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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이린 Mar 29. 2022

잃어버린 2년 Part. I

그중에서도 내가 시작한 것들

요즘은 그렇지도 않다고 하지만, 갑상선은 유전적으로 생기는 이유가 가장 크다고 한다. 그런 의미에서 나도 갑상선에 걸렸을 때 당시 22? 23살쯤 어린 나이였음에도 불구하고 의사 선생님은 3년 내로 임신할 계획이 있냐고 물어봤다. 연애의 ㅇ자도 모르는 나에게 임신이라니 황당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여자이니 의사로서 묻는 것이 당연한 거였구나 싶다. 


졸업하기 전 여기저기 일자리를 알아본 결과 말레이시아 랑카위에 있는 한 리조트에 매니지먼트 트레이니로 일하기로 했다. ‘난 졸업 전에 해외취업을 하는구나’하는 엄청 단순한 마음에 기뻐했다. 왜냐면 서류 지원부터 전화면접을 통과하기까지 처음부터 나 스스로 알아봐서 했던 것의 결과였기 때문인 것 같다. 하지만 그 조차도 의사 선생님의 만류에 그만두게 되었다. 말레이시아라는 나라 자체가 선진국도 아니고 랑카위는 휴양지 섬인데 그런 곳에서 의료서비스를 제대로 받을 수 있는 거냐는 질문부터, 지금 상태로 가면 어차피 피곤해서 일도 제대로 못할 것이라고 만류하셨다. 


결국 비자를 위한 서류를 준비하던 중 이메일을 보내서 일을 못하게 됐다고 통보하게 되었다. 그 당시 호텔에서는 6개월 후에라도 오지 않겠냐고 했지만 상심이 커진 데다 의사 선생님은 최소 2년은 아무것도 하지 말라는 소릴해서 결국은 가는 것을 포기하게 되었다. 


당시 내가 먹던 약은 아침엔 심장박동수를 늦춰주는 하트 모양의 알약과 갑상선 관련 약을 두 알씩 매일 3번 먹어야 했다. 감기약도 제대로 챙겨 먹지 않는 내가 이렇게나 많은 알약을 매일매일 챙겨 먹어야 된다니. 대형병원에 매번 갈 때마다 깨지는 돈도 만만치 않았고 약값은 약값대로 나갔다. 처음엔 거의 일주일에 한 번씩은 피검사를 했어야 됐던 걸로 기억이 난다. 그래서 지금도 피검사는 도가 텄다.




그렇게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상태에서 내가 시작한 것은 첫 번째 와우였다. 남동생이 있다 보니 중학생 때부터 가끔 스타크래프트를 한다던가, 각종 게임들을 조금씩은 다 해봤다. 메이플스토리, 바람의 나라, 카트라이더, 롤 등등… 그저 재미로 한지라 뭐 대단하게 한 게임들은 없는데, 아무것도 못하는 나의 상태와 와우는 찰떡궁합이 되어버렸다. 그냥 너무 재밌었다. 지금은 안 한 지 꽤 됐지만 또 하고 싶다. 인터넷이 느린 해외에 산다는 것에 고마워해야 되나 싶을 정도이다. 할 말은 엄청 많지만 짧게 말하자면 ‘현실 로그아웃’ 상태였다. 이미 오래진 사라져 버린 내 고향 같은 에이그윈 서버. 그런데 그때 기억이 너무 좋아서 절대 후회하지 않는다. 호드를 위하여!!!


두 번째는 일본어였다. 스위스에서 마지막 학년에 학업 스트레스를 엄청 받을 때 나에게 큰 위로를 준건 일본 드라마와 애니였다. 난 애니보단 드라마를 훨씬 많이 봤는데 노다메 칸타빌레를 보다가 보다가 결국은 눈으로 보진 않아도 그냥 항상 틀어놓는 생활을 지속하다 보니 자막을 굳이 보지 않더라도 무슨 말인지 알아듣는 상황까지 와버렸다. 그런데 체계적으로 배운 건 아니다 보니 배우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당장 학원을 마땅히 다닐 곳이 가까운 곳엔 없고, 그럴 건강이 아직은 아니라, 독학을 하기로 했다. 다들 일본어가 쉽다고 해서 좀 얕잡아본 것이 처음에 나를 힘들게 했다. 그때 내가 공부한 방법은 EBS 인강이었다. 잘은 모르겠지만 그 당시 인강은 나에겐 EBS가 전부였다. EBS에 찾아보니 ‘스쿠스쿠 일본어’ 강의가 있어서 서점 가서 초보부터 고급까지? 있는 책 3권을 사고 히라가나부터 시작해서 공부했다. 가타카나는 도저히 외워지지도 않아서 ‘어차피 히라가나가 기본인데 뭘! 가타카나는 하면서 배워지겠지!’라는 마음으로 과감히 반쯤 포기하고 히라가나만 외워서 공부했다. 


책 3권을 다 떼고 나니 회화를 하고 싶어서 학원행을 선택했다. 종로에 있는 일본어 회화반을 다녔는데 그때 선생님도 너무 좋고 그냥 다 좋아서 정말 피곤했음에도 열심히 다니던 기억이 난다. 결국 이 선택은 나를 차후에 일본행으로 끌어냈다. 


마지막으로 배운 것은 수영이다. 갑상선 진단 초기에 배운 건 당연히 아니었고, 조금 지나서 나 스스로 조금 괜찮다고 느낄 때 배우기로 했다. 뭔가 운동을 하고 싶긴 한데 뛰거나 하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무리고, 뛰는 건 배워야 한다는 생각이 안 들지만 수영은 배워야 할 수 있는 운동이니, 수영을 해보자 싶었다. 사실 수영도 엄청 힘든 운동인데 내가 수영 자체를 못해서 아마 가능하지 않았나 싶다. 수영을 하면서 심장이 갑자기 빠르게 뛸 때가 자주 있어서 중간 중간 엄청 쉬면서 해야 했다. 심지어 개인 레슨으로 했는데 당시 30만원을 지불했던 것 같다. 그런데 정말 너무 못해서 자유형을 가르치다 수영쌤이 포기하고 배영부터 가르쳤던 기억이 난다. 배영을 하면서 한 번 떠보니 자유형도 조금 가능하게 되었고 개구리 수영까지 갔다가 그것까진 제대로 하지 못하고 한 달이 지나갔던 기억이 난다.


개인 레슨 하면 접영까진 못할 수 있어도 그 외엔 충분히 쉽게 배울 수 있다고 그랬었는데 난 몸치라 그러지 못했다. 수영이 박자감이 엄청 중요한 스포츠더라. 그 이후로도 나는 수영을 할 수 있었나?라고 하면 아니다. 우리 가족은 다 수영을 엄청 잘하는데 나 혼자만 정말 못한다. 수영에 관한 이야기는 다음에도 또 풀어볼 기회가 있을 것 같다.



나에겐 아팠던 기간이 ‘잃어버린 2년’의 느낌인데 이렇게 기억을 되짚어 생각해보니, 그래도 아예 잃어버리진 않았구나 싶다. 나 나름대로 뭐라도 했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오죽했으면 웬만한 사진은 다 저장이 돼있는 구글 포토에 사진이 거의 남아있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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