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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쓰는 엠지MZ대리 Jan 12. 2023

#002 대기업 퇴사


부쩍 거절을 잘하기 시작했다. "아니요. 그건 못할 것 같은데요." "아니요. 그건 말이 안 되는 계획 같아요." "아니요. 실행 가능성이 낮아 보입니다." 그날도 거절을 잘한 하루 중 하나였다. 상무님에게 왜 프로모션을 진행할 수 없는지 잔뜩 설명하곤 회의실 문을 열고 나왔다. 말도 안 되는 억지를 부리는 게 아니었다. 마침내 실무자로서 마땅히 해야 할 말을 적절한 타이밍에 하게 된 것이다. 갑자기 왜 거절을 잘하게 되었을까?



퇴사를 결심했기 때문이다. 입사 후 6년 만에 처음으로 '우리' 회사가 아닌 다른 곳에 이력서를 제출한 바로 다음 날이었다. 평소와 다름없이 사무실에 있는 데도 괜히 눈치를 봤다. '내가 이직 결심한 걸 들키면 어쩌지?' 하는 마음이었던 것 같다. 부모님 세대가 보면 코웃음을 칠지 모르겠으나, 6년이란 꽤 긴 시간이었다. 그 시간 동안 동안 이직 결심 한번 하지 않았을 만큼 애사심을 갖고 생활한 곳이었다. 80명 가까운 공채 동기들이 하나 둘 떠나가고 절반이 넘는 인원이 조직을 떠나는 동안에도 흔들리지 않았던 나였다. 오히려 나는 주어진 자리에 감사했다. 성장을 하더라도 이곳에서 하고 싶었다. 그토록 굳고 단단했던 마음이 언제부터 흔들리기 시작했는지 모르겠다. 보직을 바꾸고 격무에 시달리면서부터인지, 자차와 셔틀버스라는 복지를 버리고 대중교통 통근을 선택하고부터 인지, 경영진과 더욱 밀접한 위치에서 일하게 되며 보게 된 조직의 민낯 때문인지, 맞지 않는 동료와의 갈등 때문인지. 어쩌면, 책을 읽고 세상을 보고 글을 쓰며 머리를 키웠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계기보다 중요한 건, 내가 이미 조직을 떠나기로 마음을 정했다는 사실이었다.



이력서를 제출한 직후에는 팀원들을 보는 것이 껄끄러웠다. 마음속에 주홍글씨를 품고 있고 그것을 들킬까 봐 초조하기도 했다. 동시에, 나를 짓누르는 많은 것들로부터 다소 해방감을 느꼈다. 뜻이 맞지 않는 동료로부터, 회의감을 지울 수 없던 수많은 업무로부터. 어쨌든 나는 주어진 일을 하고 있지만, 이전만큼 애정과 열정으로 이끌어 갈 수 없음을 느끼기 시작했다. '어떻게든 되게 만들자'라는 생각에서 '마땅히 해야 할 만큼을 하자'라는 생각으로 바뀌었다. 그즈음, 회사로부터 특별 인센티브 대상자라고 통보를 받았다. 인센티브는 연봉의 10퍼센트를 1년 동안 월급으로 나눠주는 것이었는데, 그 특별대우가 달갑지 않았던 이유는 내가 곧 퇴사하기로 마음먹었기 때문이었다. 어떤 식으로든 인센티브가 녹아 있었을 월급 내역을 한 번도 제대로 보지 않았다. 회사는 더 이상 내가 원하는 것을 줄 수 있는 조직이 아니었다.



첫 번째로 제출했던 이력서는 보기 좋게 물을 먹었다. 하지만 첫 번째 이직 도전이 실패했다고 해서 정말로 실패를 한 건 아니었다. 그건 내가 변화를 결심했다는 일종의 신호였다. 나는 단순히 '퇴사'를 하겠다고 결심한 것이 아니라, 방향키를 놓친 내 삶의 핸들을 붙잡고 싶었다. 첫 번째 이력서를 쓰고 나니 두 번째, 세 번째는 어렵지 않았다. 더 이상 동료들을 보는 것이 껄끄럽지 않았고, 뭔가를 숨겨야 하는 사람처럼 굴지도 않았다. 나는 차근차근 퇴사 준비를 시작했다. 대기업 복지를 믿고 해지했던 실손 의료비 보험 같은 것들에 다시 가입했고, 신용대출을 정리했고, 만료된 공인인증 영어시험을 치러서 갱신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한 가지, 회사 밖에서 멘토를 찾기 시작했다. 늦여름으로 뜨겁게 달궈진 강남대로의 아스팔트 위 수많은 마천루 가운데 한 곳에서 나의 글쓰기 스승을 만났다. 그동안 혼자 보기 식으로의 글을 써오던 나를, 스승은 보다 제대로 된 글쓰기의 세계로 인도해 주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약 스무 명의 문우(글쓰기 친구)들을 만났다. 그중에는 내가 올바른 퇴사 결정을 내리도록 도와주신 은인들도 포함된다.



퇴사는 실패가 아니라 변화를 결심한 증거의 행동이었다. 그 행동을 시작으로 내 삶의 방향키는 다시 내 손에 들어왔다. 종종 핸들을 쥐고 흔들리기도 하지만 말이다. 자전거를 제대로 타기 위해선 핸들을 종종 흔들어줘야 한다. 꽉 잡고만 있으면 넘어지기 십상이다. 나는 이제 안다. 흔들림은 잘 달리기 위한 필요충분조건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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