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남의 주제 두 번째
당신이 몇 살이건 우리의 삶에서 역지사지는 매우 중요하다. 상대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것을 넘어 역지감지, 즉 상대의 입장에서 느끼는 단계에 이르러야 한다고 했던 학부시절 심리학 교양 교수님의 말씀이 떠오른다. 역지사지는 공감과도 밀접한 관계를 이룬다. 사실 공감은 역지사지를 포함하는 개념일 것이다. 우리는 상대방의 입장과 감정을 모두 모르고 있어도 들어주기를 실천하며 공감을 해주기도 한다. 대화의 작은 기술이다.
나도 지금까지 많은 인간관계의 시행착오를 겪으며 역지사지의 중요성을 자각했고 또 여러 방면으로 실천하기도 했다. 이 낱말 또한 워낙 넓은 사유를 할 수 있으니 만남과 역지사지의 접점에 대해 잠시 떠올린 생각을 메모하고자 한다.
오늘도 맑은 날이 지속됐다. 아주 덥지도, 아주 춥지도 않은 봄 날씨가 독일에 계속되고 있다. 나는 독일 정부의 방침과는 상관없이 초기 코로나 사태 때부터 지속해온 단조롭고 폐쇄적인 생활을 유지하고 있다. 하루 많아야 두 번, 산책을 간다. 한 번에 약 1시간씩 두 번이면 약 1만 보를 걷게 된다. 나는 이 걷기 운동을 유일한 바깥활동으로 삼고 있다.
대부분의 날은 묵주기도를 하며 걷는다. 묵주기도 10단을 하면 한 번의 산책이 여유 있게 마무리된다. 주로 밤 시간 주변이 고요해졌을 때, 어두컴컴하여 특별히 주변을 둘러볼 필요가 없을 때 나는 기도를 하며 걷는다. 하지만 햇빛도 쬘 겸 아침이나 낮 시간에 산책을 나가면 라디오나 음악을 듣는다. 요 며칠 산책을 하며 이도 저도 질려 휴대폰 속 음성 메모를 열어보았다. 강의 녹음, 독일어 말하기 시험 연습 등 캐캐묵은 옛 파일들이 있었다. 그러는 중 그 사이에 내가 약 6-7년 전 기회가 주어져 많은 학생들 앞에서 연설을 했던 녹음 파일들이 있었다. 그때는 아무 생각 없이 그저 기록으로 남기고 싶었을 뿐인데 다시 들으니 감회가 새로웠다. 지난날의 내가 지금의 나와는 너무나 다른 듯했다. 그때의 나는 패기 넘치고 물불 가리지 않는 열정이 있었다면 지금의 나는 차갑고 조용해졌으나 집중력과 이성은 늘어난 것 같다.
모교 선생님을 찾아가 당신께서 담임을 하시던 학생들을 만나 30분 정도 이야기를 나누었던 파일을 들으며 동네 한 바퀴를 떠났다. 나는 그 수험생들에게 그 당시보다 더 과거에 만난 인연들을 소개했다. 어떤 학생들을 만났고 그들과 어떻게 공부를 했으며 그들이 어떻게 변화했는지를 소개했다. 그리고 이 발표를 듣는 그대들도 이런 점에 주목하여 작은 실천부터 축적하며 성취감과 자신감을 득하라는 것이 내용의 요체였다. 내 목소리였지만 너무 어색했다. 이런 때가 있었다니...
나는 그 친구들에게 나의 고등학교 2학년 때의 생활과 내가 학원에서 만나 반년 간 집중적으로 가르쳤던 고등학교 2학년 학생 4명의 예시를 들으며 그들의 눈높이에 발표를 맞췄다. 사실 몇 년의 수험생 멘토를 하며 대부분의 시간을 n수생들과 함께 보냈다.
