착해 보이는 사람이 더 위험할 수 있다
2026년 1월, 글쓰기 강사 출신 유튜버 K씨가 자신을 재림예수라고 칭하며 신도들을 현혹한 사건이 JTBC 단독 보도로 세상에 알려졌다. K씨는 자신이 인류를 구원할 특별한 사명을 띠고 이 땅에 왔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곧 다가올 심판의 날을 피하려면 자신을 믿어야 한다며, 소위 ‘성전’을 짓기 위한 막대한 자금을 요구했다. 이 황당한 주장에 누가 속을까 싶지만, 절박한 구독자들은 K씨의 확신에 찬 목소리에 위로를 얻고 기꺼이 지갑을 열었다. 그렇게 2년간 갖다 바친 돈이 무려 50억 원에 달한다. 이 사건은 현재 화성동탄경찰서에서 사기 및 기부금품법 위반 혐의로 수사 중이다.
우리는 이 사건을 보며 “저걸 왜 믿어?”라고 고개를 젓는다. 그러나 “저걸 왜 믿었을까?”가 아니라 “왜 못 알아봤을까?”를 물어야 한다. 유튜버 K씨가 처음부터 “나에게 돈을 바치라!”고 했다면 아무도 따르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처음에는 진심으로 ‘남을 돕는 사람’처럼 잘 포장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순순히 따른 것이다.
우리가 흔히 떠올리는 나르시시스트는 ‘과시형(외현적/과대망상형)’이다. 겉으로 보기에는 매력적이고 카리스마 있으며, 관심 받는 걸 좋아해서 자신의 성공을 자랑하거나 매일같이 셀카를 찍어서 전시하기도 하며 모든 대화의 중심을 항상 자신에게로 끌어오는 전형적인 나르시시스트다. 유튜브와 SNS의 ‘나르시시스트 구별법’ 콘텐츠 대부분이 이 유형에 집중한다.
그런데 심리학에는 잘 알려지지 않은 또 다른 유형이 있다. 바로 ‘공동체적 나르시시스트(Communal Narcissist)’다. 이 유형은 나르시시즘의 핵심인 자신이 특별하고 우월한 존재라는 과대한 자기상은 동일하지만, 그것을 표현하는 방식이 전혀 다르다.
외현적 나르시시스트가 “내가 여기서 가장 능력 있고 성공한 사람이다”라는 식의 자아도취적인 표현을 즐겨 한다면, 공동체적 나르시시스트는 이렇게 표현한다. “내가 여기서 남들을 가장 잘 돕는 사람이다”, “나는 누구보다 다정하고 헌신하는 사람이다.” 이들은 자신이 얼마나 도덕적이고, 얼마나 남을 돕기 위해 희생하며, 얼마나 세상을 더 나은 곳으로 만들고 싶어 하는지를 끊임없이 과시한다.
"나는 너희의 고통을 이해하고 구원할 유일한 존재다"라는 서사를 통해 대중의 찬사와 숭배를 이끌어내는 공동체적 나르시시스트에게 ‘이타심’이란 자신의 우월함과 위대함을 증명하기 위한 도구일 뿐이다. 자기 위대함을 과시와 성취가 아니라, 봉사와 희생과 사랑의 언어로 표현하는 것이다.
나르시시즘 전문 심리학자인 라마니 더바술라 박사는 <누구도 나를 함부로 대할 수 없습니다>에서 “공동체적 나르시시스트는 자기 계발과 긍정에 대해 설교하는 영적 또는 사이비 종교의 환경에서 볼 수 있는 유형”이라며, “이들의 선행은 쓰레기 줍기 같은 사소한 행동을 인스타그램에 올리는 것부터 대규모 비영리 재단을 설립한 뒤 직원들에게 갑질하는 행동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고 설명한다. 결국 이들의 핵심은 ‘지독한 위선과 이중성’이다. 공동체적 나르시시스트가 위험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우리는 ‘겉보기에 남들을 돕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에게 경계심을 쉽게 풀기 때문이다.
앞서 소개한 ‘재림예수’ 유튜버 K씨의 경우는 두 가지 유형이 혼합된 사례로 보인다. 그는 수 년 전부터 자신의 부를 과시해왔으며 “나는 재림예수다”라고 직접 선언한 것은 과대망상적인 자아상을 드러내는 ‘외현적 나르시시스트’의 전형이다. 그러나 K씨가 그 자리에 오르기까지의 과정을 들여다보면 ‘공동체적 나르시시스트’의 특징도 뚜렷하게 보인다. 글쓰기 강사 시절에는 ‘나는 당신의 글쓰기를 도와주는 사람’이었고, 이후에는 ‘나는 당신의 인생을 바꿔주는 사람’, 그리고 마지막에는 ‘나는 당신의 영혼을 구원하는 사람’으로 자기 위상이 단계적으로 격상됐다. 각 단계마다 그의 언어는 일관되게 “이건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당신을 위해서 하는 일”이었다. 처음에는 봉사와 헌신의 언어로 신뢰를 쌓은 뒤, 그 신뢰가 충분히 축적되었을 때 비로소 자신을 본격적으로 신격화하는 수순을 밟은 것이다.
