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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또자신 Nov 17. 2020

“범 내려온다” 와 “문보영”이  내게 가르쳐 준 것

딱 맞고, 어울리는 것만 하는 건 재미없지 않나요?

첫째에 이어 둘째 아이도 모유수유를 하고 있다. 신생아 시기에는 아이와 나 모두 적응이 필요하기에 하루에도 예닐곱 번씩, 한 번에 30분 넘게 수유를 하다 보면 정말 녹초가 된다. 그러나 아이가 점점 자라면서 빠는 힘도 좋아지고 엄마와의 합이 맞아가면서 힘들었던 수유시간이 아기나 엄마 모두에게 한결 여유로워진다. 그래서 나도 이제 한쪽 젖을 물리면서 동시에 핸드폰으로 글 쓰거나 이것저것 찾아보는 게 가능해진 것이다. 그렇지만 수유 중에 소리가 너무 시끄러우면 아이가 젖 먹는데 방해가 되기 때문에 혹시 영상을 보더라도 항상 음소거 모드를 해 둔다.


그런데 얼마 전 그때도 어김없이 수유 중 핸드폰으로 시간 때우기 좋은, 일명 "재미난 짤”을 찾아보다 어떤 공연 무대인듯한 영상 하나를 보게 되었는데 나오는 사람들의 모습과 춤이 너무 신박하여 나도 모르게 음소거 모드를 해제하고 말았다. 우와, 이거 뭐야? 알고 보니 그 짤은 ‘이날치 밴드’의 ‘범 내려온다’라는 노래였다. 분명 노래 장르는 판소리인데 여러 명의 댄서(앰비규어스 댄스컴퍼니)들이 독특한 복장(갓을 쓰고 아디다스 트레이닝복을 입음)과 춤사위로 무대를 누비고 있었다. 듣고 있자니 나도 모르게 궁둥이가 들썩들썩, 흥이 올랐다. 구성진 판소리와 리드미컬한 베이스, 드럼의 반주 거기다 열을 맞춰 모였다 흩어지며 스텝을 밟는 댄서들까지. 이 오묘한 조합이 만들어내는 생경하면서도 익숙한 리듬과 실루엣은 말 그대로 저 세상 힙함이었다. 사람들이 국악팝이라고 부르기도 하던데, 단순하게 국악을 현대적으로 해석했다고 말하기에는 그들이 이뤄낸 언발란스같은 하모니가, 사람들을 들썩이게 만드는 그 흥이 너무 신나고 멋지다.




읽기에 열광하던 내가 가만히 앉아서 무언가 읽는다는 것 자체가 거의 불가능한 엄마 사람이 되면서 읽기 대신 택한 대안은 듣기였다. 아기가 자는 동안 빨래를 개거나 밀린 설거지를 하면서 틈틈이 독서 팟캐스트를 듣기 시작했다. 어느 날인가 내가 즐겨 듣는 팟캐스트에 '문보영'이라는 20대 시인이 자신의 책과 함께 게스트로 출연했는데 조곤조곤 앳띈 목소리로 인터뷰를 이어가는 이 젊은 작가에게 관심이 가기 시작했다.

그녀는 1992년생으로 2016년에 제17회 중앙신인문학상을 통해 등단한 시인이면서 힙합을 즐겨 추고 또 자신의 일기를 우편물로 만들어서 사람들에게 유료로 발송하는 일기 딜리버리 서비스를 진행하고 있다. 내 머릿속에 '시인'의 이미지란 연필을 입에 물고 흐르는 강이 보이는 창가에 앉아 조용히 시상을 떠올리는 머리가 희끗한 중년의 모습인데, 힙합을 추면서 자신이 좋아하는 피자를 마음껏 사 먹기 위해 사람들에게 꾸준히 일기를 배달하는 시인이라니. 문보영 (@opendooropenit) • Instagram photos and videos


사실 '시'는 문학 장르 중에서도 가장 상위의 경지로 자주 언급되기에, 산문이나 소설을 쓰는 작가들과 달리 '시인'이라는 호칭이 주는 범접할 수 없는 아우라가 있었던 것 같다. 그런데 그런 고정관념을 깨뜨리고 자신만의 다양한 표현방식으로 시를 쓰고, 일기를 쓰고 또 독자들과 소통하는 그녀의 모습이 너무 매력 있었고, 최근에는 '콜링 포엠'이란 타이틀로 미리 신청한 독자들에게 랜덤으로 전화를 걸어 시를 읽어주었다는데... 이 젊은 시인의 재기 발랄함과 실행력에 한 번 더 감탄하고 말았다.




'범 내려온다'라는 노래와 시인 '문보영'이 내게 가르쳐 준 것. 항상 나에게 맞는 것, 어울리는 것,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옳다고 말하는 것만 하고 산다면 편하고 안전할지는 모르겠으나 도전하고 실험하는 자만이 누릴 수 있는 희열과 즐거움은 놓칠 수밖에 없다는 것. 그런 의미에서 내가 엄마로 사는 시간들을 쪼개 글을 쓰는 이 순간이 어쩌면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작은 도전이고 또 실험이지 않을까. 그래서 요즘 이 시간이 그리도 재밌고 신이나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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