문득 녹음파일을 듣다가 그때 나를 만나 고생 고생하며 공부했던 그 네 명의 학생들의 입장이 궁금해졌다. 당시의 나는 앞만 보며 달리는 '답이 정해진' 멘토링을 하고 있었다. 좋은 성적을 받는 공부 방법은 수없이 많을 것이다. 나는 그중에 스스로 공부하며 선택한 방법을 학원에서 많은 학생들을 만나 적용했고 조금 더 개방적이고 포괄적 이도록 애썼다. 당시 고등학교 2학년 학생들이었던 그 아이들은 엄격한 나를 만나 첫 한 달은 정말 '피똥 싸며' 수학에만 매달렸다. 나는 누구보다 쉽게 이해시킬 수 있고, 누구보다 교재 속 내용들을 직관적으로 그리고 창의적으로 정리하고 있다고 자부하고 있었기 때문에 2학년인 그들에게 3학년, n수생들이 푸는 문제들을 풀려도 언젠가는 극복될 것이라고 믿었다. 그들이 스스로 서클을 만들어 나를 초빙했고 나는 스트레스가 받기 싫어 학원에 남고 싶었기 때문에 그들은 을이었고 나는 갑이었다. 그들을 위한 공부의 시작은 '난 언제나 떠날 것이다'라는 위협이었다.
나는 그들에게 최선을 다해 가르쳤고, 그들에게 그만큼 많은 것을 요구했다. 하루 50문제의 수학 문제를 풀어오라 했다. 난이도에 상관없이 무조건 베껴서라도 과제장에 정자로 풀이를 적고 맨 위에 일련번호를 채우라고 했다. 이는 사실 내가 재수생 때 직접 했던 것보다도 더 과한 처사였다. 그런데 그들은 해냈다. 녹음파일을 듣다 보니 그때 그들이 했던 말이 생각났다.
"선생님, 다른 공부 아무것도 못하고, 쉬는 시간도 전부 수학 문제만 풀어도 시간이 부족해 잠을 줄여서 문제를 풀어왔어요."
단 한 번 주말에 만나는 그들의 안색이 볼 때마다 점점 어두워지며 다크서클이 짙어졌던 모습이 오버랩됐다. 그들 뒤로 싱글벙글 쳐다보시던 어머님들의 모습도... 아마 그 정도의 각오와 능력을 미리 엿보지 않았다면 나는 진작에 그들과의 공부방을 거절했을 것이다. 고2였기 때문에 어렵지만, 고2였기 때문에 부담 없이 모험을 떠날 수 있었다. 수학 2-3등급의 그들을 단 반년만에 100점에 수렴하게 만들겠다던 나의 각오는 허세만 있어서는 실현될 수 없다는 것을 어린 나조차 모르지 않았다. 나는 어머님들의 전폭적인 지지와 학생들의 자발적인 신임에 힘입어 그렇게 수학 공부를 군입대 전까지 함께 했다.
문득 생각이 들었다: 얼마나 힘들었을까?
아무리 무비판적인 수험생활이 주어졌고, 그들이 우연히 학원에서 만나 직접 겪은 사람에게 무한한 믿음이 있어도 반년 간 어떻게 인내했을까?
난 그 당시 매월 포트폴리오를 적어 학부모님들께 보내드렸다. 우리가 어떤 공부를 했고, 어떤 목표를 가지고 있으며, 어느 단계에 있고, 학생들 개개인에 대해 내가 파악한 특이사항이 무엇인지. 내가 파악한 그들의 성격은 어떠했고, 공부를 진행하며 관찰한 그들의 마음의 변화는 어떠한지 등 매번 A4용지 5-6장의 분량이었다. 나 또한 그들과의 만남에 실력 이상의 노력을 기울였다. 그럼에도 그들의 노력에 감정 이입해 생각을 해보니 새삼 대단하다고 느꼈다. 그때의 나는 수험생들과의 삶이 지속돼 어느 정도 무감각해졌을 것이나, 지금의 나는 그렇지 않다. 나는 그 아이들과 어머님들께 참 감사하다. 그런데 표현할 방법이 없다는 것이 너무 마음이 아팠다. 그게 인생이니까... 라며 합리화해야 하는 것인가 정녕?
참 보람 있었다. 그들이 아니었으면 나는 지금 '교육'에 대한 막연한 꿈조차 꿈꾸지 못했을 것이다.
