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이인
사표
사표를 던질 무렵 나는 조직의 일원이 아닌 나로서 살겠다는 생각을 했다. 어떤 시인의 고백처럼 나는 나에게로 돌아가길 원했다가 정확한 내 마음이었을 것이다.
그때 나는 빗나간 내 마지막 사랑에 지쳐있었고, 원인 모를 불멸의 병으로 고통스러웠다. 그렇게 조직을 정리하고 나는 낙향했다.
그리고 시간과 공간이 변해 나는 무상을 알게 되었고, 나를 비롯한 우주 만물이 실체가 없는 껍데기라는 믿음을 갖게 되면서 명리학에 대해 가졌던 소박한 믿음을 조금씩 버리게 되었다.
나는 혼신의 힘을 다해 술과 여자에 대한 욕망에서 겨우 가까스로 아주 조금 도망치는 법을 알았는데 아직도 나는 가끔 헛것이 만드는 환에 내 감각이 흔들린다.
백수가 되고 나서 5년에서 10년을 기약하고 명리학 공부를 하면 나는 세상 돌아가는 이치를 알 자신이 있었고 타인의 인생사 길흉화복에 개입할 자신이 있었는데 지나고 나니 개꿈이었다.
나는 이제 더 이상 타인의 운명이나 나의 운명 따위에 관심을 두지 않기로 작심했다.
공부를 해보고 삶을 살아보니 명리학 공부보다 불법 공부가 훨씬 더 위대하고 내 인생에서 행복한 사건이라는 것을 알았다.
백수
코로나는 백수인 나의 일상에 파문을 일으켰는데 나는 예전보다 더 책상 앞에 앉아 텅 빈 모니터를 바라보는 시간이 길어졌다.
오랜만에 볕이 들었다. 해가 사라질리는 없겠지만 구름은 오고 가는 나그네여서 해를 가리기도 하고 열어주기도 한다.
구름과 햇볕은 반대 방향으로 작용하는 것이어서 세상은 빛과 그림자가 번갈아 오가고 때론 공존하기도 한다.
존재는 대부분의 경우 有(살고자 하는 욕망, 존재하고자 하는 욕망)를 따라가지만, 간혹 無(바람처럼 사라지고 싶은 욕망, 소멸하고자 하는 욕망, 존재를 지속하고 싶지 않은 욕망)를 지향하는데 나는 자주 나란 존재가 바람 속으로 사라지듯 햇볕 속으로 스며들 듯 어떤 흔적도 남김없이 소멸되는 상상을 하곤 하는데, 대체로 찌질한 삼류인생이 주로 하는 몽상이다.
도대체 이 공간 어디로 시간이 가고 온다는 말인가?
공간의 증거는 수없이 존재하지만 시간의 증거는 일점도 찾을 수 없다.
시간 자체는 손으로 만질 수 없고 눈으로 볼 수 없는데 눈은 대상을 보지만 정작 눈은 눈 자체를 보지 못한다. 그것 참 괴이한 일이다.
형체는 없는데 분명 존재하니 이건 진실로 색이 아닌 공일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렇게 진실이라고 믿는 나의 생각 말고 다른 현실은 없다는 것이 나의 진실이다. 나의 생각이 나의 현실이고 나의 우주다.
건조대에 빨래가 바람과 햇볕에 몸을 맡기고 있다. 성장을 위해 혼신의 힘으로 수분을 빨아들였던 벼가 가을날 바람과 햇볕에 수분을 몸 밖으로 내어놓듯 빨래도 그럴 것이다. 바람과 햇볕의 힘으로 말린 빨래에서는 마른 볏짚 냄새가 난다. 내가 좋아하는 냄새다. 지금 건조대에는 바람과 햇볕이 빨래를 관통한다.
볏짚 냄새가 묻어나는 문장이다. 내가 좋아하는 말의 풍경이다.
지상에서 천국을 발견하지 못한 자는 죽어서도 천국을 찾지 못한다고 말한 소설가의 이름은 아마 에밀리 디킨슨일 것이다. 정확하지 않은 기억의 기억이다.
