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글 극장 종말론 (제너럴쿤스트)
진한 만남이 있었던 전시를 이제 막 마무리했다. 작은 동네에서 짧은 기간 동안 진행했던 전시였지만, 나는 꽤나 진지했다. 잘하고 싶었고, 멋지고 싶었다. 문득 누군가에게 글로 나의 전시를 설명한다면 공간의 느낌과 시각적 구성요소들을 어떻게 전달할 수 있을지 궁금해졌다. 짧은 글로 전시의 장면들을 설명해본다.
경기도 과천의 별별극장 한 켠에 제법 근사한 전시장을 하나 마련했다.
하얀 바닥과 벽이 있는 20평 남짓의 사각형 공간에, 천장에는 크고 작은 조명기가 여럿 달려 있는 그리드가 설치되어 있었다. 이곳에 일 년 동안 열심히 찍었던 이웃 사진과 그들의 이야기 스무 편을 일정 간격을 두고 공중에 걸었다.
사진은 우리가 만났던 이웃들의 프로필 사진으로, A2 사이즈의 랑데뷰 240g 종이에 세로로 출력했고, 글은 100자 남짓의 글로 압축하여 동일한 재질 종이에 A3 사이즈로 출력했다. 랑데뷰는 종이의 지질을 말한다. 종이에는 별도의 코팅을 하지 않아 사진의 표면이 빛에 반사되지 않도록 했다. 글은 각각 남색 배경에 흰색과 노란색 글씨, 혹은 흰색 배경에 검은 글씨로 굵기를 다르게 하여 디자인했다.
사진 한 장 마다 글 한 장씩을 걸었다. 공간 내 설치되어 있는 그리드에 철제 와이어와 고리를 이용하여 설치했고, 위쪽의 모서리 두 곳에 펀치를 뚫어 매달아 두었기에 누군가 설치된 사진과 이야기 앞을 지나가면 바람에 조금씩 흔들리고는 했다. 설치된 사진과 이야기들은 저마다 높낮이를 달리해서 공간 높이의 중간 정도 위치에 걸려 있었다. 사람들은 사진과 이야기 사이를 거닐 수 있었고, 공간의 입구에서 보면 사진의 얼굴들이 서로의 어깨 사이사이로 드러나 마치 단체 사진의 한 장면을 보는 것 같은 장면을 만들었다.
공간의 오른쪽 벽 전면에 설치된 대형 거울을 커튼으로 가리지 않고 그대로 열어두었다. 정면을 향해 걸려 있는 사진들이 오른쪽의 거울에 비추어서 공간이 가로로 넓어 보이도록 했다. 천장의 그리드에는 작은 전시용 조명들이 열 개 남짓 걸려 있었다. 각 조명은 전원이 들어오는 레일에 걸려 있어서 걸려 있는 사진과 글을 밝게 비추었다. 전체적인 조명은 하얀색 빛깔이었고, 사진과 글이 설치된 부분은 다른 공간보다 조금 더 밝았다. 은은한 재즈풍의 캐롤이 스피커를 통해 흘러나온다.
일 년간 팝업 사진관으로 진행했던 프로젝트 ‘별별 사진관’을 마무리하며 그동안의 기록들을 전시하는 ‘별별 이웃 사진전’이었다. 과천에 있는 한 살 배기 창작공간 ‘별별극장’이 극장의 용도를 달리하여 사진관과 전시장이 되는 과정이 꽤나 흥미로웠다. ‘별별 사진관’에서 사진 작가 장은혜는 스무명의 마을 이웃을 만나 밀도 있는 이야기들을 수집하며, 이들을 위한 프로필 사진을 찍었다. 공연과 연습으로 사용되던 이 공간의 매무새를 만지며 사진을 한 장씩 걸 때마다 전시에 어떤 사람들이 와서 어떤 감각을 하게 될지 상상했다. 내가 의도했던 공간의 율동감을 관객들도 느낄까. 이웃들의 이야기가 두런두런 전달되는 것 같은 순간을 만들어낼 수 있을까. 사진의 수평을 여러번 체크하며 전시 준비를 마쳤다.
그리고, 전시의 오프닝 날에 첫 손님이 찾아왔다. 극장 인근의 청계초등학교에 다니는 두 명의 아이들이었다. 극장에 여러번 와보았던 이들은 조금은 달라진 분위기에 낯설었는지 공간에 설치된 사진들을 힐끗 보더니 아는 사람들이 있는지 빠르게 훑어보았다. 그리고 이내 이곳의 조도와 분위기에 조금 익숙해지자 천장에서부터 와이어로 걸려 있던 사진들이 이들의 림보 게임을 위한 설치물이 되었다. 고요하게 흘러나오는 전시장의 배경 음악이 민망해질만큼 신나게 아이들이 웃어제끼며 림보 게임을 시작했다.
말려야 할까. 조용한 분위기를 만들어달라고. 오늘 이 극장은 분위기 있는 전시장이 되기로 약속을 했다고 친절하게 설명을 해야할까. 설명을 한다면 곧잘 수긍할 것 같은 느낌이었는데 어쩐지 입이 떨어지지를 않아서 멍하니 림보게임을 구경했다. 사실 이 약속은 내가 극장과 한 것이지, 이곳을 놀이터 삼아 드나들던 이들과 상의한 것은 아니었다. 오늘은 극장을 내가 내 마음대로 사용하는 날이니, 이곳에서는 놀지 말아야한다는 규칙을 써붙인 적도 없었다. 다만 전시장의 설치물들을 보고 림보를 떠올릴 것이라는 상상을 미리 하지 못했던 것일 뿐이었다. 나풀거리는 이웃들의 사진 아래로 아이들이 무릎을 구부리고 허리를 뒤로 꺾은 채 아슬아슬 빠져나왔다. 걸어둔 사진에 옷깃이라도 스치면 아이들 웃음 소리에 극장이 쩌렁쩌렁 울렸다.
