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 이야기
영화 《패스트 라이브즈 Past Lives 》, 전생의 첫사랑과 작별 인사를 하다
오늘은 가을이란 계절과 잘 어울리는 영화 한 편을 소개드립니다. 보고 싶던 영화였는데 극장 개봉을 놓쳤고, 후에 봐야지 했는데 못 보다가 얼마 전에 봤어요. 큰 화면으로 좀 더 몰입감 있게 봤으면 더 좋았겠다 싶던 영화였어요.
영화를 보기 전엔 '어렸을 때 헤어진 이성 친구를 성인이 되어 다시 만나는 이야기' 정도로만 생각했는데, 보고 나니 '인연'에 대한 이야기더라고요. 담백한 데 와닿는 게 많은, 그래서 두 번 본 영화입니다.
영화는 바에 앉은 세 명의 남녀를 바라보는 타인의 대사로 시작합니다. 화면엔 등장하지 않지만 누군가 그들을 바라보며 동양인 남녀와 서양인 남자가 어떤 관계일까에 대해 추측하는 대화가 그들의 모습과 겹쳐지죠. 첫 신(scene)인데, 이들의 관계를 모르는 타인의 눈에는 그들의 말처럼 다양하게 보일 수 있겠더라고요. 개인적으로 영화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신으로, 영화의 내용을 압축적으로 담고 있습니다.
이야기 도중 중앙에 앉은 여성이 화면을 응시하며 '자신들의 관계를 알아맞혀 보라는 듯' 관객과 눈 맞춤을 하는데, 그 장면 이후부터 그들의 과거 서사가 본격적으로 펼쳐집니다.
24년 전 12살 소년 해성과 나영이는 같은 반 친구였습니다. 반에서 1,2위를 다투면서도 꽤 사이가 좋았죠. 그리고 서로에게 표현하진 않았지만 서로의 첫사랑이었고요. 나영이네는 캐나다 토론토로 이민을 준비하고 있었는데, 이민을 가기 전 딸에게 좋은 추억을 만들어 주고 싶은 엄마가 해성과 나영의 데이트를 주선합니다. 당시 나영이가 커서 결혼하고 싶던 대상이 해성이었거든요. 그렇게 마지막이 된 데이트를 둘은 알차게 합니다. 장소는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이더라고요, 제가 좋아하는.
데이트 이후 더 가까워진 둘 사이는 나영이네 이민이 가까워지며 멀어집니다. 게다가 해성이는 나영이네의 이민 사실을 교실에서 아이들이 하는 말로 전해 들었고, 이에 충격을 받은 듯했죠. 매일 같이 하던 하굣길 갈림길에 서서, 해성은 별다른 말없이 "야, 잘 가라" 하며 나영이를 보냅니다. 그렇게 둘은 헤어져요.
12년 후, 나영과 해성은 SNS를 통해 다시 만납니다. 뉴욕에서 노라라는 이름으로 살고 있는 나영이가 한국 친구 소식이 궁금해 SNS를 검색하다, 해성이가 자신에게 연락하기 위해 노라의 아버지 SNS에 몇 달 전에 남긴 포스팅을 보게 된 거죠. 극 중 나영이의 아빠는 영화감독이고 엄마는 그림을 그리는 사람으로 묘사됩니다.
재밌는 건, ' 패스트 라이브즈'의 감독인 셀린 송(Celine Song(송하영), 1988~)의 아버지 역시 영화감독입니다. 송강호라는 배우를 대중에게 각인시킨 영화 '넘버 3'(1997)를 연출한 송능한(1959~) 감독이죠. 송능한 감독은 데뷔 전부터 시나리오 작가로 잘 알려졌는데, 각색으로 참여한 작품이 '꼴찌부터 일등까지 우리 반을 찾습니다'(1990)이고, 작가로 참여한 작품이 '태백산맥'(1994), '넘버 3'(1997), '세기말'(1999) 등입니다. ' 넘버 3'는 송능한 감독의 데뷔작으로, 이 영화에는 한석규, 최민식, 이미연 등이 출연했고, 조연으로 출연한 배우 송강호의 강렬한 연기는 지금까지 대중에게 회자되고 있죠.
영화 '넘버 3'는 대중적 인기와 평단의 호평을 모두 받은 작품입니다. 1997년 18회 청룡영화상에서 남우조연상, 신인감독상, 각본상을, 35회 대종상 영화제에선 신인 남자배우상을 수상했고, 1998년 34회 백상예술대상에서 영화 시나리오상, 21회 황금촬영상 시상식에선 촬영상-은상을 받았으니 상복도 많았고요.