그렇게 잘 마른빨래에는 바람과 햇볕의 시간이 녹아있는데 그 위에 그것들을 바라보는 나의 시간이 겹쳐진다.
나는 이런 시간의 아름다움이 좋아 아무 생각 없이 시간을 잊은 것처럼 마음을 방기 한다. 고요함이거나 마음의 파도가 일지 않는 시간이다. 나는 이런 시간이 좋다. 가끔 이런 생각을 한다. 시간과 공간도 선악이 있을까?
만약 빛이 세상 만물을 가려서 빛을 내린다면 이 우주는 차별과 분별로 어지러울 것이다. 만약 어둠이 세상 만물을 골라 깊은 안식을 내려준다면 그건 이미 어둠이 아닐 것이다.
오랜만에 볕이 드는 베란다를 보고 있자니 흉중에 머물렀던 습기들이 조금씩 말라가는 듯하다. 이런 날 빨래를 하고 건조대에 빨래를 말리면 좋다.
햇볕과 바람에 빨래가 하늘거리는 풍경은 내가 이생에서 좋아하는 그림이다.
팔을 늘어뜨리고 바람이 부는 데로 흔들리는 옷을 보면 소유의 근본이 집착이 바람 같다는 생각이 일어난다. 이런 생각은 저절로 일어나서 아마 본성이라고 불러도 틀리지 않을 것이다.
천수경 일천사백자. 법성게 이백열자. 반야심경 이백육십자는 내가 통으로 외우는 경전이다. 음절 하나도 틀리지 않고 분명하게 암송한다. 이것 말고 다른 경전들도 띄엄띄엄 알아먹는다. 다리가 아닌 징검다리처럼 연속적이지 않다.
비가 내렸다. 마연산 정상 정자에 앉아 나는 눈을 감고 스님의 천수경 독송을 따라 목탁을 두드린다. 나는 초성이 별로인지라 염불은 시원찮다. 염불 잘하는 스님들은 꺾기를 잘하는데 그것 참 흉내내기가 어렵다. 트로트 가수보다 더 감정이입이 뛰어나다.
어떤 스님인지 법명은 모르지만 자주 듣는 예불 천수경을 독송하는 스님이 있다. 신묘장구대다라니 중에 ‘모다니야 매다리야 니라간타’라는 부분을 독송할 때 나는 깊은 슬픔이나 연민의 감정이 솟구쳐 오른다.
절제된 음성 분명한 발음이지만 나는 이 부분에서 진리가 느낌의 형태로 전이되는 과정을 경험한다. 그저 나의 감각이 그렇다는 말이다.
오후 두 시, 나는 베란다에 앉아 햇볕을 쬐며 식은 커피를 마신다. 어디에도 여름의 흔적은 없고 계절은 가을이다.
그리하여 오직 나의 삶은 무상이고 이 아름다운 가을날 나는 아무리 나란 존재를 찾아봐도 보이지 않으니 귀신이 곡할 노릇인데 내가 못 찾는 것을 귀신이 어찌 찾겠으며 귀신이나 나나 바닷속에 던져진 조약돌 같은 존재임에는 틀림이 없으니 귀신과 나는 무아 혹은 근원적인 어떤 공통분모를 공유한 존재들일 것이고 귀신의 우주와 나의 우주는 다르지 않을 것이다.
이 아름다운 가을날,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나는 지금도 사우나에서 옷을 다 벗고 알몸으로 탕에 있으면 아직 덜 벗은 뭔가가 있는 것 같은 느낌을 받곤 한다. 나는 분명 고향에 돌아왔지만 여전히 타향을 헤매는 기분이 들곤 한다.
까닭 모르게 나는 내가 아닌 듯하고 세상은 브라만 신의 꿈속에 등장하는 꿈같다. 내 꿈속에 내가 나타나는 것이 아니고 브라만 신의 꿈에 등장하는 내가 현실이라니 참 아리송한데 내 정신에 문제가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마연산
가을비가 내리는 월요일 오후에 나는 마연산에 들어가지 못하고 안절부절못하는 강아지처럼 하늘만 바라만 본다.
