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에필로그, 그래서 아이슬란드

아이슬란드 감기 #18

by 김제르
아이슬란드에서 감기에 걸린 건 아니다. 하지만 아이슬란드 바이러스에 감염된 건 맞다. 놀라운 대자연에 몸이 으슬으슬 떨리고 아기자기한 시내에 반해 몸져누울 정도다. 바이러스가 잔뜩 퍼졌는데 아프진 않다. 이건 분명 감기 같은데..
해가 지는 블랙비치


18화 : 에필로그, 그래서 아이슬란드


회사를 그만두고 시간이 생겼을 때, 처음에는 아무것도 안 하고 그냥 시간을 흘려보내고 싶었다. 며칠을 그렇게 허송세월 하다가 여행을 가야겠다 싶었고 아이슬란드를 택했다. 이유는 하나였다. 오로라를 보자는 표면적인 이유도 있었지만, 지금 내가 겪는 이 세상의 척박함보다 더한 척박함과 황량함을 느껴보고 싶었던 것이다. 유명한 관광지를 둘러보고 해변에서 뒹굴뒹굴 시간을 보내는 건 나에게 아무런 자극을 줄 것 같지 않았다. 메마르고 외롭고, 인간미가 없는 어딘가를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차원에서 아이슬란드는 최적의 장소였다. 매서운 바람이 몰아치는 겨울에, 돌과 흙, 눈과 얼음만 있는 자연은 태초의 모습을 보여줄 것 같았다.


척박함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산과 들판


그런 마음으로 도착한 아이슬란드에는 진짜 아무것도 없었다. 하지만 그 ‘아무것도 없음’이 너무나 매력적이었다. 누구도 건드리지 않은 야생 상태 그대로의 자연과 겨울이 주는 진짜 추위는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인류의 탄생 이전으로 온 것 같은 느낌까지 들었다. 척박한 자연은 카메라 프레임에 담기지 않았고, 가끔은 눈에 다 들어오지 않을 정도의 벅찬 장면도 있었다. 내가 어딘가에 있구나 하는 생각이 절로 없어지는, 그야말로 존재감이 사라지는 순간이었다. 오히려 이 아름다운 황폐함에 나의 존재가 인위적인 요소를 만들어 방해가 되지 않을까 하는 미안함까지 들었다.


눈이 녹지 않는 돌산


이곳 자연은 모두 광활하고, 웅장하며, 경이롭고, 위험하다. 폭포나 낭떠러지, 파도가 거센 해변, 빙하 호수에도 안전장치가 따로 돼있지 않다. 그저 ‘위험하다’는 표지판 정도? 예쁜 자연을 더 잘 다듬어서 손님을 받겠다는 게 아니라 최대한 건드리지 않고, 최대한 날 것 그대로를 보존해 최대한 오지 말라고 하는 것 같았다. 당연히 입장료 따위도 없다. 시간이 만들어낸 완벽히 순수한 모습, 그냥 두는 것이 최고의 관리라는 생각, 유지를 위해 편의를 포기한다는 의지, 모든 것이 좋았다. 그런 자연 속에 잠시나마 속해 있었다는 것이 너무 황홀했다.


돌과 얼음, 빙하, 아이슬란드의 겨울


또 혼자만의 여행이었다는 점이 좋았다. 겨울이 아닌 계절에는 렌트를 해서 일행과 함께 다니는 것도 좋을 것 같지만, 겨울의 메마른 아이슬란드는 혼자서 즐기기에 적당히 차갑고 외로웠다. 이 벅참을 누구와 나눌 수 있을까? 입이 떡 벌어질 정도의 장관에 넋이 나가고, 압도적인 자연에 주눅이 들고, 생전 처음 보는 모습에 설렌다. 아마 혼자라서 더 솔직한 심정이 됐을 거다. 물론 이런 솔직함까지 나눌 수 있는 누군가가 있다면 더 완벽했을 거다. 내 심장의 두근거림을 들켜도 좋을 사람이라면 말이다.


스코가포스 위의 돌산


여행에서 돌아온 이후, 누군가 아이슬란드로 간다고 하면 무조건 부러울 거다. 아마 그 사람도 나와 같은 경험을 하게 될 테니까. 보이는 것 모두, 걸을 수 있는 곳 모두, 느낄 수 있는 것 모두를 잊을 수 없게 되겠지. 특별한 명소나 유명한 관광지가 아니라 그냥 아이슬란드 자체에 경도되겠지. 그 설렘을 주체할 수 없어 살짝 눈물이 흐르기도 하겠지. 하지만 또 추워서 정신을 못 차릴 수도 있겠지.


레이캬비크 시청 근처의 석양


분명히 좋을 거다. 아이슬란드는 지금껏 다녀본 여행지들에 비해 훨씬 삭막하고 황폐했지만, 그런 메마른 정서가 밑바닥까지 닿으니 오히려 아름다움으로 승화됐다. 비록 오로라는 보지 못했지만, 또 아이슬란드의 숨은 장소까지 속속들이 다녀보진 못했지만, 여행이 끝난 지금까지도 아이슬란드에 취해 있다. 지독한 바이러스, 이게 바로 아이슬란드 감기인 모양이다.


요쿨살론, 굴포스, 스코가포스, 게이시르, 스나이펠스네스 반도, 그 외 대자연이 만들어낸 여러 흔적들. 그저 보고만 있어도 다른 시대, 다른 세계에 와 있는 것 같았다. 아무 일 없이 레이캬비크 시내를 걷기만 해도, 할그림스키르캬 앞 벤치에 앉아 시간을 때우고만 있어도 그 모든 시간들이 행복했다. 또 완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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