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O의 순간을 제안하는 작업, <가슴친구, 한강의 정서>
2020 서울을 바꾸는 예술 – 유방랜드, 임정서 인터뷰
인터뷰/정리 : 임현진(독립기획자)
누군가는 나와 비슷한 고민을 하지 않았을까.
어쩌면 내가 경험했던 애도의 시간들이, 다른 이들에게 연대의 자리가 되어줄 수 있지 않을까.
‘유방랜드’의 기획과 창작은 질문으로부터 시작한다. 그리고 그 질문에 답을 해나가는 과정을 차근차근 담아 묵직한 꾸러미를 만들어낸다. 그 꾸러미 안에는 여러 이야기들이 제각기의 방식으로 담겨 있는데, 받는 사람이 누구인지에 따라 각자가 원하는 대로 이를 삶에 적용하게 된다. 촘촘하고 섬세한 설계가 있지만, 여전히 관객들의 참여로 완성되는 방식의 작업 <가슴친구, 한강의 정서>이다.
작가 임정서는 2018년 다원예술 퍼포먼스 <유방랜드, 유방 속으로>를 통해 어린 시절 유방암으로 돌아가신 어머니에 대한 기억을 보듬어내는 것에서 출발하는 작업을 선보였고, 이후 ‘유방랜드’라는 단체를 만들어 작업을 이어나가고 있다. 유방암을 넘어서서 병과 죽음으로 인한 상실, 그리고 사회로부터의 억압과 우울을 예술로 마주해낸다. 2020년 유방랜드 시즌 2 <가슴친구, 한강의 정서>는 ‘서울을 바꾸는 예술’ 사업의 선정작으로, 고유의 예술적 방법론을 통해 동시대 사회의 단면들을 살피고, 연대의 메시지를 전하는 것을 목적에 둔다. 애도의 에세이들이 담긴 사운드 작업 ‘한강의 정서’와 더불어 이야기들을 글로 풀어낸 ‘마음섬’, 누군가와 함께 애도하고 위로해주는 대상으로서의 ‘가슴친구’를 상징하는 오브제들, 그리고 애도작업의 연장선상에서 펼치는 ‘한강의 유방방유 해프닝 퍼포먼스’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유방랜드’가 ‘서울을 바꾸는 예술’에 참여하게 된 계기는 참 독특하다. 사회적 예술에 대한 공공기관과 다른 기획자, 예술가의 생각이 궁금해서, 그리고 사회적 예술이 무조건 ‘친절한 예술’은 아닐 수 있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였다. 예술가의 정체성을 가지고 있던 ‘유방랜드’의 대표 임정서에게 사회적 예술은 친절할 수도, 그렇지 않을 수도 있는 것이었다. 특정한 방식으로 사업의 방향과 주제를 정해두는 것은 예술 생태계에 보탬이 되지 않는다는 생각, 그리고 ‘친절한 예술’에 대한 고정관념이 예술을 덜 흥미롭게 만들 수 있다는 그의 의견에 공감하며 함께 웃었다. 질문을 수용하고, 함께 고민할 수 있는 사업으로서 ‘서울을 바꾸는 예술’은 ‘유방랜드’에 어떤 영향을 미쳤을지 궁금해진다. 호기심으로부터 대화를 나누었다.
예술가·창작자가 된 계기는 무엇인가요? 첫 시작은 무엇이었나요?
임정서: 원래 그래픽 디자인과 일러스트를 전공했어요. 제가 배운 것들은 주로 커뮤니케이션을 기반으로 하는 것이었고, 캠페인의 성향을 지닌 경우가 많았어요. 이러한 것들이 지금의 작업적인 성향과 양식에 영향을 미쳤던 것 같아요. 디자인이 이론적으로 다루는 ‘문제해결’의 접근 방식은 정말 재밌었는데, 실무는 좀 달랐어요. 클라이언트와 잘 맞지 않는다거나, 클라이언트가 좋은 선택을 하지 않는데도 말릴 수 없는 상황도 있었고, 스스로의 창의적인 의도를 더 반영하지 못한다는 것에 갈증이 생겼죠. 그래서 순수창작의 길로 들어서게 되었어요. 2013년 단편영화 <남근선망>이라는 작업을 하게 되면서 필름 메이커로 창작을 시작했어요.