갈색 구름과 검은 구름이 섞인 하늘은 비를 뿌리고 있는데 해가 지기까지 좀처럼 하늘은 말간 얼굴을 드러내지 않을 듯하다. 비를 맞고 산에 들어갈 절실함이 내게는 없으므로 나는 소파에 앉아 비가 그치기만을 기다리며 펼친 소설의 문장은 자꾸 시야를 달아난다.
이제 두 시간이 지나면 일몰이 시작될 것이다. 빌어먹을 하루다. 매일 마연산에 가는 일이 나의 일이다. 나의 습관이다. 이곳에 부는 바람은 저곳에서는 일지 않는 모양이다.
나는 산이 좋다. 신에 들어오면 마음이 편하다.
내가 마연산 정자에 홀로 앉아 목탁을 두드리는 까닭은 바람과 햇볕에 빨래가 마르는 시간과 다르지 않다. 온몸의 물기를 빨래가 바람과 햇볕에게 내어주듯 목탁을 두드리며 나는 내 몸속의 속기가 배출되는 것을 감지한다. 내가 지상에서 찾은 천국의 풍경이자 천국으로 들어가는 매뉴얼이다.
지난여름은 더웠고 올겨울은 추울 것이다.
이 짧은 가을날이 아름다운 이유는 가을이기 때문이리라. 산행을 하기에 좋고 책을 읽기에 좋고 명상을 하기에도 좋은 날들이다.
모두 내가 좋아하는 것들이다.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는 날들이지만 머지않아 사라질 것들이다.
요즘 새로 생긴 취미가 있다. 구름보기다. 하늘을 볼 수 있는 장소를 만나면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본다.
구름은 허공 중에 존재하고 천변만화한다. 태신이 화신이 아닐까 싶다. 어느 날 어느 순간 짜잔 나타났다 사라지는 지옥 중생 혹은 천상계 천신처럼 구름은 생과 사의 과정이 없다.
그곳에도 노와 병은 있을 것이다. 몸을 가졌으니 욕계의 중생일 것이고 윤회의 대상일 것이므로 눈을 감고 구름을 본다. 다시 눈을 뜬다.
구름 뭉치 오른쪽이 조금 변한 것 같다. 이렇듯 세상에 고정된 실체는 없다. 구름보기 혹은 구름 감상하기는 새로 만난 나의 취미이고 마음 들여다 보기이다. 나는 오늘도 산에 올라 구름을 본다. 즐겁다.
늙은 구름이 걸터앉은 늙은 소나무 가지에 주변은 적요하고 바람은 미동조차 없는 모양새가 아마 늙은 구름은 오늘 밤을 저 늙은 소나무에 깃들 작심인 듯하다.
내가 마연산에 들어와 멧돼지나 까마귀처럼 인적 드문 산길을 바장거리는 동안 어느새 해는 지고 산은 산그늘에 숨어 요기스럽다.
나는 늙은 구름이 아니어서 마연산에서 노숙을 할 수는 없는 노릇인지라 주섬주섬 보따리를 챙겨 하산 준비를 한다. 배낭에는 목탁 염주 책 사과 과자 칼 등등이 들어있는데 이것들은 나의 심심파적이다. 나는 늙은 구름과 늙은 소나무에게 잠시 눈길을 던지고 곧 거두어 왔던 길을 내려간다.
마연산 마연교 아래에는 나의 전기자전거가 당나귀처럼 한가롭게 풀을 씹으며 주인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이제 전기자전거는 나의 일상이 되었다. 나는 파트라슈라고 부른다. 나는 거의 매일 마연산에 들어가는데 집에서 등산로 입국까지는 파트라슈를 타고 간다.
