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이인
하나
숨길 것이 없으므로 드러낼 것도 없다
지구라는 푸른곰팡이에 생을 내려놓고 허공에 방주 같은 집을 지었다
햇볕과 물을 먹고 책과 음악에 기대어 살았다
가끔 술을 마셨지만 침은 뱉지 않았다
하루살이의 길고 긴 하루 같은 세월이 흐르면서 책은 먼지가 쌓였고 빵은 부스러기가 되었다
강물보다 긴 시간이 흐르는 동안 푸른곰팡이는 집을 갉아 먹고 지구와 달은 조금 멀어졌다
운명처럼 바람으로 환생하는 것들과 더불어 늙음이 찾아왔다.
둘
삼나무 침대에 베개처럼 누워 죽음이란 여행을 상상한다.
새로 산 외투와 잘 닦은 구두(어쩌면 운동화가 필요할 지도 모른다)
튼튼한 가방과 후불제 교통카드 (선불은 아니겠지) 핸드폰은 먹통이겠지
가출하는 기분일까? 출가하는 기분일까?
(가출의 기억은 아득하고, 마음뿐이었던 출가는 막막하다)
셋
죽음은 불청객의 불편한 방문 같은 것
육신은 동굴을 벗어난 영혼이 마지막으로
몸을 돌아보는 그 짧은 순간
생의 모든 기억이 파노라마처럼 지나간다는군
빛의 터널을 통과하고
빛의 존재를 만나 대화를 나누고
강을 건너거나 사막을 건넌다는데
그곳에 가면 아버지를 만날 수 있을까?
당신보다 늙은 아들을 몰라보면 어떡하지?
넷
초원에는 바오바브나무에 걸린 붉은 석양을 보며 홀로 죽음을 기다리는 늙은 사자와 사자의 마지막 시간을 응시하는 하이에나의 기다림이 있다.
그렇게 두 개의 기다림을 통해 생명은 윤회를 계속하고 사자와 하이에나의 시간은 하나가 된다.
다섯
떡갈나무와 호랑나비 고등어와 바퀴벌레 악어와 호모 사피엔스의 계보를 연어처럼 거슬러 올라가면 조상이 같다고 한다. 이 불편한 생물학적 진실의 정점에 태초의 신이 있다. 배부른 오후와 나른한 권태의 지복점, 그 완전한 균형이 주는 만족감에 취한 신은 비눗방울 만들기 놀이를 하다 장난삼아 우주를 만들었다고 한다.
몹시도 심심했거나 권태로웠을 거라고 짐작되는 그 신은 스스로 창조된 신일까?
그 신보다 더 심심하고 지겨웠던 신이 우주를 만든 것은 아닐까?
바람을 타고 하늘을 날아가던 민들레 홀씨가 철조망을 통과하자마자 우주선으로 변신하고 바위에 부딪힌 파도가 노란 잠수함이 되는 것처럼 태양계의 네 번째 행성은 우연히 신의 능력을 갖게 된 지극히 소시민적인 평범한 개미가 만들었다고 한다. 인간의 탐욕과 이기에 환멸을 느껴 지구를 떠나 안드로메다의 어느 평화로운 별에 은거한 어느 현자가 쓴 “지구의 기원”이란 책에는 그렇게 적혀 있다고 한다.
손톱 밑에 박힌 가시처럼 참 불편한 진실이다.
여섯
세상에는
눈으로 볼 수 없는 것들이 있어
기도의 시간에 우리는 눈을 감는다
세상에는
손으로 잡을 수 없는 것들이 있어
영혼은 천국의 문을 두드린다
세상에는
다가갈 수 없는 것들이 있어
기다림은 미학이 되거나 가끔 종교가 된다
일곱
어느 가을날
햇볕과 바람이 좋은 베란다에
당신은 개와 함께
개처럼 쪼그려 앉아
커피를 마시며 중얼거린다
담배와 술을 끊어야 하는데......
당신을 닮은
당신의 개가 멍멍 짖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