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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자상남 Feb 07. 2019

좋은 선생님 철학 -중

세심한 남편, 아내가 되어주듯이

샤이니 - In my room, Youtube



조금 더 구체적으로 들어가서 학생들의 마음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을 이야기해보자. 학생들의 마음을 얻는 가장 빠른 방법은 무엇일까? 학생들의 마음을 얻는 방법을 논하기 전에 우리는 먼저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 있다. 


"당신은 왜 학생들의 마음을 얻으려는가?"


어디서 근무하는 선생님이든 저마다 가르침에 임하는 고유한 방식이 있다. 예를 들어, 지극히 공적이고 비즈니스적인 관계를 학생들과 맺어나가려는 사람이 있다. 자신에게 주어진 일만 잘하면 된다는 생각을 가진 유형이다. 어떤 이들은 선생님으로서 역할보다는 특정 이익을 더 중요시한다. 공교육이라면 안정적인 일자리라는 생각에, 사교육이라면 더 높은 경제적 이익을 생각을 가지는 유형이다. 또 어떤 사람은 어떠한 일보다도 학생들과의 유대관계를 더 중요한다. 결국 다양한 가치관을 가진 사람들이 교육현장에 있다.


나도 학생들의 마음을 얻고 싶었다. 조교로서 2살밖에 차이 안나는 동생들에게 선생님이라는 소리를 듣는 것이 처음에는 익숙지 않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형, 오빠, 혹은 선생님이라는 호칭을 듣다 보니, 결국엔 모두가 되어버린다. 아니, 모두가 되고 싶어 진다.


그들의 마음을 얻고자 했던 이유는 간단하다. 처음 조교로 일했던 윈터스쿨이 내게 특별해 보이듯, 다른 학생들에게도 마찬가지일 거란 생각을 했다. 특수한 환경에서 우연히 만난 우리는 자연스럽게 특별한 관계가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내게 이 아르바이트가 특별했던 구체적인 이유는, 짧지 않은 시간 내가 뜨겁게 공부하고 그 공부한 것을 다시 다른 누군가를 위해 활용할 수 있다는 사실에서 엄청난 희열을 느꼈다는 것이다. 곧 신입생이 될 나에게 새로운 인연에 대한 갈망 또한 충족될 수 있는 좋은 기회이기도 했다.

 

그래, 특별하고도 소중한 인연을 만드는 것, 그것이 나의 궁극적인 목표였다. 난 그 모든 순간들이 재미가 있었다. 나에게 선생님! 선생님! 하면서 다가오는 아이들이 신기했다. 나를 지속적으로 찾아주는 아이들이 너무나 고마웠고 함께 공부하며 바라본 그들의 모습이 정말 아름다웠다. 똘망똘망한 눈빛으로 내 설명을 경청해가며 바스락바스락 연필로 문제를 조금씩 풀어가는 그 모습이 대견하고 사랑스러웠다. 그 모두에게 반해버렸다.

 

좋은 선생님의 또 다른 철학으로서 강조하고 싶은 것은 '작은 배려심', 혹은 '작은 기억'이다. 수험생활을 예로 들어보자. 똑같이 열심히 앉아서 공부하는데 누구는 만족할 성적이, 다른 누구는 불만족할 성적이 나온다. 그 차이는 무엇인가? 상위권만 모아두었던 우리 반에서는 특히나 작은 차이가 결국엔 모든 차이가 됐다.


간단히 말해 나는 학생들과 마주 앉아 질문을 받거나 이야기를 나눌 때 남들보다 작은 정성을 더 얹었을 뿐이다.

그 결과, 그 깨알 같은 정성이 우리 반을 넘어 이반 저반 학생들을 불러 모았고, 그들의 입에 내 이름이 오르락내리락하게 만들었다. 수학은 그러기에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과목이다. 수학에는 원칙이 있고 원리가 있다. 대단히 논리적인 과목이기 때문에 '그냥 이렇다'라는 식의 설명은 있을 수 없다. 모든 것이 증명 가능한 것이고, 모든 것이 인과관계에 서로 연결되어 있다. 수학을 공부하거나 가르칠 적에 똑같은 강의, 똑같은 주입식 내용일지라 하더라도, 끊임없이 '왜? 왜? 왜?'를 대답해줄 수 있는 방향으로 진행이 되어야만 한다. 즉, 풀이 과정에 5줄의 식이 있다면, 한 줄 한 줄 넘어갈 때마다 논리적 이유가 있다는 얘기다. 그 과정이 이해되도록 설명될 때 곧 학생들의 눈높이에 내가 맞추고 있는지 척도가 된다.



