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티븐 핑커 '글쓰기의 감각'
가끔 글쓰기에 관한 책을 읽는다. 아직까지 생각나는 것 중 첫째는 스티븐 킹의 '유혹하는 글쓰기'다. 자전적 이야기와 함께 글쓰기에 대한 정직하고 신랄한 조언이 담겨 있다. 읽은 지 오래돼 디테일은 생각나지 않지만, '프루스트처럼 쓸 거 아니면 내면이나 풍경 묘사 하지 말고 행동을 그려라'와 같은 조언이 담겨 있었다고 내 멋대로 기억한다. 맞는 말이다. 대부분 필자들은 자신이 프루스트인지 누구인지 몰라서 문제긴 하지만.
오랜만에 글쓰기 책을 읽었다. 스티븐 핑커의 '글쓰기의 감각'(사이언스 북스)이다. 핑커는 물론 '빈 서판' '우리 본성의 착한 천사' 같이 유명한 책을 썼지만, 본격적인 '작가'라기보다는 '학자' 이미지가 강하다. 핑커가 글쓰기 책을 쓰는 건 주제넘은 일이었을까.
아니다. 이 책은 사실 꽤 재미있다. 스티븐 킹처럼은 아니지만, 스티븐 킹 못지않게 미국적이며 실용적인 글쓰기의 방법을 알려준다. '21세기 지성인들을 위한 영어 글쓰기의 정석'이란 한국어 부제가 붙었다. 어떤 챕터는 영어의 특성에 대한 설명이 많아 영작을 할 일이 없는 사람은 굳이 꼼꼼히 읽을 필요가 없다. 다른 장은 핑커가 '고전적 글쓰기'라 부르는, 논점을 눈에 보이듯 설명하며 글 쓰는 방법을 알려준다. 핑커의 글쓰기 방법은 문학보다는 학계, 관계, 기업, 법조계에서 좋은 글을 쓰고 싶은 사람들을 위한 조언이다. 낯익은 어휘와 추상적 요약보다는 참신한 단어와 구체적 이미지를 활용하고, 독자의 시선을 신경 쓰며, 단순한 명사와 동사를 바탕에 깔되 간간이 특이한 단어나 관용구를 쓰는 게 좋다고 조언한다. 무엇보다 "우리(독자)에게 꼭 보여 주고 싶은 장면이 있는 것처럼 쓴다"는 것이 '글쓰기의 감각'(이 책의 원제)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라고 강조한다. "고전적 글쓰기 스타일은 독자가 스스로를 천재처럼 느끼도록 만들지만, 나쁜 글은 독자가 스스로를 멍청이처럼 느끼도록 만든다."
그러므로 독자를 절망에 빠트리는 몇몇 학자의 글은 나쁘다. 1990년대 말 연례 '나쁜 글 대회'라는 것이 있었다고 한다. 글쓰기에 대한 입장과 세계관이 핑커와 비슷한 것으로 추정되는 미국 철학자 데니스 더턴이 만들었다고 한다. 1997년에는 프레더릭 제임슨, 1998년에는 주디스 버틀러가 '우승'했다. 핑커가 제시한 명료한 글쓰기 예문들 사이 제임슨과 버틀러의 난해한 한 단락을 뚝 떼어 던져 놓으니 이들의 글이 우스꽝스럽게 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제임슨과 버틀러의 글은 어렵고, 어렵다는 감정을 나만 느끼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을 넘어, 이들의 글쓰기에 무언가 잘못된 점이 있다는 신랄한 지적을 들으니 '통쾌하다'는 감정과 '너무하다'는 감정과 '부당하다'는 감정이 뒤섞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