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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자상남 Jan 18. 2019

프롤로그: 새로운 시작

시작은 언제나 설렌다

2010년 초, 대학입시 재수가 끝난지 얼마 안 된 어느 추운 겨울날이었다. 수능이 끝나자마자 서울로 논술공부를 하러 왔다. 한 달을 수험생때 보다 더 바쁘게 보냈다. 시간이 자나 수능 성적표가 나오고, 정시 원서를 썼다. 성탄절이 지나고 나니 난 이제 정말 백수가 되었다. 나는 기다려야 했다. 치열하게 준비하고 또 준비해서 원서를 모두 집어넣었다. 이제 결과만을 기다려야 한다. 발표가 있을 1월 중순까지 기다려야 했는데 그 시간이 길고도 초조할 것 같았다. 긴장감을 해소시킬 무언가가 필요했다. 그때 내 머릿속에 생각난 것이 바로 수학 조교 아르바이트였다.


수학 조교 알바는 서른이 된 지금의 나에게 큰 의미를 지닌다. 수험생 때 재수학원으로 찾아오던 선배 수학 조교들이 없었다면 나의 재수 생활과 그 결과는 크게 달라졌을 수 있다. 그런 수학 조교를 직접 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내가 다녔던 기숙학원 원장님께서는 학원을 퇴소하기 전에 공개방송으로 아르바이트 자리를 구하셨다.



"수능이 끝나고 후배들을 가르치고 싶은 사람들은 지원해주시기 바랍니다." 



수능조차 치지 않은 그 상황에서 원장님의 제안은 나에겐 그저 '그림의 떡'이었다. 아무리 내가 하고 싶은 일이라 할지라도 수능의 결과가 좋아야 학생들에게 귀감이 되어줄 수도 있었다. 그것은 학생들이 조교를 인정하느냐의 문제다. 선배로서 진학하는 대학의 간판도 중요하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수학 조교인 만큼 수능 시험에서 얻는 수학 성적이 좋아야 할 것이 아닌가? 선배들의 모습을 보며 나는 그 일을 꼭 해보고 싶었다. 내심 경쟁자가 적기를 바라며 11월 수능시험까지 공부를 지속했다.


2010년 초의 나는 아직 그토록 원하던 대학생이 아니었다. 다행스럽게도 내 수능시험에서 얻은 수학점수는 100점 만점이었다. 원서를 쓴 대학의 간판도, 수능시험 점수도, 수학 조교로서의 자격이 그리 부족해 보이지는 않았다. 나는 나름 정치적으로(?)입학원서를 쓰기 위해 학원을 드나들 때 결정권이 있을 법한 선생님들에게 적극적으로 어필하며 눈도장을 찍어두었다. 원서접수가 마무리되고 얼마 안 있어 전화 한 통이 왔다. 백종민 당시 이과 최상반 담임선생님이셨다.



"(자)상남아, 니 수학 조교 한 번 안 해 볼래?



아! 얼마나 기다렸단 말인가. 나는 고민의 여지 없이 바로 수락했다. 그렇게 M사 기숙학원의 수학조교가 되었다. 며칠 후 백 선생님께서 근무에 필요한 정보들을 이메일로 보내주셨다. 나는 아르바이트를 위해 학원으로 떠날 준비를 했다. 부모님께서도 한 달 정도를 아이들과 함께 먹고 자고 하는 일에 대해 흔쾌히 허락해주셨다. 이제 떠나는 날만 오면 된다.

   



첫 출근을 알리는 조교 안내문



선생님께서 이메일을 보내실 때 다른 조교들에게도 함께 보내셨다. 문득 누가 나와 일을 할지 궁금했다. 당시 유행했던 싸이월드를 검색 기능을 통해 이메일을 하나하나 찾아서 다른 조교들이 누구인지 알아보았다. 모두를 찾지는 못했지만 이미 대학에 진학한 남양주 기숙학원 선배들이 함께 한다는 것과 소수의 여성 그리고 총인원이 13명 정도였다는 것 등을 파악했다.  안내문에도 나와 있듯이 조교는 굉장히 철저한 관리를 하는 동시에 받는 입장이다. 설렌 마음을 가지고 잊고 있었던 수학노트를 들추어 보며 그렇게 며칠을 더 기다렸다.


학원 윈터스쿨과 재수선행반의 개강은 12월 말이었다. 우리는 1월 초에 근무에 투입된다. 늘 그렇듯 기다리는 날짜는 어찌된 영문인지 늦게 다가오고, 피하고 싶은 날짜는 빨리 다가오는 것이 인생의 묘미다. 


학원 홈페이지를 통해 학생들의 생활 사진들이 올라왔다. 자식들을 철통같은 기숙학원에 보내놓고 걱정하고 있을 학부모들을 위한 게시판이다. 나는 그 이후에도 종종 홈페이지에 들어가 사진들을 보며 그들이 어떻게 생활하고 있는지 보았다. 동시에 내가 바로 한두 달 전까지 그 자리에서 보냈던 힘겨운 수험생활을 머릿속으로 떠올려 보았다. 


수능이 끝나고 드디어 수험생 티를 벗어나자 싶어 생애 처음으로 머리에 염색을 했다. 또 서울에서 대학을 다니는 친형과 앞으로 함께 지낼 방도 알아보았다. 원서를 다 쓰고 나서 서울에 머무르며 앞으로 있을 5주간의 기숙학원 생활에 필요한 물품들을 준비했다. 보아하니 재수할 때 같은 반이었던 친구들은 아무도 조교를 지원하지 않은 것 같았다. 그래서 그런지 새로운 만남을 할 생각에 기대가 되었다. 개강날이 어서 다가오기를 오매불망 기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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