시각예술과 공연예술을 오고가며 창작자, 기획자 등 다양한 정체성으로 스스로를 설명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대표적으로 소개하고 싶은 작업이 있다면 이야기해주세요.
임정서: 2018년의 <유방랜드, 유방 속으로>는 몰입형 연극(Immersive Theater)를 추구했어요. 그때는 유방암으로 돌아가신 어머니를 기억하며 이 문제를 나의 삶에서 풀고 가야겠다는 생각으로부터 시작했는데, 슬픔에 함몰되는 저 자신을 발견하기도 했죠. 단기간에 풀어낼 수 있는 일이 아니더라고요. 작업에서는 심리학에서 이야기하는 시련 극복의 단계를 설계함으로써 상처를 마주하고, 이를 부정하고, 이내 수용하는 단계로 나누어 스스로를 대입해볼 수 있는 구조를 만들었어요. 관객 스스로가 주인공이 되어서 참여할 수 있도록 했죠. 공연이 진행되는 50분 동안 연이은 수행적 퍼포먼스들이 있었어요. 빨간 의상을 입은 유방조직 세포에요. 이들은 동일한 행동을 반복하다가, 시간이 되면 다른 장소로 이동을 하죠. 관객도 이들과 더불어서 마치 병원복 같은 부직포 의상을 입고, 공간의 흐름을 따라 관람을 해요. 유방암 자가검진을 스스로 해보거나, 슬픈 마음을 적어서 파묻는 등 관객들의 행위도 공연의 주요 구성요소가 되는 방식이었어요.
요즘에는 기획자로서의 일도 많이 하고 있어요. 저는 기획이 창작의 연장선에 있다고 생각해요. ‘인디아트홀 공’으로부터 ‘병’에 대한 관심사를 바탕으로 기획을 해보자는 제안을 받았어요. 이에 총괄 기획의 역할을 맡아 ‘병’을 주제로 하는 <지구인을 위한 질병관리본부>라는 단체전을 준비했고, 이와 함께 <병과 식탁>이라는 관객 참여형 식사 퍼포먼스 시리즈를 기획했어요. 1년 전, 이 작업을 처음 시작할 때만해도 코로나19가 올 줄은 몰랐는데, 예기치 않게 시의성을 획득하게 된 작업이기도 했죠.
창작의 유형과 방법에 구속되지 않고 다양한 매체들을 통해 작업을 해오고 있는 것 같아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로 사용하는 예술·창작의 도구 혹은 방법론이 있나요? 혹은 다양한 방법론을 선택하는 기준이 있나요?
임정서: 아직도 저는 영화를 만들고 있다고 생각해요. 다만 전시나 프로젝트를 기획할 때에도 역시 공통의 ‘영화적 순간’을 만들고 있는 것 같아요. 저의 작업은 시각예술과 공연예술로 구분되는 것이 아니라 ‘시간예술’을 추구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아직 한국에서는 익숙한 개념은 아니지만요. 어떠한 질문을 제시하는 상황들을 만들어내서, 그것을 보는 사람들이 저마다의 방식으로 반응하고, 일상의 순간이 예술적 경험이나 영화적 순간으로 치환되는 접점을 만들고 싶어요. 오브제나 영상 등 제가 사용하는 모든 것들은 매개이고, 상황을 형성하기 위한 도구로 사용이 되어요. 그렇다보니 ‘매체’를 중심으로 이야기하면 ‘이것저것 만든다’는 대답을 할 수 밖에는 없더라고요. 장르적으로는 실험영화 중에서도 확장영화(Expanded Cinema)에 가까운 것 같아요. 확장영화는 스크린 밖으로 나오는 다양한 장치들을 탐구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지금은 저만의 방식으로 확장 영화를 연구해가는 과정에 있어요.
‘유방랜드’의 작업에 영향을 미치는 것들은 무엇인가요? 어떠한 관심사로부터 창작을 시작하는지 궁금해요.