관객들이 공간의 율동감을 느끼길 바랐던 나의 의도가 떠올라서 웃음이 났다. 내가 머릿 속으로 그렸던 장면과는 달랐지만 분명 이곳의 율동감이 아이들의 웃음소리와 함께 제멋대로 나부끼고 있었다. 어쩐지 싫지 않았다. 전시를 관람하는 방식, 전시장의 약속과 규칙은 누가 정했을까. 어쩌면 이곳을 가장 많이 찾았던 이들과 대화할 수 있는 약속과 규칙이어야 하지 않을까. 잘하고 싶었고, 멋지고 싶었던 스스로가 어쩐지 머쓱했다. 나도 저 틈바구니에 끼어서 같이 림보를 하고 싶었다. 아이들은 이내 거울을 마주보고 서서, 에스파의 블랙맘바를 추기 시작했다. 핸드폰에서 나오는 음악 소리가 전시장의 배경 음악보다 간신히 조금 더 작은 수준이었다.
전시장에는 한참동안 방문객이 없었고, 아이들은 계속 춤을 췄다. 무료로 오픈되는 전시라고 해서 부모님이 보내주었을텐데, 거울도 열려 있고 사람도 없다니 이게 왠 횡재냐 싶었겠다. 전시장 바깥 쪽에서 바라보고 있는 나는 안중에도 없이 신나는 댄스 타임이 한동안 이어졌다. 그리고 그토록 설레며 바라던 율동감이 거기 있었다.
전시의 사진작가였던 장은혜는 6살, 4살의 딸들과 함께 전시장을 찾았다. 아이들은 엄마의 사진을 보며 잠시 좋아하더니 사진 사이사이로 숨으며 술래잡기를 했다. ‘이모도 같이 놀자!’ 잠시 기획자의 본분을 잊고 아이들과 뛰어 놀았다. 전시장의 온도가 훅- 뜨거워졌다.
아이들이 떠난 뒤에도 공간의 율동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오브제극을 연출하고 공연하는 이철성이 관객으로 방문하여 사진을 하나씩 차분히 바라보더니, 이내 전시에 대한 칭찬과 격려를 몇 마디 주고 받았다. 그리고 그는 공간에 조금 더 머무르더니 이내 걸린 사진들을 하나씩 손으로 건드리며 사진들이 거침 없이 좌우로 흔들리게 했다. 공간이 그와 함께 퍼포먼스를 했다. 흔들리던 사진들은 수평을 잃고 제멋대로 나부꼈고, 나는 이미 모든 것을 포기했다. 열심히 걸었는데 어떻게 하지 걱정할 새도 없었던 것은 그 모습이 사실 흥미롭고 역동적이었기 때문이었다. 공간에 대한 나의 상상은 절반은 맞고 절반은 틀렸다. 그리고 그 틀린 틈새로 관객들이 자유로이 탐험할 수 있어서 다행이었고, 행복했다. 이 공간에서 저마다의 자유를 만끽하고 있는 이들은 전시회가 만나고자 했던 관객들, 우리의 이웃들이었다.
관객들이 예술을 만나는 방법은 누가 정하는가. 창작과 발표에 능한 우리들은 때로 관객들이 어떻게 예술을 누리는지에 대해서 가벼이 생각하게 된다. 창작자가 정한 약속과 규칙에 대부분의 관객들은 수긍한다. 그것이 예술을 즐기는 방식이라고 학습한다. 하지만 이렇게 학습이 작용하지 않는 공간에서 관객들의 반응은 예술의 의도를 바꾸어내고, 도리어 그 의도의 한계를 넘어서서 가능성을 확장한다. 물론, 전시장의 약속을 금새 읽어내고 마찰 없이 전시를 관람한 관객들이 더 많았지만, 설계와 계획이 틀어질 때 마주하게 되는 이러한 장면들은 내게더 긴 잔상을 남겼다.
가끔, ‘안되요’를 말하지 않아도 되는 순간이 온다. 관객인 당신도, 기획자인 나도, 동일한 선상에서 함께 예술을 바라본다. 그리고 이내 나의 예술이 우리의 예술이 되는 순간을 마주한다. 극장의 용도 변경을 실험하는 일은 기획자로서 내가 최근 관심을 두고 있는 화두이다. 그리고 이 용도 변경의 중심에는 늘 관객이 한 몫을 한다. 우리가 원하는 예술의 공간은 어떤 모습일지 질문하며 관객이 예술을 만나는 방법에서 힌트를 얻는다. 다음의 극장은 어떤 모습이 될지 기획자로서의 상상을 또 펼쳐낸다. 그리고 이제는 조금씩 알아가고 있다. 기획자의 상상이 어쩌면 관객의 상상을 넘어서지 못한다는 것을. 함께 상상하며 미래의 극장을 만들어간다면, 어쩌면 극장은 종말을 맞이하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
✱ 제너럴쿤스트의 '극장 종말론'의 일환으로 작성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