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티븐 킹 '캐리'
스티븐 킹의 소설을 읽어왔다. 엄청난 애독자라고 하진 않겠지만, 그래도 킹은 신작이 나올 때마다 내가 관심 두는 몇 안 되는 작가라는 건 분명하다. 의외로 데뷔작이자 출세작 '캐리'(1974)는 이번에 처음 읽었다. 브라이언 드 팔마의 영화를 오래전에 봤기에, 소설까지 읽을 생각은 들지 않았던 것 같다. 찾아보니 영화는 책 출간으로부터 불과 2년 뒤 공개됐다. 원작이 출간 당시 상당히 높게 평가받았다는 증거다.
스토리는 너무나 단순하다. 근본주의적 종교관(사실상 사이비)을 가진 홀어머니 아래서 성에 관한 모든 욕구와 지식을 억압당한 채 살아오던 소녀 캐리가 첫 생리를 시작했는데, 캐리는 학교에서 여러 가지 이유로 왕따였고, 또 하필 엄청난 염력을 잠재하고 있던 사람이었으며, 어쩌다 캐리를 불쌍히 여기고 죄책감을 가졌던 친구의 도움으로 캐리는 학교 무도회에 파트너와 함께 참석했는데, 캐리를 싫어하던 빌런이 캐리 커플에게 돼지피를 뒤집어씌우는 망신을 주고, 캐리는 순간 정신이 나가 초능력으로 마을 전체를 쑥대밭으로 만든다는 얘기다. 사실 아직도 드 팔마가 연출한 체육관 학살 장면이 눈에 선하다. 하얀 드레스를 입은 채 머리에 피를 뒤집어쓴 캐리의 모습도. 드 팔마의 연출력이 짱짱하던 시절 이야기다.
킹은 꽤 야심을 부린다. 단순한 이야기를 직선적으로 끌고 가는 대신, 여러 가지 보고서, 심문 기록, 신문 기사, 회고록 등을 삽입시켜 이야기 흐름을 자꾸 방해한다. 캐리의 운명이 어떻게 되는지 궁금한 사람들에게는 장애물이지만, 야심만만한 청년 작가에겐 필요했던 장치이기도 하다. 생리혈에 대한 묘사, 청소년의 성적 욕망이 시작되는 대목에 대한 묘사 같은 것은 아슬아슬한 감각이 있다. 킹도 충분히 알고 활용한 것 같다. 그러니 그가 대중에게 사랑받으며 50년간 글을 써온 것이다.
왕따 소녀의 복수극이 처리되는 방식도 흥미롭다. 지금 한국에서 양산중인 따돌림 피해자의 복수 서사를 다룬 대중문화 컨텐츠와는 전혀 다르다. 동시대 정서와 방법이 너무 익숙하기 때문인가. '캐리'가 훨씬 신선하고 흥미롭다. 피해자이자 극단의 가해자인 캐리는 따돌림 피해자 서사의 흔한 구도를 쉽게 빠져나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