그의 딸인 셀린 송의 '패스트 라이브즈'(2023) 역시 영화감독 데뷔작으로, 각본 역시 셀린 송이 썼습니다. 자전적 이야기가 담긴 영화로, 2023년 상영 이후 숱한 영화제에서 작품상, 감독상, 각본상, 여우주연상 등 수상이 끊이지 않았죠. 수상은 불발되었지만 제96회 아카데미 시상식 최우수 작품상, 각본상 후보에 올랐고, 제81회 골든 글로브 시상식에도 드라마 작품상, 감독상, 각본상, 드라마 여우주연상, 비영어 영화상 후보였고요. 제96회 아카데미 시상식 작품상과 각본상 부문에 노미네이트 됐을 땐, 아시아계 여성 감독으론 최초였고, 역대 아카데미 후보 중 감독 및 작가의 장편 데뷔 작품이 작품상과 각본상에 동시에 후보로 오른 것도 처음이었다고 해요.
그렇게 극 중 '넘버 11'이라는 이름으로 운영된 아버지의 페이스북 계정에서, 노라는 해성의 흔적을 발견했고 둘은 페이스북을 통해 서로를 확인한 후 스카이프로 12년 만에 재회하게 됩니다. 그 후 랜선을 통해 일상을 공유하며 서로의 현재를 알아가게 되고요. 그렇게 한동안 행복한 시간을 보내죠, 각자가 속한 곳에서 랜선을 통해 지난 추억과 현재의 이야기들을 공유하면서.
하지만 이런 시간들이 오래가진 못합니다. 사소하게는 인터넷 연결 장애부터 시차, 각자의 미래에 대한 고민, 물리적 거리까지 이들에겐 장애물이었으니까요. 서로가 보고 싶고 그립지만, 24살의 연극 극작가인 노라와 공학도인 해성에겐 미국과 서울이라는 물리적 거리는 멀었고 현재의 삶도 소중했으니까요.
결국, 둘은 다시 이별하게 됩니다.
노라가 먼저 말을 꺼냈죠.
"난 이민을 두 번이나 해서 뉴욕에 와있어. 난 여기서 뭔가를 해내고 싶어.
여기에 있는 인생에 충실하고 싶은데, 내가 맨날 서울 가는 비행기를 찾아보고 앉아 있는 거야."
그 말에 해성은 또다시 서운한 마음을 간직한 채 노라의 말에 따릅니다. 노라가 미안하다고 한 말에 "뭐가 미안해? 우리가 뭐 사귀기나 했냐?"라고 마음과 다른 말을 내뱉으면서요. 결국 12년 만에 재회한 둘의 인연은 또 일단락되었고, 각자의 인생에 충실해지는 동안 짧을 것 같던 '쉼'의 순간은 커다란 변화와 함께 12년 후로 그 둘을 데려갑니다.
12년 후, 노라와 해성은 미국에서 다시 만납니다. 영화 첫 장면의 시점이 된 거죠. 노라는 유태인계 작가인 아서와 결혼을 했고, 해성은 여자 친구와 헤어진 듯 사이가 소원해졌고요. 그럼에도 해성은 노라를 보러 뉴욕에 갑니다, 친구들에겐 휴가를 보낸다고 하고요. 해성의 친구들은 미국에 가있는 내내 비가 올 예정이라며 해성을 놀려대죠.
주룩주룩 내린 비로 우중충했던 뉴욕에서의 첫날을 해성 혼자 보낸 후, 이튿날 거짓말처럼 비가 그칩니다. 그리고 노라와 해성은 매디슨 스퀘어 공원(MadisonSquare Park)에서 재회해요.
전 이때 나눈 둘의 첫 대화가 너무 좋습니다.
"와, 너다."
"아, 어떡하지?"
"뭐라고 말해야 하지?"
"모르겠어."
그리곤 날씨 얘기가 이어지죠.
'와'하는 감탄사도 연발하지만, 정말 별말 아닌 이 말들이 너무 현실적으로 다가와 좋더라고요 저는. 이 두 사람의 벅찬 감정이 오롯이 전달되어서. 12년 전 처음 랜선으로 봤을 때도 "와, 너다"라고 해요. 물론 그땐 해성이, 12년 후엔 노라가 먼저 그 말을 한다는 게 차이라면 차이랄까. 그렇게 24년 만에 같은 공간에서 재회한 둘은 이내 서로에게 친근하게 다가섭니다.
