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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이린 Mar 18. 2022

스위스에서 하는 인턴쉽

레스토랑에서 서빙했습니다

나는 거의 대부분의 여행을 혼자 해왔다. 결혼을 하고 나서야 남편이랑 다니기 시작했지, 누군가와 여행을 한 때는 손에 꼽을 정도다. 생각보다 사람들이 혼자 하는 여행을 도전으로 여기고 그것에 대한 두려움이 있는 것도 최근에서야 알게 됐다. 피지에선 어른이 없이 어딘가 혼자 다니는 일이 거의 없었고 버스를 타고 다니기엔 대중교통이 잘 연결되어있지 않았다. 그러다 스위스에 갔는데 어디든 자유롭게 다닐 수 있었고, 지금에서야 보니 유럽에서 몇 안 되는 매우 안전한 나라였다. 스위스 살면서 특별히 소매치기를 걱정해본 적도 없고 밤늦게 놀고 돌아다니면서 거리가 무서워 나가지 못하는 걱정도 거의 해본 적이 없는 것 같다. 


당시 겨우 20살이 된 나는 스위스에서 여행하기에 최적의 조건을 타고났다. 그것은 바로 나이. 스위스에서 만 25세까지는 After 7 card라고 해서 오후 7시 이후엔 스위스 전 지역 기차가 공짜였고, 또 Half Price Card는 나이에 상관없이 1년에 일정 금액을 지불하면 모든 기차를 반값에 탈 수 있었다. 그 당시 몇백 불 하긴 했는데 기차값 자체가 저렴하지 않아서 일단 기차를 타고 열심히 몇 번 다니기만 해도 충분히 이득일 볼 수 있는 카드였고, After 7은 말할 것도 없었다. 특히 한국인 중에선 대다수의 언니 오빠들이 이미 만 25세를 넘겼기 때문에 다들 부러워했다. 그래서 스위스의 어떤 도시를 가서 항상 오후 7시가 지난 기차를 타거나 6시 50 몇 분의 기차를 타면, 티켓 확인하는 아저씨가 7시 후에만 와도 공짜였다. 




학교의 프로그램은 호텔 학교답게 6개월은 학교에서 이론 수업을 받으며 공부하고, 나머지 6개월은 인턴쉽을 하고 마지막에 보고서를 써서 제출하면 1년이 마무리가 되는 형식이었다. 첫 1년은 학교에서 인턴쉽을 구해주거나 본인이 구할 수 있는데 첫 1년은 대부분이 학교에서 구해준 곳을 가서 일했던 것 같다. 다만 스위스는 독일어나 프랑스어는 무조건 해야 인턴이든 뭐든 하는 데다가 그 당시 아시안으로서 일을 구하는 건 더 힘들어서 독어나 불어를 하지 못해도 큰 도시에 있는 체인호텔 리셉션에서 일을 구한 백인 학생은 있었지만 아시안은 보지 못했다. 대신 아시안은 스위스라면 일반 레스토랑에서 많이 일을 하게 됐다. 그것이 싫고 미리 알아본 좀 똑똑한 사람들은 한국 호텔에 컨택해 이런저런 부서를 인턴쉽으로 하는 기회를 많이 얻어냈다. 


난 스위스에 더 있고 싶어서 레스토랑이라도 상관없었다. 그래서 싱가포르 & 태국 레스토랑에 일하게 됐는데 제네바에서 느린 기차로 약 40분 정도 떨어진, 지금 오스트리아에서 사는 마을보다도 더 작은!! 마을이었다. 당시 그 동네엔 은행도 없어서 이 ‘after 7’ 카드를 적극 이용하는 때였다. 왜냐면 레스토랑에서 월급을 무려 현금으로 지불했는데 그렇다고 현금다발을 숙소에 보관할 순 없으니 쉬는 날엔 오후 7시 이후 기차를 타고 가까운 제네바에 가서 입금을 하곤 했다. 제네바에 도착하고 20분 후엔 다시 내가 사는 곳으로 가는 기차가 출발을 했다. 그래서 역에서 빠르게 입금을 하고 제네바 역 앞에 있던 스타벅스로 가 벤티 캐러멜 마끼아또를 테이크아웃으로 주문해 바로 기차를 타고 다시 돌아가는 것이 한 달에 한번 내가 하던 사치였다. 마지막 월급을 받고 그걸 입금하러 갔던 날엔, 항상 보던 스타벅스 직원에게 오늘이 내가 오는 마지막 날이 될 것 같다,라고 하니 내가 매번 주문하던 벤티 사이즈 캐러멜 마끼아또를 서비스로 주었다. 


생각해보면 룸메도 엄청 깔끔한 스타일은 아니라서 둘이 잘 지낼 수 있었던 것 같다 ㅋㅋ

제네바 근처의 작은 마을에 살다 보니 제네바에 어렵지 않게 자주 놀러 갈 수 있었다. 당시 제네바엔 한국음식점에 갈 수 있는 거의 유일한 곳이었고, 같은 학년 오빠도 제네바에서 인턴쉽을 하고 있었다. 그 당시 다들 레스토랑에서 일하면서 고생했던 기억이 난다. 생각해보면, 난 그때 어려서 아무 생각 없이 일하라는 데로 했던 것 같은데, 이미 한국에서 대학 졸업하고 오거나 이미 사회생활을 좀 하다 온 언니 오빠들은 어떤 생각을 했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나라면 현타가 좀 크게 왔을 것 같기도 하다. 


그래도 다들 우리는 어떻게든 살아남았다. 그렇게 6개월을 일하고 마지막엔 서둘러 인턴쉽 리포트를 써서냈다. 어떻게 말하면 그냥 레스토랑에서 서빙한건데 그 당시 무슨 생각으로 리포트를 썼는지 모르겠다. 지금 쓰라면 과연 쓸 수 있을까. 


일주일에 한번씩은 꼭 오던 미국/스위스 국제커플 가족손님들이 있었다. 그분들은 내가 인턴쉽을 그만두기 전에 나보다 먼저 그 지역을 떠나게 되었다. 국제 커플이라 미국과 스위스를 때마다 번갈아가며 살던 분들이었는데 가기전에 너무 고마웠다며 나에게 특별히 따로 팁을 주셨다. 프랑스어도 못하는데 프랑스어를 겨우겨우 알아듣고 손님들과 안되는 대화 해가면서 힘들게 하던 일에, 그 손님들은 영어를 유창하게 하는 오아시스 같은 분들이었다. 당시 그 레스토랑은 (그리고 대부분의 레스토랑이) 팁을 받으면 모아서 한달에 한번 나누는 식으로 돈을 받았는데, 사장님도 그 팁은 너한테 준거니 너가 받아도 된다고 해주셨다. 그 분들은 지금 잘 살고 있을까? 코로나인데 하와이에 있을지, 스위스에 있을지 가족들은 다 건강한지 궁금하다. 


당시 팁으로 받은 100프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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