늙은 나는 근육의 힘이 아닌 전기의 힘으로 바퀴를 굴리는데 장강의 뒷물결이 앞물결을 밀어내는 것처럼 전기의 힘은 끊어지지 않고 계속적으로 이어져 나는 오르막이든 먼 길이든 문제가 되지 않는다. 오십 킬로미터 안은 나의 영역이어서 하루 정도는 넉넉한 물리적인 거리다. 조만간 나는 한 번 충전으로 백 킬로 주행이 가능한 또 다른 전기 자전거를 구입할 계획이다. 그러면 나는 천리마를 두 필 소유하는 천하 최강자의 반열에 들게 될 것이다. 이런 상상은 즐겁다.
외롭다거나 쓸쓸한 감정에 나는 개처럼 끌려 다니지는 않을 것이다. 그런 부정적인 감정 따위에 마음을 내줄 만큼 나는 어리지 않다. 다만 늙고 병들어 죽어야 하는 이 삶의 구조는 비극적이고 비통한 것이어서 왜 이런 것인지 나는 받아들이기 곤란하다.
나의 호불호에 상관없이 이 삶의 구조는 무정하고 비정하다. 그 무정함에 가끔 삶은 서러운 것이지만 더러는 홀가분하기도 하다. 장마가 오기 전에 나는 매일 두 번씩 마연산에 들어간다.
누구에게도 먼저 연락을 하지 않는다. 엄마만 있으면 충분하고 마연산이 있으면 더는 바라지 않는다. 명징한 정신의 힘으로 일상을 살아간다.
나는 할 수 있다. 눈을 감고 자판을 두드린다. 나는 할 수 있다
잃어버린 우산
포항에서 선물 받은 우산을 영종도에서 영천을 거쳐 5년을 함께 있었으니 짧지 않은 시간이다.
인천공항에서 늦은 퇴근을 하던 여름 어느 날 나는 202번 버스에 우산을 놔둔 채 하늘신도시에서 내렸다. 그날은 술을 마셨고 다음 날은 출근을 하지 않는 날이었다. 이틀 뒤 저녁 무렵 직장인들이 그렇듯이 퇴근길의 나는 맥 빠진 모습이었고 피곤에 찌든 채로 정리되지 못한 상념들이 머릿속을 채우고 있었다.
202번 버스 안 운전석 옆 자리에 앉은 나는 아무런 기대감 없이 운전기사에게 물었다. 혹시 긴 우산 못 보셨냐고? 운전기사는 이틀 전에 운행 끝내고 주운 우산이 하나 있다고 했다. 보니 잃어버린 내 우산이었다. 갈색 체크무늬 닥스 우산이었다. 내가 몹시 아끼고 애지중지하던 나의 닥스 우산이었다. 그때의 그 기쁨은 말로 표현하기 힘든 것이었다.
지금은 백수지만 한때 나도 직장이 있었다. 포항 시절, 포항지방노동청에서 외국인인권위원회가 출범했었다. 형식적인 위원회였고 점심을 겸하는 자리였다. 그날 위촉장과 함께 받은 선물이 닥스 갈색 체크무늬 우산이었다. 생애 처음 빗살무늬토기를 가져 본 원시인의 감격처럼 나는 닥스우산을 사랑했다. 비싼 놈이라 그런지 때깔이 좋았다. 약간 고전적인 느낌이 형식주의자인 나의 취향과 맞아떨어졌다.
나는 지금 백수 3년 차다. 아니 정확하게 나는 백수 4년 차다. 백수에게도 연차가 있고 경력이 존재한다.
세상 모든 일이 그렇듯이 오래 묵을수록 어딘가 모르게 삶의 깊이가 묻어난다. 내가 백수를 해보니 한 3년 정도는 아무 짓도 안 하고 먹고 놀아야 삶의 본질을 통관할 수 있는 힘이 생긴다. 그렇다는 말이다. 그러니 안 해 봤으면 말을 하지 말아라. 백수는 아무나 할 수 있는 직업이 아니다.
