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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또자신 Dec 10. 2020

그녀를 울린 땅콩 한 봉지

땅콩 한 봉지에 뉴욕 한복판에서 의상한 자매들

며칠 전 아들이 잠들기 전 읽어달라고 가져온 책, ‘의좋은 형제’. 익히 알고 있는 이야기라 별 감흥 없이 읽어내려 가는데 마지막 장에서 밤새 볏단을 옮기다 휘영청 밝은 달빛에 서로의 얼굴을 알아본 형과 아우가 얼싸안는 장면에서 갑자기 찡하더니 눈물이 났다. 이다지도 서로를 위하는 형제애라니, 너무 아름다워서 눈물이 났다. 그런데 그 순간 엉뚱하게도 10년 전 나의 하나뿐인 언니와 뉴욕 한 복판에서 대판 싸웠던 일이 떠오른다. 그것도 볏단이 아니라 땅콩 한 봉지 때문에.


사건의 전말은 이러하다. 10년 전의 나는 대학 졸업을 앞둔 예비 백수의 신분으로 언니가 공부하고 있는 뉴욕에 2주간 여행을 다녀오게 되었다. 그 당시 미주 노선 여행자들은 20kg짜리 항공 수하물 2개와 10kg 이내의 기내용 수하물을 가져갈 수 있었는데 언니가 부탁한 짐도 모자라 언니의 지인 부모님께서 가져오신 압력밥솥까지 넣고 보니 정말 내 몸무게에 육박하는 최대치의 수하물이었다. 그 무거운 짐을 이고 지고 도착해보니 뉴욕이고 뭐고 너무 고단하고 피곤해서 잠을 자느라 하루를 거의 다 써버렸다. 언니는 옆에서 혀를 차며 시차 적응을 위해서라도 잠을 조금 참아보라고 외쳐댔으나 웅웅 거리는 그 소리와 함께 나는 바닥과 거의 하나가 되었다. 여행에 대한 설렘도 육신의 피곤함은 이겨내지 못한 것이다.


사람들은 '뉴욕'하면 화려한 타임스퀘어의 조명과 브로드웨이, 그리고 이름마저 멋져 보이는 브루클린 브릿지 등을 떠올리지만 내가 2주간 만났던 뉴욕은 그 화려한 이름만 들었을 땐 쉽게 떠올리지 못할 예상 밖의 얼굴도 보여주었다. 예를 들자면 지하철. 뉴욕의 지하철은 우리나라와 달리 도시의 역사와 함께해온 탓에 시설이 매우 노후되었다. 그래서 몇 개의 지하철역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조명도 어두침침하고 화장실도 너무 열악했다. 게다가 승강장에서 지하철을 기다리고 있노라면 건너편 지하철 선로에 아주 통통한 쥐들이 활보하고 있는 게 자주 목격되었는데, 지하철에 쥐가 출몰하다니 한국 같았으면 난리가 났겠지? 물론 내가 다녀온 것도 벌써 10년 전이니 지금은 어떨지 모르겠다. 또 하나는 혹독하게 추운 겨울 날씨. 미국 동부에 해당하는 뉴욕의 겨울은 상상 이상으로 추웠다. 뉴욕에 있는 2주 내내 어그부츠를 문신처럼 꼭 신고 다녔는데 푸른 잔디에 누워 광합성하는 뉴요커들이 가득해야 할 센트럴파크도 한겨울에는 온통 눈으로 뒤덮여 있어서 그 넓은 공원을 산책하는 동안 우리가 본거라곤 하얀 눈과 귀여운 다람쥐 한 마리뿐이었을 정도다. 아마 내가 한국에서도 평생 따뜻한 남쪽 지역에서만 살았기 때문에 더 춥게 느껴졌겠지만, 높은 빌딩 숲 사이를 지나갈 때마다 날카롭게 코를 때리던 뉴욕의 칼바람이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