그리고 궁금했던 것들을 물어봐요. 노라는 결혼 전 남편과 한국에 갔을 때 보낸 이메일에 왜 해성이 대답을 하지 않았는지를 물었고, 해성은 별다른 설명 없이 "미안해"라고만 하죠. 노라는 해성의 여자친구에 대해 물었고, 해성은 노라의 남편에 대한 질문을 이어가다, 노라가 해성에게 결정적 질문을 합니다. 12년 전에 왜 자신을 찾았는지.
이 부분의 대사도 저는 와닿았어요.
"그냥 한 번 더 보고 싶었어. 잘 모르겠어. 왠지 니가 날 두고 그냥 콱! 가버려서, 좀 열받았던 것 같아."
"미안."
"뭐가 미안해?"
"그치. 미안할 건 없지."
"너가 내 인생에서 사라졌는데 내가 널 팍! 다시 찾았지."
"왜 그랬어?"
"그냥. 몰라. 그냥 군대에서 니 생각이 나더라고."
"그랬구나."
그렇게 재회의 첫날이 지나고 이튿날도 둘은 함께 시간을 보냅니다. 첫날엔 남편과의 추억이 있는 공간을 함께 다녔지만, 둘째 날 탔던 자유의 여신상 관람 페리는 둘만의 장소였죠.
그리고 그날 오후 노라의 남편 아서와 노라, 해성은 함께 저녁 시간을 보냅니다. 바로 이 장면이 처음 시작한 장면과 연결됩니다.
영화에도 잘 표현이 되었지만 노라의 남편 아서는, 좋은 사람입니다. 노라와는 12년 전 아티스트 레지던시에서 만났고 그 이후 독서 및 영화 취향 등이 같았던 이유로 급속도로 가까워지며 결혼에 이르게 되었죠. 얄궂게도 12년 전 노라가 해성과 잠깐 연락을 끊자고 한 후 간 곳이 아티스트 레지던시였고, 이곳에서 여름을 보내며 노라와 아서는 연인이 됩니다.
둘은 빈틈없이 행복한 부부였지만, 아서는 아내의 20여 년 전의 인연이 13시간 걸려 뉴욕에 찾아왔다는 사실과 그가 매력적인 남성이라는 것에 대해 불안해했죠. 아내를 깊이 사랑하지만 노라가 자신의 삶을 더 풍족하게 만들어주는 만큼 그도 노라에게 그런 역할을 하고 있는지에 대한 확신이 부족했고, 잠꼬대를 한국어로 하는 노라를 보며 노라의 마음속에 자신이 못 가는 장소가 있다는 것에 대한 두려움도 느끼고 있었고요. 농반진반으로 스스로를 "과거의 애인에게 아내를 뺏기는 캐릭터"라고 표현하며 둘의 서사보다 20년 후에 재회한 어린 시절 연인이야말로 운명의 연인이 아닌가라고 한 말에는 "그렇지 않아"라고 대신 말해주고 싶을 정도로 사랑 앞에서 솔직하고 유약함을 드러내긴 하지만, 그는 묵묵하게 예의를 갖춰 해성과 노라를 대합니다. 물론 노라는 아서와 있는 이곳이 본인의 종착지이자 있어야 할 곳이라는 말로 그를 안심시켜요.
그렇게 셋은 뉴욕에서의 마지막 밤을 함께 보냅니다. 바에 앉아 이야기를 하는 동안 옛이야기에 젖어들면서 한국어로 말하는 노라와 해성은 더 가깝고 은밀해졌죠. 그동안 아서는 등을 돌린 채 해성과 얘기하고 있는 아내 곁에서 혼자 술을 마시며 기다리고 있고요.
이날 밤 이 둘은 다시 헤어집니다. 해성은 한국으로, 노라는 아서의 품으로 돌아가요.
이 영화는 '인연'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사람들 사이에 맺어지는 관계'인 인연이라는 단어를, 영화 속에선 불교와 윤회 사상에서 온 개념으로, 전혀 모르는 사람 둘이 길을 걷다가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 한다고 관객에게 설명해 줍니다. 전생에 관계가 있었다는 뜻으로, 그 둘이 결혼하면 8천 겁의 인연이 쌓인 거라는 말로 '인연'이란 단어의 깊은 의미도 짚어주고요. 그런 인연으로 노라는 아서를 만났고, 해성은 여자친구를 만났죠.
