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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요...... 완전히 붕괴됐어요."

예술가의 한마디

벌써 가을인가 싶을 정도로 쌀쌀함이 묻어나는 요즘입니다.

창밖은 한없이 맑고 티 없이 깨끗해 햇살도 따사로울 것 같지만, 저는 긴팔 옷을 꺼내 무릎을 살짝 덮었어요. 산 아래 동네라 추위가 좀 일찍 찾아왔거든요. 정말 뜨겁고 비가 많이 내린 올해 여름, 늘 그렇듯 가을이 오긴 올까 했는데, 성큼 문 앞까지 온 걸 보니 다음 글을 쓸 땐 '겨울이 멀지 않았어요.'라고 쓰지 않을까 싶네요.

오늘은 오랜만에 의미 있게, 예술가의 한마디를 적어 봅니다.


영화 <헤어질 결심> 포스터 출처: 네이버 영화

올해, 1월부터 8월까지  10편의 영화를 봤습니다. 그중, 개봉일에 영화관에서  , OTT   , 각본집까지 구매해서 다시 읽을 정도로 여운이 깊었던  편의 영화가 있었죠. 오늘 이야기할 '예술가의  마디'  영화  대사에서 가져왔습니다. 이미 너무 많은 분들이 보셨고, N  관람을 하고, 후기나 명대사 밈을 만들어 뿌리는  정말 진심을 다하고 있는, 감독 박찬욱 · 각본 정서경(박찬욱) · 배우 탕웨이 · 박해일 주연의 <헤어질 결심> (Decision to leave, 2022)입니다.

(좌) 해준의 사무실 (우) 서래의 집 스틸 출처: 네이버 영화

<헤어질 결심>은 영화 개봉 전 이미 75회 칸 영화제에서 감독상을 수상했고, 배우 송강호가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브로커>로 남우주연상을 수상하는 겹경사로, 당시 상황이 대서특필되었죠. 저는, 제목에 끌려 이 영화를 꼭 봐야겠다고 몇 달 전부터 생각하고 있었고, 그때 그 얘기를 들은 친구가 개봉 소식이 전해지자 '같이 보자'라고 해서, 거의 한 달 전에 개봉일로 예매해서 봤고요. 당시 낮 시간대였음에도 꽤 많은 분들이 영화관에 계셨는데, 그 안에서도 취향은 갈렸습니다. 일단 저랑 제 친구는 폭풍 감동을 받고 나왔고요, 제 추천을 받은 친구 중 몇몇은 본인 취향이 아님을 적극 어필했고요.


이유야 어떻든, 지금도 일반 관람객의 좋은 평이 가득한 영화이고, 칸 영화제에서도 최고 평점을 받았고, 내년 3월에 열리는 제95회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 국제 장편 영화 부문 한국 대표 출품작으로 선정되었으니, 이 작품이 지닌 영화적 매력은 충분하다고 말할 수 있죠. 하반기에 대작들이 우수수 쏟아져 나와 오스카 수상까지는 더 지켜봐야겠지만, <기생충> 이후 또 다른 한국 영화의 독보적 미감과 연출·연기를 보여줄 수 있는 대표작이 될 것임은 확실합니다. 그리고, 영화 평론가 이동진 님도 별 다섯 개 만점을 주며 "파란색으로도 보이고 녹색으로도 보이는 그 옷처럼, 미결과 영원 사이에서 사무치도록"이란 영화평을 남겼고요. (이 평은 영화를 보지 않으면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ㅎ)

