정부와 혁명주의자, 차르와 급진주의자들은 모두 예술에 대해서는 똑같은 속물이었다. 폭정을 뿌리뽑고자 했던 좌파 비평가들은 다시금 자신들의 폭정을 심어 놓았다. 그들이 강제하고자 했던 주장, 설득, 이론은 정부가 고수한 구습만큼이나 예술에 무관심했다. (...) 대담하고 용감하게 그들은 자유와 평등을 외쳤지만, 예술을 정치에 종속시키려 함으로써 자신들의 신념에 모순되는 결과를 초래했다. 차르가 작가들을 국가에 복무시키려 했다면, 좌파 비평가들은 민중에게 복무시키려 한 것이다.

훌륭한 독자는 보편적 관념보다는 개별적 상상을 좋아한다. 특정 그룹(끔찍한 진보주의자들이 즐겨 사용하는 표현) 사람들과 어울리기 위해 소설을 읽는 게 아니라, 작품의 섬세한 디테일을 흡수하고 이해하기 때문에, 작가가 의도한 즐거움을 즐길 줄 알고, 내면과 온몸으로 빛을 뿜을 줄 알기 때문에, 그리고 위조의 달인, 상상의 달인, 마술사, 예술가가 만들어 낸 상상의 세계에 전율을 느끼기 때문에 소설을 읽는다.

투르게네프와 고리키, 체호프는 해외에서 특히 유명한 작가들이다. 그러나 그들 사이에는 어떤 자연적 연관성도 없다. 다만, 투르게네프의 최악이 고리키를 통해 완벽히 재현되었고, 투르게네프의 최선이 체호프에서 아름답게 승화되었다고 할 수 있다.

도스토옙스키에 대해 나는 다소 난처하고 곤란한 입장이다. 모든 강의에서 나는 문학이 나를 흥미롭게 한다는 관점, 다시 말하면 불후의 예술, 천부적 재능이라는 관점에서 문학에 접근한다. 이렇게 보면 도스토옙스키는 위대한 작가가 아니다. 훌륭한 유머가 번득이긴 하나 문학적 진부함이라는 황량함을 지닌 평범한 작가에 불과하다.

재소자들 가운데 짐승 같은 끔찍함 이외에도 가끔 인간적 면모를 보여 준 이들이 있었다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도스토옙스키는 그런 경우를 모아 그것을 토대로 러시아 민중에 대한 매우 인위적이고 병적인 이상화를 시도한다.

레오 톨스토이 백작은 불굴의 영혼을 가진 강건한 남자였다. 그의 일생은 감각적인 기질과 지나치게 예민한 양심 간의 투쟁으로 점철되어 있다. 한편에는 한적한 시골길을 따르고자 하는 수행자가 있고, 다른 한편에는 끊임없이 도시의 육체적 쾌락을 추구하는 탕아가 있다. 그의 욕망은 끊임없이 그를 잡아끌어 조용한 수행자의 길에서 벗어나게 했다.

푸시킨에게 있어서 진리는 숭고한 태양 아래 빛나는 대리석과도 같았다. 훨씬 열등한 작가인 도스토옙스키는 진리가 피와 눈물, 히스테리 발작과 현안의 정치적 문제들, 그리고 땀으로 이루어졌다고 생각했다. 체호프는 일상의 흐릿한 풍경에 몰두한 듯, 진리를 회화적 시선으로 마주했다. 톨스토이는 턱을 아래로 당기고 주먹을 꼭 쥔 채 진리에 맞서 나아갔고, 십자가가 서 있던 흔적에 도달했다.

달리 말하면 체호프는 등장인물을 교훈의 수단으로 삼지 않았고, 인물을 미덕의 전형으로 만들지 않았다. 고리키나 다른 소비에트 작가들이 추구한 사회적 진실을 답습하지도 않았고 그 대신 살아 숨쉬는 인간상 그대로를 정치적 메시지나 문학적 전통에 얽매이지 않고 그려 냈을 뿐이다.

체호프는 좋은 장편을 쓰지 못했다. 그는 장거리보다는 단거리 주자였다. 그는 자신의 천재성이 여기저기서 뽑아낸 삶의 무늬를 오랫동안 담아내지 못했다.



체호프는 고골 같은 어휘 발명가는 아니다. 그래서 그의 문체는 늘 평상복 차림으로 파티에 간다. 때문에 체호프는 탁월하게 생기 넘치는 어휘 기술이나 극도로 세밀한 문장의 굴곡 없이도 완벽한 예술가의 경지에 오를 수 있음을 보여 주는 좋은 본보기다.

정치적 성향을 가진 비평가들은 인물에게 어떤 정치 성향도, 어떤 강령도 부여하지 않는 체호프가 못마땅했다. 하지만 이게 바로 핵심이다. 체호프 속 무능한 이상주의자들은 테러리스트도, 사회민주 당원도, 신예 볼셰비키도, 러시아 수많은 혁명 정당의 당원도 아니었다. 전형적인 체포흐적 주인공은 짊어지고 가지도, 내던져 버리지도 못하는 짐을 인 채로 모호하지만 아름다운 인간의 진실을 담아내는 불행한 전달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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