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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쓰는 엠지MZ대리 Jan 12. 2023

#001 대기업 취업


커다란 팝콘을 좋아한다. 맛있어서가 아니라 푸짐해서. 긴 팔을 크게 감아 끌어안을 만큼 커다란 팝콘이, 정확히는 팝콘통이 좋았다. 어김없이 예매한 영화티켓을 들고 스낵 가판대에서 팝콘을 받아 들 때, 스마트폰이 울렸다. 그가 오는 주말에 만나자고 했다. 씁쓸함과 달콤함이 애매하게 섞인 느낌이었다.



그는 나의 21번째 신입공채 도전이자 다섯 번째 면접 자리에서 만난 사람이다. 모 그룹 1차 면접에서 긴장감으로 인해 지나치게 밝았던(정확히는 밝은 척을 했던) 나는 나에게 말을 걸어온 같은 지원자에게 지나치게 밝게 대답을 했고, 그 밝음(정확히는 밝은 척함)이 그에게 용기를 내도록 만들었다. 그는 "2차 면접을 함께 준비하자"라는 뻔한 명분으로 나의 연락처를 받아갔다. 우리는 사이좋게(?) 1차 면접에 합격했으나, 그가 말하는 2차 면접 준비는 함께하지 않았고, 대신 그 사이에 데이트를 한번 하고, 2차 면접을 보고, 또다시 데이트를 했다. 그리고, 나는 면접에 최종 탈락했고 그는 최종 합격하여 해당 그룹의 신입사원이 됐다.



승리자가 패배자에게 데이트를 신청했다. 나는 한쪽 팔엔 팝콘을 다른 한쪽엔 콜라를 들고선 빨대로 한 모금 쪽 하고 마셨다. 주말에 만나자고, 그러자고 답장을 했다. 팝콘을 끌어안았지만 금세 마음이 홀쭉해진 기분이었다. 하지만 결국 다음 만남은 없었다. 그를 계속해서 만나는 일은 나의 실패, 또 한 번의 실패를 계속 마주하는 일 같았기 때문이다.




'이번만 통과하면 백수 탈출'과 '이번에도 떨어지면 정말 '빼박' 백수' 사이에서 아슬아슬 가슴을 졸이던 줄타기도 끝났다. 때마침 두 번째 인턴계약도 만료되었다. 나는 이제 받아들여야 했다. 내가 가장 두려워했던 삶을 살아내야 했다. 나는 또 한 번의 취업 도전에 실패했으며, 완전하게, 더 이상 도망칠 곳 없이, 순수한 백수의 신분이 되어야 했다.



스무 살 대학입학과 동시에 기숙사에서, 인턴 생활을 하느라 타지에서, 도합 5년을 나가 살았던 나는 다소 면목없는 상태가 되어 본가로 들어갔다. 오랜만에 본가에서 지내려니 이래저래 두려웠는지 아니면 그저 면목이 없어 민망했는지 나는 가족들에게 기대어 위로를 받는 대신 큰소리로 엄포를 놨다. "내 방은 앞으로 닫아둘 것"이며 "방문이 필요하면 반드시 노크를 하라"는 식의 말들이었다. 나는 실패를 전혀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었다.



두려웠다. 이대로 영영 취업하지 못할까 두려웠고, 쓸만한 구석이라곤 전혀 없는 인간이 될까 봐 두려웠다. 밥벌이를 하지 못할까 두려웠고, 가족에게 보탬이 되지 못할까 두려웠다. 동시에 강렬하게 원했다. 취업을, 고액 연봉자가 되기를, 가족에게 보탬이 되기를. 하지만 세상 대부분의 일이 그렇듯 마음보단 실행이, 조급함보단 시간이 필요했다. 나에겐 당장 살아내야 할 매일매일의 하루가 있었다. 무너지지 않고 버텨야 했다. 버틸 수 있는 건 하루를 구성하는 일과라고 생각한 나는 하루 일정표를 짜기 시작했다. 아침엔 운동을 하고, 점심엔 카페에 가서 이력서를 쓰고 공부를 하고, 도서관에 가서 책을 읽고, 저녁엔 집안일을 도와드리고 밤이 늦기 전에 재빨리 잠든다. 우울이 찾아올 틈을 차단한다. 듣고 싶지 않은 말을 상대가 발설할 기회를 차단하기 위해 쉼 없이 말하듯, 일과를 만들어 하루를 촘촘히 채웠다. 그렇게 애쓰며 우울을 차단하고 있었지만, 우울을 차단함과 동시에 스트레스도 갈 곳을 잃고 마음 한편에 촘촘히 쌓여갔다.



어느 날, 아침이었는지 저녁이었는지 기억나지 않는 날에 화장대 거울 앞에서 로션을 바를 때였다. 어쩐 일인지 엄마와 조금 입씨름이 붙었고 나는 빽 하고 소리를 질렀다. 평소 웬만해선 목소리를 높이는 일이 없는 엄마도 덩달아 언성을 높였다. "그러니까 힘들면 가족한테 좀 기대면 되잖아!" 엄마의 소리침에 아주 짧은 정적이 흘렀고, 그다음 내가 기억하는 장면은 엄마한테 안겨 목놓아 엉엉 울던 내 모습이다.



나는 실패했다. 하지만 그 실패로 인해, 더 정확히는 실패 후 얻은 시간을 통해 어떠한 신분으로도 규정되지 않고 혼자서 하루를 살아가는 방법을 배웠고, 가족에게 기대는 방법도 배웠다. 나중에 취업이 된 후 종종 생각한다. 만약 그때 내가 실패 없이, 대학 졸업 후 공백 없이 취업이 되었다면 어땠을까. 아마 나는 지금보다 좀 더 재수 없고, 독립적이지 않고, 따뜻하지 못한 사람이 되었을 것 같다. 다시는 돌아가기 싫을 만큼,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힘든 시절이었지만, 그 시간이 나를 서서히 데웠던 시간임을 결국 인정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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