임정서: 처음에 <남근선망>을 만들었을 때는, 여성으로서 겪는 사회적인 어려움으로부터 시작했던 것 같아요. 뉴질랜드에서 살다가 돌아온 저에게는 한국의 몇몇 현상들이 낯설게 느껴졌어요. 그 작업을 할 때만 해도 지금처럼 페미니즘이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의미 있는 이야기들을 할 수 있었죠. 이후 작업에서 유방암을 앓으셨던 어머니에 대한 기억을 다루게 된 것 역시 그 당시의 저의 고민과 잘 맞았던 것 같아요. 임정서라는 사람은 내가 삶에서 느끼는 문제의식들을 표현하고 발언하는 성향을 지닌 사람이에요. 예술은 그런 것들은 좀 더 증폭시켜서 이야기해줄 수 있는 장치가 아닐까 합니다.
저는 작업을 통해 다른 사람들과 대화하고 공감하고 싶어요. 어린 시절의 제가 처음으로 인식하게 된 유방은 유방암을 앓으셨던 어머니의 절단된 가슴이었어요. 되레 유방이라는 단어가 표면에 드러나는 것에 대한 사회적 거부감이 있다는 것은 한참 뒤에 알게 되었죠. 금기처렴 여겨지던 것들을 더 잘 전달하기 위해서는 전략도 필요하고, 표현의 수단도 더 개발해야한다는 생각을 해요. 삶이 피로할 때 위로를 주는 작업도 있고, 밋밋한 삶에 웃음을 주는 작업도, 때로는 무언가를 함께 고민하자고 말하는 작업들도 있겠죠. 저는 관객이었던 저에게 말을 거는 작업들, 삶에 영향을 주는 작품을 만났던 경험을 가지고 있어요. 그래서 저도 창작자가 되어 그런 일들을 하고 싶은 것이고요. 작업을 통해 단 한 사람이라도 만나서 대화하기를 바라고 있어요.
하고 싶은 이야기를 전하는 수단으로 예술을 생각하는 것인가요? ‘서울을 바꾸는 예술’에 참여하면서 어떤 변화가 있었는지, 예술의 역할에 대해 어떠한 고민을 하고 있는지 듣고 싶어요.
임정서: 예술을 단순히 발언의 수단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닌 것 같아요. 예술 자체를 좋아해요. 그냥 한국인이 쓰는 언어가 한국어이듯이, 예술을 하는 저는 예술의 언어를 통해서 말을 하는 것이에요. 작업을 하면서는 예술이 도구가 되는 것을 의도적으로 지양하고 있어요. 예술이 수단이 되어버리는 것이 좋아하지 않거든요. 예술 자체의 고유성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에요. 제가 생각하는 예술은 예술이 지닌 추상성과 사고의 확장 가능성을 통해 사람들로 하여금 열린 사고로 반응할 수 있게 해주어요. 그래서 내가 이것을 쉽게 도구화하고 있지는 않은지 계속 점검하려 하죠. ‘서울을 바꾸는 예술’을 통해 다른 참가자들과 대화하며 문득 ‘예술을 도구화하면 왜 안 되나요?’라는 질문을 받은 적이 있어요. 이전에는 생각해보지 않던 부분이어서 곰곰이 생각하게 되었어요. 예술을 도구화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도리어 예술을 대하는 태도가 문제인 것은 아닐까 하고 생각하게 되기도 했죠.
‘유방랜드’라는 이름을 사용하게 된 것에는 어떤 의도가 있나요? 이번에 진행하는 작업들과는 어떤 연관이 있는지, ‘유방랜드’가 추구하는 것이 무엇인지 이야기 해주세요.
임정서: <유방랜드, 유방 속으로> 이후, 이를 꾸준히 이어가기 위해, ‘유방랜드’라는 이름으로 단체 등록을 했어요. 그리고 이를 작업을 위한 활동명으로 사용하기 시작했고요. ‘유방랜드’가 2020년에 기획한 프로젝트가 <가슴친구, 한강의 정서>입니다. 유방암 예방 캠페인이 매년 정해진 날짜에 개최되는 것처럼 저도 이 주제의 작업을 꾸준히 수행하고 싶은 욕심이 있는데, 아직 매년 할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어요. 이미 한 번 다루었던 소재인데 그것을 다시 한다면 어떻게 다르게 할 것인지 묻는 분들도 있었어요. 다만 저는 사람은 늘 무언가를 잊게 되기에, 매년 무언가를 기념하고 기억하듯이 예술로 활동을 이어가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이 아닐까 생각해요.
