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 공간 이야기
《호암미술관》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포곡읍 에버랜드로 562번 (feat. 니콜라스 파티 : 더스트 Nicolas Party: Dust)
제 글을 좀 읽어 온 분들은 아시겠지만, 저는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을 좋아합니다. 이유는, 전시와 정원이 함께 있어서요. 비중도 딱 반반이라 같은 돈을 주고 봐도 뭔가 더 얻어온 기분이고, 무엇보다 국립기관이라 전시 큐레이션 수준은 유지되면서 관람료가 저렴하고요. 사실 거리는 먼 데, 평일에 가면 무료 셔틀로 환승 부담 없이 편하게 다녀올 수 있어 심리적, 물리적 거리가 더 가까워졌어요. 그래서 일 년에 세, 네 번은 꼭 갑니다 분기별로. 보통은 혼자 다녀오는데, 좋아하는 사람과 함께 갈 때도 있어요.
그다음으로 좋아하는 곳이 오늘 소개할 호암미술관입니다. 너무 좋죠, 가까이에 있으면. 근데 운전해서 가도 멀고 대중교통을 타면 더 머니 자주 가게 되진 않더라고요. 그러다 최근 꼭 보고 싶은 전시를 오픈해서 다녀왔습니다. 다녀온 지는 좀 되었는데 여유 있는 날에 써야겠단 생각으로 나름 아껴둔 아이템입니다. 아, 여기도 왕복 셔틀이 있습니다. 전시 기간 동안 평일 하루 2회 운영하는데 리움미술관 왕복이라 편하기도 하고 안에 직원분이 동승해서 불편 사항은 바로 처리해 주셔서 좋아요. 탑승은 무료이지만 홈페이지에서 사전 예약을 꼭 하셔야 해요.
호암미술관은 1982년 4월에 개관한 사립미술관입니다. 삼성그룹 창업자인 호암 이병철 선생이 30여 년에 걸쳐 수집한 한국미술품을 바탕으로 설립됐죠. 호암미술관은 전시장 건물과 전통정원 희원으로 구성되는데, 미술관에 들어가려면 희원을 거칠 수밖에 없는 구조라, 미술관 권역 입구에서 입장권을 구매 및 확인받으셔야 진입이 가능합니다. 온라인으로 티켓을 미리 구매하셨다면 QR 확인을 받은 후에 들어가면 되고요. 미술관 권역으로 진입하면 티켓을 검사하는 곳은 없습니다.
호암미술관 전시실로 가는 길엔 전통정원 희원 영역의 일부를 지나게 됩니다. 올라가는 길부터 조경이 멋있어서 당장 더 깊숙하게 나있는 정원길로 선회하고 싶더라도 꾹 참고 전시장까지 먼저 가셔야 해요. 전시 관람에 시간이 많이 필요하거든요.
전시장은 권역 내 나름 가장 높은 곳에 있는데, 입구에 서서 맞은편 산을 바라보는 뷰도 꽤 멋있어요. 제가 갔을 땐 산 색이 가을빛보단 여름에 가까웠는데, 가을 경치를 보고 싶다면 10월 말이나 11월 초에 가면 딱 좋을듯해요. 이땐 성수기라 차 막힘과 인파는 감수하셔야 합니다.
현재의 호암미술관 건축은 2023년 리노베이션을 한 버전입니다. 외관 틀은 그대로, 서로 꿰뚫어 들어감을 뜻하는 '상호관입(相互貫入)'을 공간개념으로, 기존의 건축 소재와 조화를 이루도록 돌(석재), 나무(목재), 철(금속)을 최소한 가공해 사용했다고 하죠. 과거와 현재, 외부와 내부, 건축과 사람 그리고 자연이 유연하게 연결되는 공간을 지향했다는데, 확실히 예전에 비해 동선 이동이 더 편해진 건 있어요. 예전 건축 공간 내부가 좀 더 딱딱한 느낌이었다면, 단단하고 딱딱한 물성을 지닌 재료들로 구성된 공간이지만 지금은 관람객이 공간 이리저리 물 흐르듯 돌아다닐 수 있거든요. 일정 부분에서는 청와대 본관 분위기도 짙은데, 이건 두 곳을 다 다녀오면 바로 아실 거예요.