어쨌거나 잃어버린 우산 이야기가 슬쩍 딴 데로 샌 듯한 문맥이지만 어쩔 수 없이 세상 모든 사건은 서로 연관이 되어 있지 않은가. 그래서 결국에는 무아이고 마침내는 연기로 귀결되지 않는가. 뭐 그렇다는 말이다. 어쨌거나 잃어버린 그 닥스 우산은 영종도 거쳐 영천에서 자리를 잡았다. 현관 신발장 위에 얌전한 고양이처럼 있다.
그날도 술을 마셨으니 모든 일이 그러하듯 나는 할 말이 없다. 오로지 술이 원수다. 감각이 대상을 만나 경계를 이룬다는데 그날 나는 육식의 몰락에 정신줄을 놓고 그만 우산을 잃어버린 것이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뭐 이런 일이 한두 번도 아니고 내 인생 돌이켜보면 늘 끊임없이 반복됐던 일이다. 지금 와서 바라는 것은 오직 하나 소박하고 단순하다. 바라건대 그 우산, 그 갈색 체크 무의 닥스 우산, 누군가 소중하게 비를 피할 수 있는 도구가 되길 소망한다.
잃어버린 우산이 닥스여서 아까운 게 아니고 세상 모든 인연이 그러하듯 허무하게 끝나버린 인연이 나는 허무할 뿐이다.
하지만 세상 모든 인연은 시작과 끝이 있다.
뭐 그렇다는 말이다.
내가 죽는 날
내가 나의 죽음에 대해 상상하고 있을 때 우연히 거실 벤자민 나무 잎사귀가 흔들리는 모습이 보였다.
베란다 창문을 열어 놓았다. 정오를 막 지난여름 하늘은 구름 없이 맑고 푸르다. 아마 그 사이로 바람이 들어왔을 것이다.
조금의 틈이 존재한다면 세상 어느 곳이든 막히지만 않았다면 바람이 불지 못할 공간은 없다. 바람만큼 신비로운 존재가 있을까? 눈에 보이지 않고 귀에 들리지 않고 손으로 만질 수도 없다. 완벽하게 우리의 감각 너머 존재한다.
간혹 바람소리는 귀에 들리지 않느냐고 항변하는 이들이 있다. 나는 동의하지 않는다. 정확하게 말하면 바람이 사물에 부딪혀서 나는 소리지 바람 그 자태의 소리는 아니다. 바람은 소리가 없다. 나의 믿음이다. 그러니 바람이 소리가 없다는 명제는 내게 현실이다. 믿기 때문이다.
히키코모리 같은 삶을 살고 있다.
자주 나의 죽음에 대해 상상을 한다. 죽을 때의 고통이나 마지막 감정, 마지막으로 듣고 싶은 음악이나 유언, 살아온 날의 후회 뭐 이런 것들을 나는 상상하고 문장으로 적는다.
이제 쉰이 갓 지난 호모 사피엔스가 생각하기에는 죽음이란 실체가 멀리 있는 것도 같다. 하지만 할 일이 없지 않은가? 바흐의 음악을 꿈꾸는 듯(식물들은 잠을 잘 때 눕지 않는다)한 자세로 듣고 있는 나의 반려 식물들과 함께 살고 있는 나의 거실에 바람이 불고 있고 나는 아카시아 원
목 책상에 앉아 죽음을 생각하지 않는다면 대체 나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돌이켜 생각하면 꿈이 길었다. 길었던 꿈만큼 헛된 욕망도 길었으니 이제 후회를 하는 것이다. 나는 인생을 잘못 살았다.
언젠가 나는 죽을 것이다. 죽음 앞에서 나는 삶을 생각하고 고민한다. 더운 여름날 나는 엄마에게 화를 내고 후회를 한다. 나이가 쉰이 지났건만 후회는 끝이 없다. 왜 나는 실수를 하고 후회를 하는 걸까? 어려서는 어리기 때문에 실수를 하고 나이 들어서는 좀 괜찮아지겠지 하면서도 실수를 한다.
물론 실수의 가능성은 현저히 줄어든다. 그러나 실수는 계속된다.