그들은 애초에 학교에서 특별히 공부로 주목받지 않았던 그들이었다. 무언가 변화를 위해 기숙학원에 들어왔고 배정된 수학 조교가 나였다. 지극히 평범했던 그들이 50문제 풀이를 울며 겨자 먹기로 1주일을 지나 한 달이 됐을 때 이제는 다른 공부를 할 수 있는 여유가 생겼다. 2달이 되자 완전히 습관이 되어 더 이상 '양'에 대한 부담을 느끼지 않게 됐다. 정확히는 부담은 될지라도 견딜 수 있게 된 것일 테지만. 어느 날이었다. 한 아이가 학교에서 있었던 일을 들려줬다. 선생님이 모의고사 문제 풀이를 몇몇 학생들에게 시켰는데 자기도 포함됐다. 자신은 내게 배운 대로 문제를 풀었고, 선생님과 학생들이 모두 놀랬다고 한다. 선생님은 떠올리지 않았던 풀이여서, 학생들은 처음에 못 알아들어서. 그 날 이후 그 학생에게 급우들이 문제를 가져오기 시작했단다. 존재감 제로였던 사람이 어느새 수학의 '인싸이더'로 등극했다. 또 다른 어느 날이었다. 함께 셋이서 지하철을 타고 가는데 그중 한 학생이 울음을 터뜨렸다. 그리고는 내게 말했다. "선생님 때문에 이러는 건 아니에요." 옆에 있던 다른 학생도 그 마음이 충분히 이해가 됐다. 그들은 힘들지만 옳다는 것을 스스로 느끼기에 인내해 나가고 있는 것이었다. 그것이 수험생활이니까.
늘 똑같은 수험생활에 이런 작은 성취감이 늘 축적되어가야 한다. 다시 문득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위로도 받아야 한다.
얼마나 작은 기쁨의 순간을 오매불망하며 버텼을까? 과거의 나였지만 참 힘들었겠다.
함께 공부한 지 두세 달이 지나자 그들의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졌다. 이젠 정말 수험생다운 마스크를 가지게 된 것이다. 어쩌면 나는 내가 그렇게 하지 못해, 우물 안 개구리였던 시절로 재수를 하게 됐던 쓰라린 패배를 그들은 답습하지 않기를 바랐을지도 모른다. 그들은 진실로 대단했다. 나는 학부모님들께 보내는 포트폴리오 말미에 항상 이런 말을 진심을 가득 담아 적었다.
"악역은 저로서 충분합니다. 아이들은 정말 멋지게 따라오고 있으니 부모님은 그저 응원과 칭찬 그리고 맛있는 음식만 해주시면 됩니다. 부탁드립니다."
정확히 10년 전 나는 참 많은 오지랖을 펼쳤구나. 새삼 느낀다. 어찌 보면 특별하고, 어찌 보면 유난스러웠다.
아쉽게도 그 아이들과는 이제 세월이 지나 연락이 닿지 않지만 추억 속의 인물로 기억하고 있다. 그때로 돌아가 그때의 감정을 다시금 느끼니 감정이 복받쳐 무언가 끓어 올라오는 것 같았다. 나는 그런 추억이 유독 많다. 그럴 때 나는 세상을 향해 되묻곤 한다. 왜 사람의 인연은 나가떨어지는 것을 '자연스럽다'라고 해야 할까요? 왜 사람들은 내 주변에 남은 몇 명의 사람들이 대단한 것이고 소중한 것이다를 진리인양 받아들여야 할까요? 나조차도 말이죠.
그런데 이 질문에 답을 하긴 참 어렵지만 무언가 수긍을 하게 되는 30대의 내가 보인다. 20대 때의 나는 그 작은 인연도 특별하게 만들고 싶어 많은 노력을 기울였고, 그 덕에 많은 보람과 상처를 동시에 받았다. 그렇게 이리저리 치이듯 무뎌지다 보니 지금에 이르렀다. 그리고 그 결론은 바로 저 위의 질문과 유사한 것 같다.
내가 그렇듯 아마 상대도 추억 속에 기억할지라도 현실에서 안부를 주고받는 것은 왜인지 꺼려질지도 모른다. 지금의 나는 가슴속에서 '그립다'는 말이 넘쳐흘러도 목구멍 바로 아래에서 꾹 담아 내려보내는 내공이 생겨났다. 그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생뚱맞거나 전혀 반대의 기억일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인간관계도 생각해보면 참 많은 용기가 필요하다.
얼마 전 학원에서 일할 때 내게 많은 조언과 기회를 아낌없이 주셨던 한 원장님께 안부인사를 드렸다. 그분의 장문의 카톡 중 유독 이 글과 어울리는 구절로 이 글을 마무리하고자 한다.
반가운 추억 속에 자상남을 꼭 기억하고 있습니다.~조금은 특이한 학생인 느낌이었는데.... 그것은 특이한 것이 아니라 어쩌면 특별함에서 오는 이질감이었는지도 모를 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