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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쓰는 엠지MZ대리 Jan 12. 2023

#003 재입사


난 항상 빠르고 싶었다. 아니, 남들 보다 한 발 앞서고 싶었다. 단순히 이기고 싶은 마음 때문은 아니었다. 나에게 자신 없기 때문이었다. 내가 충분히 똑똑하고 잘났다고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속도라도 내보려고 했다. 한발만큼만 앞선다는 건, 후에 한발만큼 뒤쳐져도 괜찮을 만큼의 시간은 번 셈이니까.  



사실 내 삶은 이미 조금 빨랐다. 90년대 1월에 태어난 나는 흔히 말하는 '빠른 년생'으로 초등학교를 일곱 살에 입학했다. 수능을 앞둔 어느 해 11월 어느 날 밤을 또렷이 기억한다. 이미 수시전형으로 세 곳의 대학에 합격한 상태였던 나는 수능에서 최저등급만 받으면 되었다. 평소처럼만 시험을 치른다면 불합격할 리가 없었다. 그런데도 나는 밤새 잠들지 못하고 뒤척였다. 그리고 이런 생각을 했다. '이번에 대학에 못 가도 괜찮아. 나는 빠른 년생이잖아. 1년 재수해도 학교 늦게 들어갔다고 하면 돼.' 그렇게 스스로 위로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을 만큼 초조하고 불안했다. 다행히 수능은 평소만큼 치렀고, 대학에도 안정적으로 입학했다.  



하지만 내 조급함은 조금도 줄어들지 않았다. 오히려 더 심해졌다. 3년 과정인 중고등학교에서는 항상 2학년이 되어서야 정신 차리고 공부를 했었다. 그래서 내 성적에 대한 불만이 있었는데, 대학에서는 1학년부터 잘해보고 싶었다. 월드컵도 마다하고 밤을 새우며 공부했지만 나는 계속해서 초조하기만 했다. 역설적으로 처음부터 잘하고 싶었던 나는 1학년부터 열심히 달린 덕분에 정작 2학년이 되었을 땐 번아웃이 되었다. '이렇게 공부한다고 성공할 수 있을까?' 회의감에 공부에 집중하기 어려웠다. 2학년에 찾아온 번아웃은 나를 잠시 멈추게 하기보다 오히려 더 서두르게 만들었다. 나는 이 초조함을 학업 대신 다른 것에 쏟기 시작했다. 쉴 새 없이 멘토를 찾고 뛰어다니며 학교 밖으로 다니기 시작한 것이다. 그 과정에서 여러 경험을 할 수 있었고, 이른 나이인 22살에 남들이 선망하는 기업에서 인턴을 하며 실무 역량을 쌓았다. 이러한 멈춤 없는 속도 덕분에 24살에는 꿈에 그리던 대기업에 입사했다.  



나는 계속해서 남들보다 한 발 앞서는 것에 성공했다. 따라잡을 수 없을 만큼치고 나갈 능력은 없었지만, 내 마음속의 잠들지 않는 초조함을 달랠 정도만큼은 앞섰다. 그리고 이 정도라면, 이대로 쭉 살아간다면 괜찮을 줄 알았다. 하지만 내가 계산하지 못한 것이 하나 있었다. 이런 나도 지칠 수 있다는 걸, 멈춰야만 할 수도 있다는 걸 몰랐던 것이다.  



서른, 직장생활 만 6년을 채우지 못하고 돌연 퇴사했다. 2년 차 대리였다. 이직도 아니고 학업도 아니었다. 아무 계획 없이 백수를 택했다. 아니면, 백수를 택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너무 지쳤고 어떤 것도 해낼 의지와 에너지가 없었다. 1년이 조금 모자란 백수 생활, 다시 일할 준비가 되었다고 느낄 때 즈음 다시 직장인이 되었다. '대리' 대신 (중고) 신입사원의 타이틀로 말이다.  



서른 살에 다시 신입사원이 됐다. 이제 더는 앞설 수 없다. 적어도 수치상으로는 그랬다. 완전하고 완벽하게 늦깎이 신입사원이 됐다. 빠른 년생 카드를 써도 한참 늦었다. 그리고 나는 왠지 안심했다. 이제는 속도가 중요한 삶이 아니라 의미가 중요한 삶을 살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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