영화 <헤어질 결심> 스틸 출처: 네이버 영화

영화는 배우 박해일이 분한 장해준과 탕웨이가 분한 송서래가 엮인 사건 이야기로 시작합니다. 장해준(40세)은 기혼의, 최연소 부산경찰청 서부 경찰서 형사과 강력 2 팀장이고 송서래(30대)는 중국인으로, 출입국 외국인청에서 공무원으로 재직하다가 은퇴하고 민간 면접관으로 일한 기도수의 아내죠. 어느 날 산 정상에서 추락한 변사 사건이 벌어지고, 이 사건을 통해 둘은 알게 됩니다, 형사와 피의자로요. 추락사한 사람이 서래의 남편, 기도수였거든요. 남편 죽음에 대한 경찰의 신문에도 큰 동요 없던 서래는, 의심을 한 몸에 받으며 사건 피의자가 됩니다. 사건 해결을 위해 당일 서래의 알리바이와 탐문·신문· 잠복수사를 하던 해준은 이 과정을 통해 서래를 알아가기 시작하고요. 그러면서 의심은 관심으로, 미묘한 관계는 점점 호감을 느끼는 관계로 발전하고, 결국 서래는 혐의를 벗게 됩니다. 그리고 서로가 같은 종족이라고 느낀 두 사람의 관계는 더 깊어갑니다.

영화 <헤어질 결심> 스틸 출처: 네이버 영화

138분의 러닝타임 동안 이 영화는, 이들이 서로에게 스며드는 과정을 물 흐르듯 보여줍니다. 영화 속 배우들의 연기에 대한 호평이 이어지는 이유이기도 해요. '시나브로'나 '운명' 그리고 '마침내'라는 단어의 의미를 형상화하고 있으니까요. 달콤함에 빠져있던 두 사람에게도 시련은 찾아옵니다. 서래의 부탁으로 대신 간병인 일을 봐주던 해준이 서래의 의심스러운 정황을 포착했고, 그 끝에 숨겨진 진실을 발견하게 되거든요. 결국, 기도수를 살해한 서래의 범행이 밝혀지지만, 이미 사건은 ' 종결'. 경찰로서 자부심 가득했던 '품위'를 갖춘 해준은, 서래를 사모했던 마음과 경찰로서 사건을 제대로 처리하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붕괴'됩니다.


[서래] 우리 일을 그렇게 말하지 말아요.

[해준] 우리 일, 무슨 일이요? / 내가 당신 집 앞에서 밤마다 서성인 일이요? / 내가 당신 숨소리를 들으면서 깊이 잠든 일이요? / 당신을 끌어안고 행복하다고 속삭인 일이요? / 내가 품위 있댔죠? 품위가 어디서 나오는 줄 알아요? 자부심이에요. / 난 자부심 있는 경찰이었어요. 그런데 여자에 미쳐서 수사를 망쳤죠. / 나는요...... 완전히 붕괴됐어요. (중략)

저 폰은 바다에 버려요. 깊은 데 빠뜨려서 아무도 못 찾게 해요.

                                       -정서경·박찬욱 <헤어질 결심 > 각본(을유문화사, 2022) 중에서  발췌-


영화 <헤어질 결심> 스틸 출처: 네이버 영화

이 둘의 헤어짐은 서래에게도 큰 전환점이 됩니다. 이후 해준은 부산을 떠나 아내가 있는 안개 도시 이포로 전근 가고, 13개월 후 서래도 두 번째 남편과 해준이 있는 곳을 찾아갑니다. 그를 볼 수 있는 방법이 그것밖에 없어서. 그곳에서 우연을 가장한 필연으로 두 사람은 재회하게 되고, 그 자리엔 서로의 배우자도 함께 하죠. 이후 또 살인사건이 일어나고, 두 번째 남편 살해 피의자로, 서래와 해준은 피의자와 형사로 다시 만나게 됩니다. 사건을 해결하는 과정에서 두 사람은 그동안 감춰두었던 진심을 토로하지만, 해준의 안전을 위해 서래는 결국 스스로를 깊은 데 빠뜨려서 아무도 못 찾게 하는 엔딩을 선택하게 됩니다. 해준을 "붕괴" 이전으로 돌려놓기 위해서, 그리고 해준의 기억에서 지워지지 않을 미해결 사건 피의자가 되기 위해서.

영화 <헤어질 결심> 스틸 출처: 네이버 영화

이 영화가 사랑받는 이유는 수려한 미장센 그리고 밸런스입니다. 성숙한 어른들의 우아한 사랑 이야기를 만들고 싶었다는 감독의 말처럼, 이 영화는 우아합니다. 불륜, 살인, 폭력이라는 무시무시한 상황이 존재하지만, 그래도 근간은 '성숙한 사랑'이죠. 전 이 영화를 보고 제 SNS에 이런 소감을 쓰기도 했어요.