사실 큰 유방 풍선을 한강에 띄우고 싶기도 했어요. 유방암에 대한 경각심을 주는 것과 함께 유방에 대한 인식을 바꿔보고 싶었거든요. 아직은 여러 고정관념으로부터의 한계와 물리적으로 이러한 일들을 허가받는 것에 어려움이 있어서 이 일을 실행하지는 못했지만요. 비용도 많이 들더라고요. 만약에 언젠가 이 유방 풍선을 한강에 띄우고자 한다면, 내가 바꾸고자 하는 사회는 지금 어떤 모습인지를 질문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았어요. 지금 한국의, 서울의 사람들이 기꺼이 이것을 도와줄지 스스로에게 질문했어요. 당장은 할 수 없을지 모르지만, 누군가 이런 시도들을 계속하다보면, 한강에 유방이 떠 있다고 해서 낯 뜨거워하는 것이 아니라, 유방에 대해 이해하고 연대하는 인식의 전환이 일어나게 될지도 모르죠. 이러한 것들이 가능해지고 나면, 예술이 무언가를 변화시킨 게 아닐까요?
‘유방랜드’의 프로젝트 <가슴친구, 한강의 정서>는 관객들에게 종합선물세트 같은 보따리를 건네며, 참여의 방법들을 안내하죠. 이 보따리는 어떻게 구성되었나요?
임정서: <가슴친구, 한강의 정서>는 애도작업의 키트 형태로 발송되는 ‘가슴친구 보따리’, 한강에 직접 가서 듣기를 권유하는 오디오 감상 프로젝트 ‘한강의 정서’, 한강에서 몸과 마음의 답답함을 털어내고 몸을 움직여 심신의 건강을 찾는 행위이자, 사회적으로 터부시되는 유방을 한강에 단발성으로 펼치는 시도를 하는 퍼포먼스 ‘한강의 유방방유’로 구성되어 있어요. 이 퍼포먼스는 일종의 해프닝처럼 진행되어요. 이후에 영상과 사진으로 기록해서 전시 등을 통한 공유의 방법을 찾고자 합니다.
<유방랜드, 유방 속으로>에서는 언어로 설명하는 것을 최소화하고, 작업만으로 이야기를 전달하려고 했어요. 이 의도가 충분히 전달되지 않은 경우에는 작업의 내용을 성적인 것으로 받아들이거나, 혹은 슬픔을 희화화한다고 느끼는 이들도 있었죠. 한편으로 많은 분들이 이것은 본인의 이야기로 여기며 개인의 정서들을 비추어보고 작업의 의도에 함께 해주시기도 했지만요. 작업이 내포한 애도와 위로를 보다 더 잘 전달하기 위해서 이번 작업에서는 언어적인 요소들을 강화했어요. 말로 구성된 오디오를 듣는 퍼포먼스, 그 이야기들을 글과 일기, 코멘트 등으로 구성된 책으로 전달하는 작업, 말하고 표현하지 못해서 쌓이는 감정과 심리들을 구체화하며 들여다볼 수 있는 노트 등이 포함되어 있어요. 이러한 과정을 통해 저의 작업에 공공성이 좀 더 드러나게 된 것이 아닌가 해요. 저는 예술을 하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일상을 살아가는 평범한 대중을 만나고 싶어요. 이를 위해서 작업을 확장하는 방법도 찾아가는 중이에요. 창작자들 사이에서만 회자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관계를 맺으며 작업을 소개하고 싶어요. 텀블벅을 채널로 활용하게 된 것도 이러한 일환에서 시작한 것이었어요. 텀블벅을 통해 모집된 관객들에게 배포되는 보따리는 능동적인 참여를 돕는 도구인 셈이고요. 이번 작업에서는 작품 자체가 각자의 삶으로 들어가는 형태가 되기를 기대하고 있어요. 삶을 풍경으로 봐야하는 책과 음악을 통해 삶 안에서 할 수 있는 퍼포먼스를 관객이 직접 수행하게 되는 것이죠.