사실 나는 배운 대로, 스스로 공부한 대로 아이들에게 알려줬을 뿐이다. 다만 나는 다른 사람들에 비해 항상 더욱 자세하고 친절하다는 소리를 들을 만큼 꼼꼼히 짚어주었다. 문제를 하나 풀더라도, 풀이과정을 적고 그저 문제의 답을 찾아내는 것이 아니라, 언제 그 풀이를 써야 하고 왜 써야 하는지, 왜 그 개념이 이렇게 연결될 수 있는지, 그런 연결고리를 우리는 문제 속에서 무슨 단어와 힌트를 통해 감을 잡을 수 있는지 등 가능한 쉬운 언어를 사용해 설명했다. 그들이 알면 아는 대로, 모르면 모르는 대로 늘 나는 백지에서 설명하고자 했다. 풀이에 필요한 개념들을 아이들이 모르고 있다면, 나는 시간의 대부분을 할애해서라도 그 개념을 꼭 짚고 넘어갔다.

  

따지고 보면 지극히 당연한 절차를 따랐을 뿐이다. 수학 공부는 이것이 전부다. 답을 찾기 위해서는 몇 단계의 풀이를 거쳐야 하고, 그 몇 단계 중에 단 하나라도 모른다면, 설령 풀이과정을 선생님에게서 빌려가 그 순간 이해한 것 같은 착각이 들더라도 학생들은 모르는 것이다. 학생들은 스스로 능동적으로 그 풀이를 써먹을 수 있는 논리적인 회로까지는 얻지 못했다. 이런 수동적인 질의응답은 결국 헛공부, 깊이 없는 공부에 그치게 된다.


작은 정성엔 무엇이 있을까? 단순히 자세히 설명해주는 것? 물론, 적절한 말솜씨, 필기력 그리고 쉽게 풀어서 설명하는 능력 등 많은 요소가 필요하다. '역지사지'의 입장으로 끊임없이 회귀해야 한다. 내가 아는 것과 그들이 아는 것은 다르다. 그들의 입장에서 부족한 부분을 채워줘야 한다. 내 손으로 푸는 문제지만 그들의 눈높이에서 풀어져야 한다. 하지만 학생들은 단순히 그런 것에만 반응하지 않는 것 같다. 여기까지가 지난번 글에서 말한 실력의 요소다. 실력이 있으면 배신하지 않는다는 믿음은 생겨도, 그 사람 전체를 의지할 정도의 신뢰는 얻지 않는다.


누구나 자신에게 헌신해주는 사람에게는 고마움을 느끼게 된다. 고마움을 느끼면 작용 반작용의 법칙처럼 자신도 무언가를 주고 싶어 진다. 나는 질의응답에서 막힌 문제들은 꼭 사진으로 남겼다. 하루에 수백 문제를 푸는데 막히지 않는 문제가 나오지 말란 법은 없다. 다만 그 문제들을 단순히 "잘 모르겠다, 다른 거 물어봐"라고 말하는 데에 그치지 않았다. 나는 언제나 일과가 끝나고 나서 혹은 쉬는 시간 중간에 그 문제들을 다시 풀어보았다. 내가 끝내 풀지 못한다면 다른 조교 친구들에게 물어서라도 꼭 풀었다. 친구들이 풀어준 문제는 다시 내가 먼저 공부를 했다. 그리고 학생들에게 나의 언어로 쉽게 이해시킬 수 있는 준비를 했다.


장 자크 루소는 <에밀>에서,

"학생의 질문을 회피하는 선생이 어디 있을 것이며, 답변이 요령 있게 전될되지 못했다 해서 그 잘못을 인정하는 선생이 어디 있겠는가?... 스스럼없이 그 잘못을 인정해야 한다...(그러면)... 나의 가르침은 항상 정확한 것으로 인식되어 학생에게 믿음을 줌은 물론, 그렇지 않은 선생들과 비교됨으로써 더 큰 신뢰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 돋을새김, 185p-


매일 6~7시간을 일을 했지만, 우리 반 30여 명 질문을 모두 받아줄 수 없다. 학생들은 언제나 질의응답에 갈증을 느낀다. 그런 아이들을 위해서 나는 소위 '배달 서비스'를 했다. 몰라서 남겨뒀던 문제들을 나는 말로 설명하지 못할 부분까지 모조리 A4용지에 적어서 그것을 각 반으로 보내주었다. 하나의 수리논술 답안지와 같았다. 말로 설명할 줄간 논리적 설명을 모두 글로 적었으니 말이다. 근무 시간이 아닌 아이들 수업시간에 말끔히 차려입고 나와 해설지를 준비해 배달하곤 했다. 쉬는 시간 아이들을 지나가다 마주치면 인사와 함께 말을 건넸다.