셋이 자리한 바에서의 대화 역시 주제는 인연이었어요. 해성 역시 노라의 남편 아서가 너무 좋은 사람이란 걸 알았고, 둘이 서로 사랑한다는 것도, 노라에겐 뉴욕에서의 삶이 더 잘 어울린다는 것도 인정하게 됩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론, 이루지 못한 사랑에 대한 마음도 감추지 않습니다. 남김없이 속 얘기를 털어놓으며, 고백도 했다가 원망도 했다가 숱한 가정 속에서 그 둘의 관계 설정도 하면서. 그렇게 해성은 나영과 노라를 함께 떠나보냅니다. 축복을 빌어주면서 그렇게 그만의 방식으로 작별 인사를 하죠. 노라 역시 그가 놓은 줄 알았던 나영과 해성에게 작별 인사를 하고요.
"나영아."
"응?"
"이것도 전생이라면, 우리의 다음 생에선 벌써 서로에게 다른 인연인 게 아닐까?"
"그때 우리는 누구일까?/"
"모르겠어."
"그때 보자."
제게도 비슷한 인연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 영화에 더 몰입됐죠. 저 역시 어릴 때 친구가 이민 가면서 헤어졌는데, 영화와 다른 점은 이민 간 다음 해인지 몇 년 후인지 혼자 한국에 다시 왔고, 그때 서로 제대로 이야기를 하지 못한 상태로 헤어졌어요. 그때 그 애가 "다신 안 와"라는 말을 남겼는데, 저 역시 어릴 때여서 별다른 반응 없이 그를 보냈습니다. 그렇게 헤어졌죠 저희도.
영화 속 나영과 해성만큼의 시간을 훌쩍 넘긴 지금, 소식도 모른 채 살고 있습니다. 사실 몇 년 전부터 그 애가 너무 보고 싶어서 '찾아볼까'란 생각이 들었는데, 어렵더라고요. 아무리 SNS가 발달한 시대여도 예전 이름과 기억만으로 사람을 찾는다는 게. 다른 이름으로 살고 있을 테고, 나를 찾고 싶지 않을 수도 있다는 여러 걱정과 변명들이 앞서 소중한 인연을 그냥 마음에만 담고 있습니다. 그래도 가끔 '우연히 만나면 어떤 말을 해야 할까?', '서로 알아보긴 할까?', '이미 스치진 않았을까?' 하는 생각들을 해봐요. 혹시 몰라 사용하지 않는 유선 전화번호를 꾸준히 유지하면서요.
이 영화에는 가수 장기하가 해성의 친구로 나옵니다. 처음엔 닮은 사람인 줄 알았어요. 대사는 거의 없지만 존재감은 큽니다. 한 인터뷰에서 셀린 송 감독은 "장기하가 배우로 유태오가 연기한 해성 역할에 오디션을 봐서 알게 되었다. 장기하와는 오디션을 하며 친해졌고 유태오가 캐스팅된 이후 '주인공은 아니지만 친구 역할이라도 할 수 있겠냐'라고 했더니 좋다고 해서 출연하게 되었다고 했죠. 누구의 소개가 아닌 그가 직접 연기가 하고 싶어 오디션 테이프를 보냈고 모든 출연자가 밟는 정식 절차를 다 밟았다고 합니다. 노라(나영) 역의 그레타 리와 해성 역의 유태오 역시 오디션을 통해 배역을 따냈고요.
이 영화에선 모든 역할이 다 인상적입니다. 노라의 남편인 '아서' 캐릭터도요. '아서'를 연기한 배우 존 마가로는 아내가 코리안 아메리칸이라고 해요. 셀린 송 감독은 이걸 모르고 그를 캐스팅했는데 존이 어떻게 이 캐릭터를 깊게 이해하고 간절하게 원했는지를 나중에 알게 되었다고 하죠. 존이 원래 한국말을 좀 할 줄 알았고 그래서 더 잘해보겠다고 했지만, 이 인물은 한국말을 잘하고 싶어 하는, 노력하는 사람이어야 한다고 감독이 말렸다고 해요.
그냥 봐도, 곱씹어 보면 볼수록 더 매력 있는 영화인데 우리나라에선 12만 명 정도의 관객만 극장에서 봤더라고요. 2024년 개봉 당시 영화 '파묘'의 인기가 거센 것도 이유였겠지만, 잔잔하고 담백한 내용이라 첫눈에 들지 못한 탓 아닌 탓도 있었겠죠.
하지만 보고 나면, 내 곁에 있는 사람이, 나와 인연을 맺었던, 맺고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 경우의 수 끝에 함께 하고 있는지, 얼마나 소중한 사람인지를 다시 한번 느끼게 됩니다. 모든 관계에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도,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것도, 타이밍이 중요하다는 것도요.
우리가 관계를 맺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 이유가 알고 싶다면, 잊지 말고 꼭 보세요.
오늘도 행복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