알지 못하는 누군가에게 ‘가슴친구’가 되기를 제안한 것이 참 독특했어요. 관람객이 되어 달라거나, 후원자가 되어 달라는 것이 아닌 동행의 제안처럼 여겨졌거든요. ‘가슴친구’들은 어떻게 <가슴친구, 한강의 정서> 작업에 참여할 수 있나요?
임정서: 한강에 가서 산책하며 무언가를 듣도록 안내 하거나, 본인이 원하는 시간과 공간에서 수행할 수 있는 일들을 제안하고, 이 작업 안에 들어있는 요소들이 각자의 삶과 결합하기를 바라며 설계했어요. 작업 안에 담아낸 애도의 조각들이 당장 어떤 반응을 일으키지 못하더라도, 이 사람이 이후에 살면서 어떤 사건을 마주했을 때, <가슴친구, 한강의 정서>를 기억하며 위로를 얻을 수 있는 씨앗이 되었으면 하는 거죠. 한강은 저에게 위로의 자연이에요. 이러한 풍경을 바라볼 때 느낄 수 있는 특별한 감각들과 산책을 얻으며 얻는 환기의 경험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직접 걸으며, 소리를 듣고, 풍경을 보는 일들이 관객들을 돕는 장치가 되었으면 좋겠어요.
이번에 만드는 보따리는 100개의 세트로 구성되어 있어요. 100명의 가슴친구를 모으는 목적을 두고 있거든요. 누구인지는 모르지만, 이 키트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 나까지 100명이 있다는 것을 암시하고 싶어요. 각 키트에는 숫자를 매기고, 하나씩 이름을 적어서 보낼 예정이에요. 관객들에게는 ‘상실을 홀로 감내해야하는 순간, 당신을 위로해주는 가슴친구’라고 안내하고 있어요. 각 관객들의 피드백이 궁금하고 이야기를 듣고 싶어요. 어떻게 느끼고 반응할지.
무언가에 대해 공감하고 동행하기를 제안한다는 점에서 분명한 메시지가 있는 작업이라는 것이 느껴져요. 하지만 작품의 창작과 표현은 예술의 방식을 선택했는데, <가슴친구, 한강의 정서>는 일반적인 사회 운동이나 캠페인과는 어떤 차이점이 있을까요?
임정서: ‘유방랜드’의 작업이 지닌 차별성은 유방을 완전 표면에 드러낸 것이 아닐까 해요. 전 제목부터 유방과 가슴을 숨기지 않아요. 로고에 있는 ‘유방랜드 성(Castle)’에도 엄청 대놓고 가슴이 드러나잖아요. 사회적 운동의 하나인 핑크리본 캠페인은 안전한 선에서 유방암에 대한 지지와 연대를 상징하고자 핑크리본을 사용해요. 저는 그보다는 더 직접적으로, 사회적으로 터부시되며 성적 대상화가 된 신체를 다루고 싶은 마음도 있어요. 그래서 유방, 가슴이란 단어와 이미지를 숨김없이 사용해요. 다시 말하자면, 새로운 시도가 가능하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는 것 같아요. 예술이기에 과감하게 발언할 수 있는 점이 사회 운동이나 캠페인과는 다른 점이리라 생각합니다.
작업의 제목에도 있지만, 임정서라는 개인의 이야기를 하면서 주제를 더 풀어내게 된 것 역시 이러한 이유 때문이에요. 이전의 작업이 유방이라는 성적 대상화와 유방이 터부시 되었던 것들에 대한 문제의식에 중점을 두었다면, 이번에는 감정을 무시하고 사는 데 너무 익숙해져 있는 한국 사회의 모습들을 드러내면서 비로소 스스로의 감정을 마주하게 하는 데 목적을 두고 있어요. 다만 이러한 과정에서 치유로서의 예술을 앞세우고 싶지는 않아요. 예술을 통해 치유를 받는 것은 관객의 몫인 것 같아요. 그가 필요로 하는 시기에, 작업이 그와 대화할 수 있는 접점이 생긴다면, 마법 같은 선물이 되는 것이겠고요.