그녀
꿈에 그녀가 나타났다. 오래전에 헤어진 그녀는 그때 그 모습으로 등장했고 우리는 커피를 마시며 가벼운 말을 주고받고 헤어졌다.
눈을 뜨니 새벽 네시였다. 나는 현실보다 생생한 이 꿈은 혹 현실이 아닐까 의심하며 지금 이곳을 둘러본다. 현실감각이 혼란스럽게 파도친다.
빗물이 흘러내리는 유리창에 이마를 대고 나는 영점이 맞지 않는 과녁을 응시하는 멍청한 사수처럼 시계가 불분명한 거리의 저쪽 혹은 시선의 저쪽을 바라본다.
모든 것을 분명하고 힘찬 느낌으로 받아들이던 시절 그때의 나는 어렸고 세상 그늘을 알지 못하는 순수한 영혼이었다. 아득한 기억의 저쪽은 언제나 여름이었고 비가 내리고 있었다.
기억 속에서 그녀는 언제나 단발이었고 볼에는 보조개가 있었는데 잘 웃지 않은 탓인지 허방처럼 나의 중심을 잃어버리게 만들었던 그 깊고 신비한 샘은 평소 잘 보이지 않았다. 크림빵을 좋아했던 그녀는 붕어빵도 좋아한다고 했다. 나는 여름에는 왜 붕어빵을 팔지 않는지 상상력의 빈곤을 욕하곤 했다. 그리고 우리들은 약속을 했다. 겨울이 오면 꼭 붕어빵을 사서 먹자고 말이다.
하지만 그해 여름이 시작되기 전에 시작한 나의 첫사랑은 여름이 끝나기 전에 무지개처럼 사라졌다. 소나기 내린 여름날 무지개처럼 첫사랑은 흔적을 남기지 않았고 소나기는 내렸지만 하늘은 비가 그친 후에도
어두웠다. 우리는 어디에서 와서 왜 지금 이곳에 이런 존재의 형식으로 머무르고 있으며 우리는 어디로 떠나는가?
그녀에게서 연락이 오지 않았다.
겨울은 지났고 봄이 왔다. 어제는 봄비가 내리고 나는 우산에 몸을 숨기고 연못을 산책하고 싶었다. 그러나 독감이 심한 나는 외출을 하지 못했고 집을 지키는 개처럼 방안을 맴돌았다. 모차르트의 음악을 들었고 베란다 너머 풍경을 훔쳐봤다. 전기 자전거는 잘 있을까?
아침에 눈을 뜨면 맹세를 한다. 감각에 개처럼 끌려가지는 않겠다고. 감각은 마음이다. 나는 자주 눈을 감고 대상을 보지 않고 마음의 강물 소리를 들으려고 노력한다.
임영웅이 노래를 잘하는 것이 아니라 내 귀가 그의 노래를 들어주기 때문이다. 일류 요리사의 음식이 맛난 것이 아니라 내 혀가 그때 맛을 결정하는 것이다. 좋은 향과 고약한 향은 내 코가 결정하는 것이고 몸과 마음이 명징하면 내 촉은 섬세하면서 예민하지만 몸과 마음이 물먹은 솜처럼 무거우면 나의 촉은 거친 쇳덩이처럼 무디고 둔감할 것이다.
마음이 곧 대상을 지배하는 것이다.
죽음만이 유일한 출구이겠지만 자살은 대안이 아니다. 나는 자살을 희망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삶은 고통의 연속이다.
생각하면 드라마틱한 일생이었다. 평화롭고 안온한 생은 아니었다. 제주에서 인천까지 나의 삶은 이어졌고 타향은 타향일 뿐 고향은 되지 못했다. 고향이 전부는 아니지만 말이다. 어쨌거나 나는 은퇴를 했고 고향에서 여생을 보내고 있다.
그리운 사람들은 멀리 있다.
전국 각지에 섬처럼 흩어져 있는 사람들.
죽기 전에 다시 만날 수 있을까?
알 수 없다. 알 수 없으므로 인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