" 함께 보자고 손꼽아 기다렸던 그 영화. 우아한 사랑 이야기. 절절한 그 마음, 누구나 알지만 모두가 경험할 순 없는 이야기. 마음과 마음이 닿는 모습을 따라가다 보면 사랑이 무엇일까? 어떤 색일까? 어떻게 변할까? 동화될까? 인연은 정말 있는 것일까? 에 대한 수많은 질문들이 해소된다.(후략)"


서래는 붕괴 당시 해준의 말을 '절절한 사랑 고백'으로 받아들였고, 해준은 '사랑'이라는 직접적인 단어를 사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좋아는 하지만 그게 사랑이란 걸 깨닫지를 못했죠. 결국 서래가 사랑을 지키기 위해 세상에서 사라진 이후 그게 사랑이라는 것을 알게 되지만요.


영화 속엔 이 둘의 사랑 외에도 다른 형태의 사랑을 보여주는 인물들이 등장합니다. 그리고 사랑의 감정을 대변하는 다양한 은유들이 사용되죠. 그게 영화의 또 다른 묘미라 N 차 관람이 이어지고 있고요. 마치 보물 찾기처럼, 이 둘은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다.'라는 단서들이 영화 안에 가득하거든요. 물론, 그 단서는 확정적인 형태를 지니고 있지 않은 '사랑' 그 자체에 대한 이미지를 시각화해서 보여주기에, 눈으로, 소리로, 냄새로, 체온으로 또 다른 방식으로 읽힙니다.

영화 <밀회>(Brief Encounter, 1945) 스틸 및 포스터 출처:filmlinc.org, rottentomatoes.com

박찬욱 감독은 <헤어질 결심> 구상 당시, 각본을  정서경 작가에게 참고하라고 영화  편을 추천합니다. 데이비드 린의 <밀회>(Brief Encounter, 1945). <헤어질 결심>과는 다른 스토리라인이지만 '성숙한 남녀의 인내하는 사랑 이야기'라는 점에서 분명히 연결되는 점이 있을 거라 생각했고, 어렸을  주말의 명화에서 부모님과 함께 보면서, 어려서 이해는  했지만 어딘지 모르게 애틋한 기분을 느끼면서 봤던 어렴풋한 기억이 있는 영화'여서라고 추천 이유를 전하더라고요.

<밀회>는 1946년 제1회 칸영화제 그랑프리 수상작으로, 서로 가정이 있는 남녀가 우연한 기회로 사랑에 빠지나 현실과 윤리의 벽 앞에서 '스쳐감'을 택하는 이야기 구조를 가지고 있어요. 러닝 타임이 85분인데, 서사 방식이 독특하더라고요.

영화 <밀회>(Brief Encounter, 1945) 스틸  출처:https://www.filmlinc.org/films/brief-encounter/

영화는 두 남녀가 헤어지는 순간부터 시작합니다. 미래를 기약할 수 없어 더 애틋한 둘은, 이별의 순간마저도 둘만의 시간이 허락되지 않죠. 결국 남자는 마지막 인사를 하지 못한 채, 여자의 어깨 위에 손을 살포시 얹는 것으로 작별 인사를 대신합니다. 남자를 배웅하고 온 여자는 헤어짐의 고통과 남편에 대한 죄책감 때문에 괴롭고요. 그러면서, 모든 사람에게 다 할 수 있지만 남편에게만은 할 수 없던, 그들의 사랑 이야기를 독백으로 풀어놓습니다. 고해성사하듯.