‘유방랜드’의 작업은 스스로에 대한 자기배려로부터 출발하여 사회에 대한 연대의 메시지를 담고 있네요. 창작단체로서 ‘유방랜드’가 작업을 통해 추구하는 것은 예술을 위한 예술(Art of art’s sake)과 개입과 변화를 목적으로 하는 예술 사이, 어디쯤에 위치해 있을까요?
임정서: 저에게 예술은 삶으로부터 시작하는 것에요. 삶의 가치관들을 예술적 실천으로 수행하고자 한다는 것이 기본으로 깔려 있는 것이죠. 직업인으로서의 예술가의 입장을 취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내가 살아가면서 어떤 것들을 추구하고 존중 받으며 살아갈 것인지를 고민하며 작업을 확장하고 있어요. 그런 삶의 태도를 작업에 담으려는 생각을 많이 해요. 나의 문제가 혼자만의 것이 아니라는 인식을 했던 것 같아요. 어렸을 때 병으로 떠나가신 어머니의 모습을 보면서 했던 생각들이, 사랑하는 사람들을 챙기는 것으로 연결되었고, 우리의 상태와 안부를 묻는 데까지 이르게 된 거죠. 이러한 작업의 방향은 공동의 경험을 만드는 것에 집중하게 해주었어요. 나의 고민으로부터 시작하여 같이 살아가는 사람들로 포괄하여 생각을 이어가게 된 것이고요. 저의 주된 관심사는 삶과 죽음이에요. 왜 살아야하는지, 어떻게 살아야하는지 고민하는 거죠. 콜렉티브 데스티니(Collective Destiny)라는 말을 좋아하는데, 우리는 운명적인 공동체라고 생각해요. 어떻게 이 지구에서 ‘잘’ 살아갈 수 있을까. 그 ‘잘’ 산다는 것은 도대체 무엇일까 묻고, 그 방법을 찾고자 하는 저만의 태도가 작업이 된 것 같아요.
이번 작업 역시 개인의 서사가 강하게 드러나요. 누군가는 지나치게 개인의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냐고 물을 수 있겠지만, 그럴 때면, 제 이야기가 <안네의 일기>처럼 개인의 목소리로 사회의 이야기들을 공감하게 하는 역할을 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곤 해요. 개인의 이야기가 시대적인 접점을 찾고 의미를 가지게 하고 싶어요. 같은 내용이어도 누가 어떻게 말하는지에 따라 개인의 서사를 넘어설 수 있는 것 같은데, 어떤 방법이 가장 좋을지 더 탐구해야겠지요. ‘서울을 바꾸는 예술’ 사업의 워크숍에서도 당사자성에 대한 이야기를 정말 많이 나눴어요. 하지만 당사자만이 그 주제를 이야기할 수 있는 것 같은 분위기를 만들어내는 것도 지양해야 한다고 보아요. 당사자가 아니기에 볼 수 있는 시각들을 담아낼 수도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거든요. 이전에는 객관화를 추구하면서 의도적으로 뺐던 제 개인적인 이야기들을 이번에는 좀 더 담아내려 해요. 더 힘이 있는 이야기들이 될 수 있도록 말이에요. 다만 이 작업을 마주하는 누군가에게 다시 상처가 되지 않도록 하는 것이 여전히 어려운 부분이에요. 아직도 환우들이 직접 만나는 것은 좀 쉽지 않고요. 여러 층위의 고민들이 여전히 남아 있어요.
예술이 서울을 바꿀 수 있을까요?
임정서: 제 작업이 예술적 개입을 추구하는 지는 잘 모르겠어요. 하지만 어떠한 목적을 가지고 변화를 추구하는 것 같기는 해요. 영향력이 아무것도 없다면 무언가를 발언할 필요도 없다고 생각하거든요. 우리가 함께 무언가를 새로이 인지하게 되거나, 무언가를 돌아볼 수 있는 상태가 되는 것, 누군가의 손을 잡아줄 수 있는 상태를 경험하는 것, 잠깐이라도 이러한 것들을 경험해본 이들이 많아진다면 의도하고 설계했던 것들을 넘어서는 변화의 단초가 될 수 있을 것 같아요. 예술이 서울을 바꿀 수 있다기 보다는 도리어 예술적인 서울이 되는 것이 지향점이 아닐까요? 어떤 한 주체에 의해 특정 대상이 변하는 것이 아니라 각각이 만나 조우하는 것, 그것이 제가 생각하는 변화의 방향인 것 같아요.