다시 땅콩 이야기로 돌아가서, 그날은 아마도 언니와 브로드웨이에서 뮤지컬 한 편을 보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었을 것이다. 당시 언니는 노상에서 판매하는 땅콩스낵(설탕을 뿌려 기름에 튀긴 것)을 무척 좋아했는데 손바닥만큼 작은 봉지에 가득 채워서 1달러 정도에 팔았다. 가게마다 가격이 조금씩 달라서 1.5달러나 2달러에 파는 곳도 있었으니 1달러는 싼 편에 속했다. 극장에서 나와 어둑어둑한 거리를 지나가는데 언니의 눈에 1달러짜리 땅콩이 뜨인 것이다. 언니는 냉큼 땅콩 한 봉지를 사서 먹기 시작했다. 함께 걸어가면서 언니가 나에게 두세 개 정도 땅콩을 주더니 내가 조금 더 먹으려고 하자 딱 잘라 안된다는 것이다. 본인이 산 것이니 이제 남은 것은 자신이 다 먹겠다는 그 말을 듣는 순간 서러움과 화가 치밀어 올랐다. 우와, 땅콩 한 봉지 가지고 치사하게 이러긴가? 동생이 땅콩보다 못한 건가? 그때부터 땅콩을 사이에 두고 실랑이가 벌어졌다. 정확하게 어떤 대화가 오갔는지는 모르겠지만 서로 날 선 공격을 퍼붓다가 급기야 지하철을 타고 나서는 약속이나 한 듯 각자 다른 칸에 앉아버렸다. 역에 내려 집으로 가는 길에도 둘 다 여전히 화가 안 풀려서 멀찌감치 거리를 두고 걸었다. 점점 집에는 다 와가는데 아직 화는 나고, 언니는 먼저 사과할 낌세 따위 없으니 선택은 하나뿐이었다. 집에 들어가지 않는 것. 나는 며칠 전 한 번 가 본 적이 있었던 큰길 건너 대형마트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얼마 가지 않아 갑자기 컴컴한 뉴욕 거리에 혼자 있다는 현실을 자각하면서 덜컥 겁이 났다. 두려움이 분노를 이긴 것이다. 결국 소심한 반항은 미수에 그친 채 발걸음을 돌려 다시 집으로 향했다. 걱정이 되었던 언니도 이 모든 상황을 창문 블라인드 사이로 빼꼼히 지켜보고 있었다. 집에 들어가서 우리 둘이 어떤 대화를 나눴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펑펑 울고 서로 미안하다고 한 뒤 지쳐 잠이 들었던 것 같다.

이게 바로 그 문제의 땅콩.

(이미지 출처: https://m.blog.naver.com/jyjyjjyy/221763521178)


이 이야기를 들으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가지는 의문. 왜 언니는 땅콩에 그렇게 집착했나? 언니는 대학 졸업 후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해 뉴욕에 있는 대학원에 진학을 했다. 학비는 부모님 도움으로 어찌어찌 해결했지만 생활비는 오로지 언니 혼자 힘으로 마련해야 했다. 코리아타운에서 무거운 짬뽕 그릇도 나르고 학부생들에게 레슨을 해주면서 돈을 벌었지만 살인적인 뉴욕 물가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최대한 안 쓰고 버텨야만 했다. 그렇게 아끼고 아끼다가 가끔 길가에 파는 따뜻한 땅콩 한 봉지 사 먹는 게 그 당시 언니의 소확행이었던 거 같다. 치열한 뉴욕살이에 작은 위로가 되어준 땅콩 한 봉지가 언니에게는 남다른 의미였을지 모른다.

땅콩 때문에 나를 울리긴 했지만, 사실 내가 뉴욕에 머무는 동안 언니는 최선을 다해 나와 함께 해 주었다. 아직 학기 중이었고 여러 가지 소화해야 하는 일정들도 있었지만 다크서클이 무릎까지 내려오는 날에도 어떻게든 짬을 내어 나를 여기저기 데리고 가 주었고 추운 날씨 속에서도 동생에게 인생샷을 남겨주기 위해 매번 카메라 셔터를 엄청나게 눌러댔다. 영어도 잘 못하는 데다 여행 계획도 전혀 짜 오지 않은 채 무턱대고 날아온 동생이 귀찮을 법도 했을 텐데 말이다.


비록 우리는 뉴욕 한복판에서 땅콩 한 봉지로 의상한 자매가 되었지만, 10년이 지나 그때를 떠올리며 글을 쓰다 보니 당시 언니의 상황과 마음이 조금은 이해가 된다. 만약 내가 다시 그때로 돌아갈 수 있다면 언니에게 땅콩만큼은 아낌없이 사줄 수 있을 것 같다. 그리고 함께 땅콩을 나눠 먹으며 머나먼 타향에서 꿈을 위해 치열하게 살고 있는 10년 전의 언니에게 "우리 언니 멋져, 잘하고 있어”라며 따뜻하게 한번 안아주고 싶다.


그리고 언젠가 우리 아들에게도 판타지에 가까운 의좋은 형제 이야기 대신 엄마와 이모의 현실자매 이야기를 들려줄 날이 오면, 먼저 뉴욕에 가서 맛있는 땅콩부터 좀 사 오라고 해야겠다. 엄마랑 이모가 싸우지 않아도 될만큼 아주 넉넉하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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