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딱 두 가지로만 쪼개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들이 있다. ‘내 편 아니면 적’, ‘절대선 아니면 절대악’이라는 식이다. 이들에겐 중간 지대가 들어설 틈은 없다. 언젠가 SNS에서 우연히 마주친 짧은 글은 이러한 극단적 흑백논리가 어떻게 작동하는지 적나라하게 보여주었다.
“영의 세계는 오직 천국과 지옥, 하나님의 세계와 사탄의 세계로만 나뉜다.” 여기까진 개인의 신앙 고백으로 넘길 수 있다. 하지만 고구마가 목에 걸린 듯한 기분이 드는 지점은 그 다음에 이어지는 선언이었다. “이런 이분법적인 얘기가 불편하게 느껴진다면, 당신이 아직 진리를 몰라 어리석은 탓이다.”
인간의 뇌는 본래 이분법을 좋아한다. 좋다/나쁘다, 아군/적군, 옳다/그르다. 복잡한 현실을 두 개의 칸으로 나누면 판단이 빨라지고 에너지가 절약된다. 진화적으로도 유리했다. 저 수풀이 안전한가 위험한가를 빠르게 결정해야 했던 존재가 우리의 조상이었으니까.
종교는 오래전부터 이 본능을 알고 있었다. 빛과 어둠, 선과 악, 구원과 저주. 이분법적 언어는 종교의 전유물이 아니라 인류 보편의 서사 문법이다. 조로아스터교의 아후라 마즈다와 아흐리만, 불교의 윤회와 열반, 유교의 군자와 소인. 세계 어디서나 이 구조는 반복된다.
앞서 인용한 글의 핵심 장치는 단순한 이분법이 아니라, 바로 ‘네가 불편하다고 느끼면 그것 자체가 증거’라는 폐쇄적인 논리 구조다. 어떤 반론이 들어와도 그 반론 자체가 주장을 강화하는 증거로 흡수되도록 설계된 논리다. 동의하면 진리이고, 반박하면 ‘네가 아직 깨닫지 못한 사람’이라는 증거가 된다. 이 구조 안에서는 어떤 비판도 살아남을 수 없다.
칼 포퍼는 반증 가능성이 없는 주장은 과학이 아니라고 했다. 그런데 이것은 과학의 문제만이 아니다. 반증 가능성이 없는 주장은 대화도 불가능하게 만든다. 상대의 의심을 무지로, 질문을 불신앙의 증거로 처리하는 순간, 그 언어는 진리를 탐구하는 도구가 아니라 상대를 제압하는 도구로 바뀐다.
사실, 기독교 신학의 본류는 이 글의 구조와 상당히 다르다. 기독교 영성의 긴 전통에서 성숙한 신앙인들은 공통적으로 자신의 앎의 한계를 고백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진리 앞에서의 끊임없는 갈망을 이야기했고, 신학자 폴 틸리히는 회의를 신앙의 반대가 아니라 필수적인 구성 요소로 보았다. 도스토옙스키의 소설에서 숭고한 신앙의 언어가 늘 깊은 회의와 함께 나오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진정한 신앙은 ‘나는 진리를 알고 너는 모른다’며 타인을 재단하는 것이 아니라, 진리 앞에서 무너지는 자, 의심과 씨름하는 자를 품어내는 관용을 지닌다.
따라서 ‘모르면 어리석은 것’이라는 식의 단정은 기독교 신학의 핵심이라기보다, 신학의 언어를 선택적으로 취사해서 자기 확신을 강화하는 데 사용한 결과에 가깝다. 이것은 신앙의 언어로 포장된 확증 편향이다.
스스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나약한 존재라며 절대자 앞에 납작 엎드린 듯 보이지만, 윗 글의 기저에는 짙은 우월감이 깔려 있다. 세상을 명쾌하게 해석하는 유일한 ‘진리’를 자신만이 소유하고 있으며, 이를 모르는 대중은 계몽하고 훈계해야 할 불쌍한 대상일 뿐이다. 자신을 신의 대리인 내지는 절대적 진리의 대변인 위치에 올려놓는 이러한 태도는 ‘영적 우월감’의 전형이며, 심리학에서는 공동체적 나르시시즘(communal narcissism)이라고 부른다. 이들에게 종교적 신념은 타인을 섬기고 사랑하기 위한 도구가 아니라, 타인 위에 군림하고 통제하기 위한 권력으로 작용한다. 자신을 낮추면서 그 낮춤을 통해 “나는 이미 깨달은 사람”이라는 우월한 위치를 점하는 것이다. 이는 겉으로는 겸손과 신앙을 말하지만, 실제로는 자신을 진리의 소유자이자 타인의 판단자로 세우는 태도다. C.S. 루이스는 <순전한 기독교>에서 교만을 “본질적인 악덕”이자 “완전히 반(反)신적인 마음 상태”라고 보았는데, 바로 이런 영적 우월감이 그 교만의 한 형태라고 할 수 있다.
건강한 철학이나 종교는 세상을 흑백으로 재단하여 공포를 조장하지 않는다. 도리어 우리가 사는 세상이 얼마나 복잡하고 다의적인지 인정하고, 그 안에서 인간이 마주하는 실존적 고뇌를 끌어안는다. “당신이 불편하다면 그건 당신이 모르기 때문이다”라고 말하는 순간, 대화의 문은 닫힌다. 진리를 전하려는 자가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상대의 회의를 존중하는 것이다. 그런 태도가 없다면, 아무리 옳은 말도 그저 권력의 언어로 들릴 뿐이다.
흑백논리가 불편한 것은 세계가 실제로는 훨씬 복잡하기 때문만이 아니다. 이분법이 ‘진리를 아는 나 vs 모르는 너’를 나누는 도구로 쓰일 때 그건 이미 신앙이 아니라 지배와 통제의 문법이 되기 때문이다.
누군가 당신에게 세상을 둘 중 하나로만 선택하라고 강요한다면, 우리는 그 선택지 바깥에 존재하는 수많은 합리성과 주체성의 영역을 바라보아야 한다. 맹신을 요구하는 오만한 흑백논리에 맞서는 무기는 끝까지 질문을 포기하지 않는 비판적 사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