OO의 순간을 만든다는 것
인터뷰의 글을 마무리 지을 즈음, 텀블벅을 통해 후원한 ‘가슴친구 보따리’가 도착했다. ‘가슴꽃’과 ‘마음섬’, 그리고 ‘가슴친구’의 얼굴이 정성스레 수놓아진 보자기에, ‘유방랜드’가 약속했던 애도와 연대의 이야기들이 차곡차곡 담겨있었다. 혼자가 된 시간을 채워준다는 음악을 들고, 한강의 어느 둔치에 찾아가서 잠시 머무르리라, 그리고 글로 풀어낸 기억들을 하나씩 읽어가며, ‘유방랜드’가 이야기하는 애도의 방식에 참여하리라 다짐했다. 크고 작은 소품들과 함께 전달받은 엽서의 그림들 역시 ‘가슴친구’가 되기로 마음을 먹은 이들로 하여금 ‘유방랜드’의 이야기를 느리게 곱씹으며 생각하기를 돕는다.
어쩌면 우리는 스스로의 정서적 위태함을 인식할 여유조차 가지지 못한 채 살아가고 있다. ‘유방랜드’의 <가슴친구, 한강의 정서>는 이러한 우리에게 잠시 숨고르기를 하고 자신을 살필 것을, 이내 우리의 주변을 돌아볼 것을 제안한다. 그리고 그 시간을 통해 충분히 애도하고 스스로를 위로할 여지를 만들어낸다. 나를 위한 것이, 모두를 위한 것이 될 수 있다는 창작자의 의지는 작품의 여러 장치를 통해 사회적인 메시지를 담아낸다. 나도 소중하고, 주변 사람들도 소중해서 시작했다는 이 프로젝트는 참 다정하고 사려 깊다. 이는 어쩌면 더불어 지속가능한 사회를 꿈꾸는 그의 방식일 수 있겠고, 인터뷰 중 이야기 나눴던 바와 같이 ‘공동의 운명’을 덤덤하게 마주하기 위한 준비운동일 수 있겠다.
작품은 주제의 특성 상, 누군가의 삶의 경계를 자유로이 넘나든다. 관객들은 원하는 만큼 참여하고, 원하는 만큼 곁을 내어줄 수 있다. 얼마나 참여할지는 관객의 선택에 달려있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이 작업은 우리에게 ‘어떠한 순간을 제공한다’는 것을 명백하게 밝히지 않는다. 그 ‘OO의 순간’을 스스로 탐구하며, 빈칸을 채우는 것 역시 관객들의 몫이다. 관객들이 이 작업에 어떻게 반응하며, 각자의 방식으로 필요한 순간들을 마주할지 궁금해지는 이유이다.
‘유방랜드’는 감히 서울을 바꿀 수 있는 예술을 하겠다는 거창한 포부를 내걸지 않았다. 도리어 대화는 답을 찾기보다는 흥미로운 질문들을 연이어 꺼내는 것에 더 가까웠다. 여전히 풀어나가야 할 숙제가 더 많았지만, 그 숙제를 어떻게 다뤄내는지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이미 의미가 있었다. 그의 말처럼 예술이 서울을 바꾸어내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겠지만, 여러 실험과 끈기 있는 시도들이 예술을 통해 서로를 마주하게 하고, 현재를 조우하게 하는 자리를 마련해주기를 기대한다.
출처: 2020년 서울문화재단 '서울을 바꾸는 예술' 사업 (https://blog.naver.com/sfac_social)
임현진/ 독립기획자
도시·공간에 대한 관심을 바탕으로 여러 축제, 예술단체들과 함께 일한다. 축제와 공연을 통해 공동체를 위한 예술, 공간 민주화의 관점에서 예술의 역할에 대해 고민하는 실험과 시도들을 추구한다. 최근에는 국내외의 아티스트, 프로듀서들과 글과 인터뷰로 만남을 이어가며 예술과 세상을 이야기하고, 재미난 질문들을 찾아내기에 몰두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