공동체적 나르시시스트는 왜 그토록 ‘구원자’가 되고 싶어 할까? 누군가를 돕는 위치에 선다는 것은 곧 상대방보다 내가 우월하다는 완벽한 증명이기 때문이다. 공동체적 나르시시스트가 보여주는 극단적인 형태가 바로 사이비 종교의 교주들이 겪는 ‘메시아 콤플렉스(Messiah Complex)’다.
이들은 초기에는 사람들의 가장 아픈 곳을 어루만지며 세상에 둘도 없는 성자(聖者)처럼 군다. 하지만 이들의 선행에는 반드시 청구서가 따른다. “내가 너를 구원해 주었으니, 너는 내게 절대적으로 복종하고 모든 것을 바쳐야 한다”는 암묵적 요구다.
진정한 이타주의자는 대가를 바라지 않으며, 남을 돕는 자신의 행동을 동네방네 떠벌리지 않는다. 무엇보다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는 ‘지적 겸손’을 갖추고 있다. 하지만 공동체적 나르시시스트는 자신이 선행을 베풀고 도움을 줬다고 생각한 누군가가 외부에 이를 공개적으로 알리지 않거나 칭찬하지 않으면 걷잡을 수 없이 분노한다. “내가 너를 위해 이렇게 희생했는데, 감히 이런 나를 모른 척해?”라며 상대를 배은망덕한 악마로 몰아붙인다.
공동체적 나르시시스트의 언어에는 특징적인 패턴이 있다. 자신의 모든 행동을 타인을 위한 것으로 프레이밍한다. “내가 이렇게 말하는 건 당신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표현의 핵심은 자기 위대함에 대한 주장이 이타심의 외피를 두르고 있다는 점이다. 그들은 “나는 특별한 사람”이라고 직접 말하지 않는다. 대신 “나는 특별한 사명을 받았고, 그 사명이 당신을 위한 것”이라고 말한다. 듣는 사람은 자신이 선택받은 사람의 은혜를 입고 있다는 착각에 빠지게 된다.
공동체적 나르시시스트에게 끌리는 데는 심리학적 이유가 있다. 인간은 자신을 진심으로 걱정해주고, 공동체를 위해 헌신하는 사람을 신뢰하도록 진화해왔다. 그런 사람은 실제로 공동체에 유익하기 때문이다. 공동체적 나르시시스트는 바로 이 신뢰 본능을 자원으로 활용한다.
그렇다면 진심으로 공동체를 위하는 사람과 공동체적 나르시시스트를 어떻게 구별할 수 있을까?
한 가지 기준은 ‘타당한 근거가 있는 건전한 비판을 어떻게 처리하는가’다. 진심으로 공동체를 위하는 사람은 자신의 판단이 틀릴 수 있다는 가능성을 열어둔다. 하지만 공동체적 나르시시스트는 자신에 대한 의심이나 비판을 공동체를 해치는 행위로 규정한다. “나를 의심하는 것은 곧 우리 모두를 배신하는 것”이라는 방어적 논리가 작동하기 시작하면, 그 집단 안에서 비판적 사고는 도덕적 범죄가 된다.
‘착한 사람’, ‘다정한 사람’, ‘헌신적인 사람’이라는 이미지는 그 자체로는 훌륭한 자질이다. 하지만 그 이미지를 통해 자신의 특별함을 증명하려는 욕구가 그 뒤에 숨어 있다면, 우리는 경계하기 어려운 종류의 함정인 ‘공동체적 나르시시스트’ 앞에 무방비하게 서 있는 건지도 모른다.
구원은 타인의 입에서 나오지 않는다. 비판적 사고를 통해 스스로 질문하고 사실 관계를 확인하며 한 걸음씩 나아가는 이성적인 판단 안에 있다. 누군가의 머리 위에 빛나는 가짜 후광에 눈이 멀어 내 삶의 주도권을 넘겨주지 않는 태도야말로 선의를 위장한 공동체적 나르시시스트들로부터 나와 내 가족을 지켜준다.
<참고 문헌>
Gebauer, J. E., Sedikides, C., Verplanken, B., & Maio, G. R. (2012). Communal narcissism. Journal of Personality and Social Psychology
라마니 더바술라, <누구도 나를 함부로 대할 수 없습니다>(원제: It’s not you, 알에이치코리아, 20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