내부 공간에선 로비 우측 막힌 공간을 인포메이션으로 꾸민 게 가장 큰 변화인데, 이로써 확실히 관람객 이용 편의성과 공간 개방감이 좋아졌어요. 전시 영상을 보면서 쉬어갈 수도 있고요. 2층 라운지도 창호를 확장해 미술관 앞 산의 풍경을 '차경(借景)'할 수 있게 했는데, 너무 멋진 공간이라 하루 종일 앉아 있어도 질리지 않겠더라고요.
1, 2층은 전시 공간에선 《니콜라스 파티: 더스트 Nicolas Party: Dust 》전이 진행 중입니다. 2025년 1월 19일까지라 볼 시간은 넉넉한데, 이미 보고 간 사람이 많습니다. 애호가들이 좋아하는 예술가이고 기다렸던 전시거든요. 국내에 니콜라스 파티의 작품이 소개된 적은 있지만 대규모(기존 회화 및 조각 48점, 신작 회화 20점, 특별 제작 파스텔 벽화 5점)로 소개된 건 처음입니다. 게다가 이 전시를 위해 6주간 특별히 제작한 파스텔 벽화는 이 전시 후엔 폐기되니, 무조건 보는 게 맞죠.
니콜라스 파티는 1980년생으로 스위스 로잔 출신입니다. 현재는 뉴욕에서 활동하고 있어요. 유년 시절부터 그라피티를 체험했고, 대학에선 영화, 그래픽 디자인, 3D 애니메이션을 전공했어요. 아티스트 그룹을 결성해 미술, 음악, 퍼포먼스가 융합된 전시와 공연을 만들기도 했고요. 그는 '미술사'에서 작품의 영감을 받는데, 고대부터 근·현대를 아우르는 미술사의 다양한 작가, 모티브, 양식, 재료 등을 자유롭게 참조하고 샘플링해 그만의 독자적인 이미지를 만들고 있죠. 그의 작품은 18세기 유럽에서 유행한 파스텔을 주 재료로, 그가 파스텔로 그린 풍경, 정물, 초상 같은 회화의 전통 장르는 현대적으로 재해석되어 관람객에게 오묘한 시각적 느낌을 줍니다.
이번 전시 제목은 먼지, 티끌, 분진을 뜻하는 '더스트 dust'로, 파스텔이라는 재료가 지닌 연약한 속성을 전면에 드러내며 영속적이지 않은 재료라는 점을 더 부각하고 있죠. 작가는 파스텔화를 ‘먼지로 이루어진 가면(mask of dust)’이라 말하는데, 존재했지만 곧 사라질 이 모든 것들이, 인생, 문명, 자연 같은 주제로 확대되면서 존재와 부재, 생성과 소멸 등에 대한 사고의 폭을 더 확장시켜 줍니다.
근데 현장에서 봐도 '이게 파스텔이라고?'반문이 들 정도로 정교하고 밀도 있게 처리되어서 누군가 이게 파스텔이라고 하기 전까진 믿기 어려워요. 유튜브에 파스텔 작업하는 자료가 많이 있으니 그의 작업 방식이 궁금한 분들은 찾아보시고요.
그렇다고 정말 파스텔화인지 확인하려 작품 가까이 가진 마세요. 바닥에 안전 라인이 표시되어 있진 않지만, 작품 가까이 가면 경보 소리가 납니다. 소리가 크지 않아 '나는 아니겠지?'란 생각이 드는데, 아마도 본인이 맞을 겁니다. 생각보다 좀 멀리서 보셔야 센서에 걸리지 않고 볼 수 있어요. 저도 떨어져서 본다고 봤는데, 센서가 울리더라고요. 흠...
최근에 어린이 관람객이 핸드폰을 보다가 전시 작품에 부딪혀서 작품에 손상이 간 일이 있었어요. 지금은 보수 후 전시 중이라고 들었는데, 니콜라스 파티의 작품은 기본이 '억'단위입니다. 주의하셔야 해요.
