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아노라'를 보고
사회생활을 해야 어른이 된다는 말을 종종 들은 적 있다. 일은 자아실현의 기회이기도 하겠지만 일단은 고단한 일이다. 영화는 해야 하는 일을 하며 자신의 앞가림을 하느라 고군분투하는 보통의 사람들을 들여다보게 한다.
노동과 반노동
영화 '아노라' 속 인물들은 이반을 제외하고 거의 전부다 열심히 일한다. 일이 어떤 종류이더라도 말이다. 아노라는 스트립댄스를 추는 대가로 돈을 번다. 아노라의 직업에 대한 시선은 차치하고 먹고살기 위해 이를 일로 하고 있다. 이른 새벽 아침 기차에 올라 고단한 얼굴로 집에 돌아간다. 바 관리자에게 건강보험에 가입해 달라고 하지만 어림없다는 말을 듣는다. 아노라 외에도 이반 가문의 하수인, 별장의 관리인, 심지어 이반과 어울리는 친구들조차도 가게에서 노동한다.
아노라에게는 이반과의 만남도 노동이다. 일터에서의 첫 만남이 그랬고, 일주일 동안의 여자친구 계약이 그랬으며 마지막으로 결혼을 통해서는 종신 고용계약을 체결하고자 한다. 소위 '취집'이라는 단어가 떠오른다. 다만 이 결혼은 고용주와 노동자의 관계를 기반으로 하기에 불평등하다. 애니는 관계 후 게임만 하는 이반을 보면서 할 말이 있지만 참는 듯한 표정으로 쳐다보곤 한다. 또 아노라는 이반의 권유에 항상 오케이다. 한 번도 거절하지 않고 그의 요구를 수용한다. 고객의 요구를 만족시켜야 하는 일을 해왔기에 이반을 만족시키는 것도 놀랍지 않다. 그렇게 아노라는 영구적인 노동계약을 체결하는 듯 보였다.
반대로 이반은 반노동을 대표한다. 결혼계약은 이반에게 영구적인 반노동 계약의 속성을 갖는다. 왜냐하면 이반은 아노라와의 결혼을 통해 미국인이 되어 러시아로 돌아가지 않고 아버지 회사에서 일해야만 하는 소명을 벗어날 수 있다. 이반의 반노동적 속성은 이밖에도 여러 행동을 통해서 드러난다. 집에서도 대리석 바닥을 롤러 타듯 미끄러지며 다니고, 일하러 가야 하는 아노라를 지속적으로 붙잡는다. 무슨 일 하세요?라는 아노라의 질문에 아버지가 누구고 나는 누구의 아들이다로 설명한다.
노동과 반노동이라는 대립되는 목표를 추구하는 둘의 결합은 예상보다 더 빨리 어그러진다. 여기서 절박한쪽은 아노라다. 왜냐하면 그는 먹고살기 위해 이 계약을 유지해야 하는 반면(잘 다니던 일도 그만두었고), 반노동의 상태를 유지하려는 이반에게는 이 계약이 지금까지 해온 게임, 놀이에 불과한 것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성실한 노동자에 대한 위로
'다이아몬드'는 아노라의 욕망이다. 아노라는 결혼선물로 받은 3캐럿짜리 다이아몬드 반지 낀 손을 비춰보며 환하게 웃는다. 아노라가 가장 흥분했을 때는 하수인 토로스가 그녀의 다이아몬드 반지를 빼앗았을 때다. 그녀는 엄청난 소리를 지르고 급기야 재갈이 물린다. 계속 아노라의 결혼을 질투하고 이반을 유혹하려던 동료의 이름이 '다이아몬드'인 것은 묘하다. 영구적인 노동계약의 상징인 '다이아몬드'를 받은 기쁨도 잠시, 반지는 토로스에게 빼앗기고, 동료 '다이아몬드'는 굳이 아노라를 따라 나와 급기야 얼굴을 할퀸다.
요즘은 자수성가의 신화보다 부잣집 막내로 멋지고 초월적 능력까지 보유한 모태영웅 스토리가 인기를 끄는 것 같다. 되는 일이 없는 나머지 노력 없이 모든 걸 갖는 어떤 존재가 되고 싶은 욕망인 걸까. 이에 비해 성실한 노동에 대한 조롱은 팽배해진 것 같다. 열심히 일해봐야 서울아파트 한 채 못 산다, 월급은 똑같은데 일만 많이 하면 호구가 된다는 식으로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을 바보취급하기도 한다. 이반은 라스베이거스에 놀러 가서 만난 호텔 지배인을 놀리고, (본업인 예배도 제치고) 이반의 사건을 수습하러 온 토로스를 무시한다. 노동하지 않아도 되는 이반은 노동자가 열심히 맡은 역할을 다하고 있는 모습을 우습게 여기는 듯하다. 이반을 찾다 지친 토로스가 레스토랑에서 젊은이들을 향해 "나는 16살부터 일했어! 너네는 직업윤리도 없고 왜 그러냐?"라고 일갈하는 장면은 신성한 땀의 가치가 존중받지 못하는 현 상황에 대한 우려가 아닐까.
하룻밤 꿈같은 소동이 끝나고 차 안에서 이고르는 몰래 빼둔 다이아몬드 반지를 아노라에게 건넨다. 이 반지는 아노라가 손에 쥘 뻔했다가 놓쳤던 어떤 욕망이고 순간이다. 예상치 못한 선물(?)에 아노라는 잠시 고민하던 그에게 노동(성)으로 그 대가를 지불하려고 한다. 하지만 그녀를 보는 이고르의 눈빛은 여느 고객과는 다르다. 안쓰러움이 묻어있다. 아노라는 영화 초반 고객에게 "너 이런 일 하는 거 너네 가족들도 알아?" 하는 멸시에 가까운 말을 듣는다. 별다를 것이 없는 입장인데도 아노라는 이런 조롱에 익숙한듯 받아쳤다. 하지만 이고르의 눈빛은 다르다. 아노라는 그제야 처음으로 눈물을 보인다.
누구나 다른 삶을 욕망해 볼 수 있다. 꿈을 갖는 게 죄도 아니고. 비록 그것이 헛된 희망이었더라도 말이다. 이고르의 눈빛은 그렇게 고단하고 성실하게 매일을 보내는 우리에게 던지는 따뜻한 시선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