"oo아, 내가 아까 보낸 거 이해했나? 이해 안 되는 부분 있드나?"

 

삐뚤빼뚤 필기와 화살표 찌익찌익 그어가면서 부연설명을 하고 왜 그 한 줄의 풀이가 나와야 하는지, 그 논리적인 생각의 회로까지 모두 적었다. 한 문제를 위해 종이 한 장이 가득 색깔 펜으로 알록달록하게 필기가 되는 것은 예사다. 한 편, 아이들의 입장에서 어떨까? 그것들을 받았을 때 이해를 했고 못했고를 떠나서, 자기를 위해서 그렇게까지 써주는 선생님에 대한 생각이 어떨지.  


다른 사람들이 그저 이면지 혹은 A4용지에 풀이를 휘갈겨서 해줄 때, 그리고 그 종이를 가져가든 말든 별 신경을 쓰지 않을 때, 나는 필요하든 필요하지 않든 무조건 내가 적어준 풀이를 가져가라 주문했다. 아이들의 착각을 방지하기 위해서다. 아무리 즉석에서 설명을 듣고 깔끔하게 이해를 한 것 같아도 막상 반으로 들어가서 다시 생각해보면 종종 기억이 제대로 안 나기 마련이다. 그럴 때 함께 눈으로 보면서 적었던 그 풀이 용지를 가지고 있으면 금방 생각이 나 효과적으로 복습이 된다.

 

워드를 이용해 간단한 양식을 만들어 질의응답 용지를 만들었다. 풀이와 개념 설명, 그리고 주의사항을 메모하는 공간을 나눴다. 뜻있는 학생들이 단권화하기 쉽거나, 혹은 다시 볼 때 좀 더 쉽게 볼 수 있도록 배려했다. 작은 배려를 통해 학생들의 소중한 1초의 시간도 아낄 수 있게 하기 위함이다. 어떤 아이들에겐 스스로 만드는 단권화 노트로 변신했다. 그것들을 모아서 재구성해 새롭게 자기만의 노트를 작성하는 아이들이 생겨났다. 내가 가장 보람을 느꼈을 때다. 수동적 학습이 능동적 학습으로 승격된 것이다.

  

공통점이 무엇일까? 작은 부분을 그냥 지나치지 않고 그들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는 것이다. 남들이 무심코 지나갈 요소들을 자신의 작은 노력으로 얼마든지 채울 수 있다. 약간의 노력이 결국엔 남들과 다른 나만의 독보적인 특징이 되어줄 수 있다. 이는 삶의 모든 요소에 공통적으로 적용된다고 믿는다. 작은 정성과 노력은, 받는 사람으로 하여금 큰 만족감과 행복을 느끼게 해 준다. 당사자가 존중받고 있음을 느끼도록 한다. 바로 그때 비로소 미션을 완수하고 서로의 유대관계까지 굳게 연결되는 것 아닐까.


아이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나의 방법은 정말 간단한 부분에서 시작했다. 사실 그 당시에는 무엇 때문에~무엇을 위해서~라고 생각하고 행동에 옮긴 것은 딱히 없었다. 단지, 이렇게 해줘야 할 것 같아서, 그냥 그렇게 하면 더 좋아할 것 같아서 해주었을 뿐이다.

  


세심한 남편 혹은 아내처럼 다가가 보라. 그것이 꼭 거창하게 편애하라는 것이 아니다. 모두를 위해 얼마든지 실천할 수가 있다. 다만, 본인은 피곤해질 수 있다. 나도 몇 년밖에 일을 해보지 않았기 때문에 그만큼 체력이 남아 있어서 혹은 아직까지는 소위 '약빨이 살아있어서' 가능했을지도 모른다.


엄연한 사실은 나는 그 5주의 과정을 통해 지금까지 함께하는 동생들을 얻었고, 사랑하는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으며, 잠깐의 배려와 정성이 , 지금 내가 얻을 수 있는 가장 큰 위로를 주는 존재들로 돌아왔다는 것을 오늘도 깨닫고 있다. 얼마나 감사하고, 얼마나 가치로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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