이 전시엔 리움미술관의 고미술 소장품이 니콜라스 파티의 작품과 함께 전시되고 있습니다. 생명 탄생과 예술의 기원을 담은 파스텔화 '동굴' 앞엔 조선시대 '백자 태호'가, 지구상에서 멸종된 종을 손바닥 만한 동판에 온순하고 평화로운 모습으로 담아낸 '공룡' 연작 곁엔 '청돔 운룡문 운판'이 있어요. 또, 장생과 불멸의 염원을 담아내는 조선시대 '십장생도 10곡병'과 김홍도의 '군선도' , ‘목숨 수(壽)’자를 굴곡진 늙은 송백(松柏)의 형상으로 구현한 정선의 '노백도' 등 우리 미술 명작들이 니콜라스 파티의 현대회화와 잘 조응하고 있죠. 이 작품들은 리움 전시에도 여러 번 봤는데, 볼 때마다 너무 대단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특히, 정선의 '노백도'는 진짜 유일무이한 회화 작품입니다.
우리 고미술 작품들은 그 안에 담긴 다양한 상징이 샘플링되어 니콜라스 파티 신작 초상 8점 안에 등장하고 있어요. 보다 보면 '이건 좀 동양적인데?'라고 느껴지는 작품들이 있는데, 그 곁에 원작이 함께 하고 있는 거죠. 상징적 요소들만 반영되어 있으니 세심하게 관찰하다 보면 어떻게 표현되고 있는지 알아챌 수 있을 겁니다.
그 외에도 유럽 중세 건축의 모티브인 회랑, 아치 문, 마블 페인팅(faux marble)을 활용하여 각기 다른 색의 방과 방을 연결하는 특별한 경험도 할 수 있습니다. 이번 전시는 호암미술관의 1층과 2층이 동일한 구조로 구성되었거든요.
전시 기간 중엔 무료 오디오 가이드(큐피커)도 있고, 매일 오후 2시, 4시에 전시 설명 도슨트(50분)도 들을 수 있습니다. 11월 3일까진 매일 오후 1시, 3시에 전통정원 희원 도슨트(30분)도 운영되니 참고하시고요.
전통정원 희원은 1997년에 개원했어요. 한국 전통정원의 멋을 잘 보여주기에 이 정원만 보러 가는 분도 많습니다. 물론 정원만 보셔도 입장료는 내셔야 해요. 전시 관람 비용을 내면 희원은 그냥 보실 수 있고요.
정원은 관람 동선이 따로 정해진 건 아니라서 자유롭게 보면 됩니다. 발 닿는 곳마다 풍경이 달라져 여러 번 돌아도 좋은 공간이에요. 운이 좋으면 공작도 만날 수 있습니다. 희원 연못엔 관음정(觀音亭)이란 정자가 있는데 여기엔 장 미셸 오토니엘의 작품 '황금 연꽃'도 있으니 놓치지 마시고요. 곳곳에 우리 석조·목조 예술품도 있으니 챙겨보시고요.
리움미술관에 있던 루이스 부르주아의 큰 거미 작품 '마망'도 현재 이곳에 있습니다. 엄밀히 말해 외부 진입로 권역에 있어요. 주 도로에서 좀 떨어진 공간에 있는데, 워낙 큰 조형물이다 보니 미술관 권역에서도 각도마다 다른 인상을 주죠. 볼수록 여기 온 게 더 낫다는 생각이 들어요, 어쨌든 모티브가 자연물이니.
예전에 찻집이었던 공간은 현재 프로젝트룸으로 사용 중입니다. 다양한 공간으로 활용하는데, 이번 전시 기간 동안엔 카멜커피와 협업해 전시와 연계한 특별 메뉴와 호암미술관 로고를 활용한 다양한 굿즈들을 판매하고 있습니다. 가격이 싸진 않고 굿즈 종류도 많진 않지만 주차장 판매기를 제외하고는 유일하게 음료나 간식을 구매할 수 있는 공간이라 한 번은 들르게 됩니다. 은근 갈증 나고 허기지거든요, 돌다 보면. 호암미술관 권역에선 외부 음식물 반입이 안됩니다. 여러모로 가기 전에 배를 좀 채우고 가는 게 제일 좋겠죠.
좋은 건 금방 지나가잖아요, 대개. 이번 가을도 아주 짧게 지나갈 듯합니다.
그러니 바쁘더라도, 가을이란 계절이 주는 장점들을 온전히 다 느끼고 겨울을 맞이하길 바랍니다. 어쩐지 이번 겨울도 꽤 길고, 추울 것 같거든요.
그 긴긴 겨울을 나기 위한 따뜻한 추억들, 틈틈이 많이 저장하자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