이 영화도 상당히 재밌습니다. 전혀 지루하지 않고요. 단지, 그들이 사랑에 빠지는 시간이 너무 짧아서 흠칫했는데, 당시 제작 가능한 영화 길이가 짧아서 생략했나? 뭐 이런 영양가 없는 생각으로 그냥 넘겼어요. 85분 동안, 만나고, 스치고, 사랑하고, 헤어지고 그리고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는 과정이 부담스럽지 않게 담겨있고, 일단 흑백영화가 주는 무드가 좋습니다. 연기도 좋고요. 방백처럼 들린 독백을 마친 여자에게, 남편이 다가오며 하는 말이 마지막 대사인데, 대략 " 당신이 멀게 느껴졌는데, 다시 돌아와 줘서 고마워."라는 내용입니다. 영화 내내 분명 사이좋은 부부로 나오는데, 남편이 아내의 변화를 크게 눈치채지 못해 보였고, 참 둔하네 저분... 이러면서 봤던 제게, 그렇지 그렇지, 모를 수가 없지 이런 반응을 일으킨 대사였어요.

영화 <화양연화 花樣年華> (in the mood for love. 2000) 포스터 출처: 네이버 영화

저는 <헤어질 결심>을 보고, 이 영화가 떠올랐어요. <화양연화>. 영화관에서 봤는데, 너무 오래전이라 기억이 잘 안 나더라고요. 그래서 다시 봤죠, 리마스터링으로. 근데, 여전히 삭제된 장면은 있더라고요. 어쨌든, 이 영화도 다수의 수상 경력을 가지고 있고, 많은 분들이 인생 영화로 꼽는 수작입니다.


'화양연화花樣年華'는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운 순간'을 의미합니다. 뭔가 소외되고, 해체되고, 방황하고, 쓸쓸한 느낌을 자아내는 왕가위 감독의 영화 스타일과는 좀 다른, 예쁜 이름이죠. 그래서 더 반어적인 울림이 크기도 하고요.

영화 <화양연화 花樣年華> (in the mood for love, 2000) 스틸 출처: 네이버 영화

이 영화는 앞선 두 영화와는 시작점이 좀 달라요.

같은 날 같은 아파트로 이사 온 남녀는 서로의 배우자에게서 익숙한 무언가를 발견하게 되죠. 그리고 이내 그들의 배우자가 특별한 관계임을 눈치챕니다. 그리고 관계의 시작이 궁금해진 두 사람은, 그들의 행적을 쫓다가 서로에게 빠져들기 시작하죠. 영화 속에서도 '우리가 사랑하게 될 줄 몰랐다'라는 내용의 대사가 나오는데, 그렇게 가까워진 둘은 사랑하지만 결국 헤어짐을 선택합니다. 수많은 '가정'을 하게 되는데, 그럼에도 선을 넘지 않으려, 그들의 배우자와 우리 사이는 다르다는 것을 강박처럼 보여주려 하죠, 마치, 스스로의 사랑을 부정하듯. 이 안에서도 '사랑한다'라는 직접적인 표현이 나오지는 않지만, 사랑을 이야기하는 많은 것들이 유려한 미장센으로 등장합니다. 그리고 영화만큼 ost도 엄청 인기를 끌었죠. 이후에 나온 CF 배경음악으로도 수차례 사용되었고요.

뜬금없긴 하지만, 남녀 주인공의 주요 서사 장소 중 하나로 등장하는 국숫집이 코로나를 잘 이겨내고 아직도 있는지 문득 궁금해지네요, 몇 년 전까지는 있었는데.


영화 <헤어질 결심>을 봤거나 볼 예정이라면, 다른 영화들도 놓치지 말고 보길 권해드립니다. 음악에도 귀를 기울이고, 대사에도 시선을 고정하고, 무엇보다, '사랑의 형태'를 표현하는 세 감독의 다른 스타일에 집중하면서요. 1940년대 영국, 1960년대 홍콩, 2020년대 한국이 영화의 배경이지만, 그 모습은 분명 닿아있는 지점들이 많거든요. 표현방식은 서로 다르지만 비슷한 결을 가지고 있는 세 편의 영화. 올해가 가기 전에 꼭 보길 추천드립니다.


아, <헤어질 결심>을 본 후엔 꼭 정훈희 송창식의 '안개'를, <밀회>를 본 후엔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콘체르토 2번'을, <화양연화>를 본 후엔 냇 킹 콜의 'Quizas, Quizas, Quizas(perhaps, perhaps, perhaps)'를 들어보셔야 해요.


남은 주말 잘 보내시고,

앞으로도 '붕괴' 되지 않는 한 주를 보내자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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