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슬란드 감기 #1
아이슬란드에서 감기에 걸린 건 아니다. 하지만 아이슬란드 바이러스에 감염된 건 맞다. 놀라운 대자연에 몸이 으슬으슬 떨리고 아기자기한 시내에 반해 몸져 누울 정도다. 바이러스가 잔뜩 퍼졌는데 아프진 않다. 이건 분명 감기 같은데..
회사를 그만뒀다. 뭔가 대단한 계획이나 하고 싶은 일이 있어서는 아니다. 회사 일은 재미있었고 계속 하고 싶기도 했지만, 회사 시스템은 납득하기 어려웠고 일보다 사내 정치에만 열을 올리는 구성원들은 한심했다. 일을 하자는 건지 말자는 건지, 일의 성과보다 대표 눈치를 보느라 조마조마해 하는 구성원들을 보고 있자니 회사의 미래가 불 보듯 뻔했다. 자신의 말에 무조건적인 동의를 하라는 대표의 말엔 거부감이 들었고, 몇 마디 말로 내 팀원들을 흔들어 놓는 것도 불쾌했다. 결국 사표를 던졌고 일주일 만에 처리됐다.
나름 괜찮은 연봉에 능력을 인정받으며 크리에이티브를 발휘해왔지만, <타짜>에 나오는 조승우의 대사처럼 늑대새끼가 개새끼 밑에서 일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물론 돈이 필요하고 사회적인 안정감도 필요하지만 자기 신념이나 기준도 지켜내지 못하면서 일을 잘 해보겠다고 하는 건 위선 같았다. 새로운 아이디어로 과감하게 도전하고 그에 대한 냉정한 평가를 받아야 하는데, 아집과 권위로 가득한 사람의 눈치를 보고 그에 맞게 처신을 바꾸는 사람들 사이에서 무슨 일을 할 수 있겠는가?
하지만 막상 회사를 그만두니 막막하긴 했다. 정해진 미래따윈 없었으니까. 같이 회사를 다니던 사람들은 ‘부럽다’고 했다. 하긴 그런 회사에서 자신의 시간을 낭비하고 있는 그들이 안쓰럽기도 했지만 한편으론 매월 따빡따빡 들어오는 월급이 그립긴 할 거다. 하지만 이제서야 비로소 나는 내 시간을 내 의지대로 쓸 수 있게 됐다. 누구의 탓도 하지 않고 내 인생을 오롯이 내 생각대로 할 수 있는 상황을 만들어낸 것이다. 비록 경제적인 부담은 따랐지만 이제야 내 삶의 진짜 주인이 된 것이다.
책을 읽고 영화를 보고 여유로운 시간도 즐겼지만 구심점이 필요했다. 여행을 떠날까? 지금까지 12개국 43개 도시를 다녔지만 이번에는 좀 더 특별한 장소에 가고 싶었다. 그래서 아이슬란드 레이캬비크, 시베리아 횡단 열차, 캐나다 동부 일주의 3가지 여행을 떠올렸다. 인생의 고난기에 어울리는 적잖게 어려운 여행이 지금의 나에게 득이 되지 않을까도 싶었다. 한달 일정으로 제주도 올레길을 걸어볼까? 2달 정도 베트남에서 살아볼까도 싶었지만 뭔가 더 임팩트 있는 여행을 하고 싶었다.
우선 시베리아 횡단 열차 유경험자들은 “심심해서 죽을 수도 있다”고 했다. 시간은 많은데 달리 할 일이 없다고. 말도 잘 안 통해서 친구를 사귀기도 힘들고, 창 밖으로 풍경을 보는 것도 하루 이틀이면 심드렁해진다고 했다. 책을 좋아하긴 하지만 횡단 열차까지 타면서 책과 잠만 반복하는 건 아니다 싶었다. 캐나다 동부 여행 역시 동부만 찍고 오는 게 아니라 미국이랑 연계해 일주를 하는 것이 유용하다는 의견이 지배적이었다. 긴 여행에는 긴 계획이 필요했지만 다소 즉흥적인 나에게 그런 치밀함은 없었다.
그래서 아이슬란드 레이캬비크로 정했다. 발음도 마음에 들었다. '레.이.캬.비.크.' 뭔가 진짜 멀리 여행을 가는 기분이 들었다. 겨울이라 날씨 변화가 심하고, 해도 엄청 짧고, 찬바람마저 사정없이 분다고 했지만 오로라를 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 레이캬비크에 갈 이유는 충분했다. 아이슬란드 여행은 크게 2가지 방법이 있다. 차를 렌트하여 링로드를 달리는 것과 투어 버스를 이용하는 것. 나는 겨울임을 감안해 투어 버스를 선택했다. 비록 레이캬비크를 거점으로 하기 때문에 아이슬란드 전체를 다니지 못하고, 원하는 곳을 원하는 시간 동안 볼 수 없는 단점도 있지만 안정적이었다. 아이슬란드는 관광산업이 꽤나 발전한 곳이라 시스템이나 서비스가 좋다는 점도 결정에 한 몫 했다.
그렇게 마음을 먹고 레이캬비크에 대해 조금씩 알아보기로 했다. TV 프로그램 <꽃보다 청춘>에서 아이슬란드가 소개돼 관련 내용이 많았지만 그 프로그램을 다시 볼 정도의 정성은 없었다. 그보다는 그곳의 압도적인 자연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방향으로 여행을 준비하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