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 이야기
모든 감각을 숨 쉬게 하는 전시, 《박신양 전시쑈_제4의 벽》(2026.03,06~05,10), 세종문화회관미술관
한 달 전 예매 후 개막을 기다렸던 전시를 보고 왔습니다. 사실 기대작 대부분을 개막 주에 보는데 글은 좀 많이 늦게 올리죠 ㅎ 어제 이 전시를 보면서 '집에 가면 바로 올려야지'했는데, 결국은 잠을 이기지 못하고 오늘이 되었네요. 그래도 개막 후 3일 만의 포스팅이니 제 기준엔 진짜 빨리 쓰는 글입니다.
제가 이 전시를 봐야겠다 결심이 선 건 전시 현수막을 본 이후였어요. 전시 홍보가 포함된 콘텐츠에서 일부 작품을 봤는데, 확 끌리진 않았거든요. 그러다 전시장인 세종문화회관 미술관에 걸린 이 현수막을 보고 '이건 무조건 봐야겠다' 생각했죠. 모든 게 다듬어져 있는 광화문광장 일대에 광화문글판을 제외하고 유일한 손글씨 현수막이기도 하고, 이 정도 콘셉트와 자신감이면 전시가 시시하진 않겠다는 생각도 들었고요. 그리고 그 생각은 적중했습니다. 전시, 재밌습니다. '전시쑈' 맞아요!
《박신양 전시쑈_제4의 벽》은 실연 공간 자체가 하나의 작품입니다. 완결 없이 발전되는 작업실이자 전시 공간 그리고 연극이 실연되는 공연장이죠. 이 안엔 색도 있고, 향도 있고, 음악도 있고, 움직임도 있어요. 공간을 변주하는 배우와 그 모든 것을 완성시키는 배우(퍼포머)도 있습니다.
제목에 쓰인 '제4의 벽(Quatrième mur, The fourth wall) '이 무슨 의미일까 궁금했는데, 알고 보니 '연극 밖의 현실 세계와 무대 위에서 전개되는 극 중 세계를 구분하는 가상의 벽'을 이르는 연극 용어였어요. 무대와 관객석을 구분하는 가상의 벽으로, 실재하진 않지만 배우와 관객의 암묵적인 약속으로 만들어진 현실의 벽으로 저는 이해했습니다. 가령 시대극을 공연한다고 할 때, 현재는 2026년이지만, 무대 위는 역사 속 특정 시대나 장소인 거고, 관람객은 그 콘셉트에 동화되어 극 전개를 따라가잖아요. 창작물 속 세계를 존중해야 극 중 수많은 이름과 역할, 배경이 납득되니까요. 반대로 연극 무대에서 관객석으로 말을 걸거나 관람객에게 어떤 행동을 유도하는 건 제4의 벽을 넘나들거나 무너뜨리는 행위인 거죠. 작가는 '제4의 벽'이란 타이틀을 그의 저서와 이전 전시에도 썼는데, 이를 통해 그가 설정한 무대에서 화가, 저자, 연기자를 넘나드는 창작자로서의 그의 정체성을 보여주고, 관람객은 제4의 벽을 통해 보이는 그대로 때론 현재와 호응하며 무대 위 그를 마주하게 됩니다.
이 전시는 전시장 벽체가 독특합니다. 요즘 전시장 벽체로 시스템 비계나 유로폼을 사용하는 경우가 종종 있어 생경하진 않았는데, 세종문화회관 미술관을 유로폼으로 꾸몄던 적은 없어서 이건 색달라 보이더라고요. 유로폼(Euro Form)은 건축자재로, 건설 현장에서 철근 콘크리트 구조물 시공에 가장 널리 쓰이는 '거푸집'입니다. 유로폼, 알폼, 갱폼 이렇게 나뉘던데, 이 전시 덕에 새 용어를 습득했어요. 어쨌든 1,500여 개의 유로폼이 전시장 벽체로 활용됐는데, 유로폼 뒤판마다 색을 칠해 독특한 분위기를 완성했죠. 작품도 걸 수 있고 설명판도 올려놓을 수 있고 종이 팔레트 작품은 마치 액자에 넣은 것처럼 이 안에 쏙 들어가니, 여러모로 스마트한 선택이었다고 감탄하며 봤어요. 공임이 만만치 않은 작업이었겠지만요. 하지만 그런 노력 덕에 전시장이 더 힙하게 느껴집니다. 전시장을 가득 채운 향, 음악과도 멋지게 어울렸고, 회화 작품과 퍼포머를 위한 완벽한 무대가 되었으니까요. 쇼(공연) 장이면서 전시실이 필요한 '전시쑈'의 무대로는 제격이었죠. 아! 전시장 전체 콘셉트는 작가의 작업실입니다. 그래서 전시장 초입에 작가의 작업실 화구와 작품이 그려진 혹은 그릴 캔버스 등이 놓여있고 굿즈 숍 입구에도 붓이 놓여 있어요.
이번 전시에선 10여 년간 그린 작품 150여 점을 선보입니다. 대부분 작품의 캔버스 사이즈가 100호(162.2cm x 130.3cm)가 넘는 대작으로, '사과', '투우사', '당나귀', '자화상', '움직임 연구' '인물' 등의 연작을 볼 수 있습니다. 구상도 있고 추상도 있고 작가의 메모 같은 그림도 있어요. 사조, 화풍, 기법 등의 미술계의 규격을 몰라도 충분히 감각적으로 공감할 수 있습니다.
전시장엔 섹션을 구분 짓는 텍스트가 없습니다. 벽체 색으로 공간이 전환되고, 곳곳에 배치된 작가의 말들로 공간과 작품이 연결됩니다. 작가가 왜 그림 그리기를 시작했는지, 처음 그린 그림은 무엇인지, 그림이 작가에겐 어떤 의미인지 등 속 깊은 이야기들이 작가의 손으로 작품에 적혀있거나 인쇄 글로 놓여있죠. 한글, 중국어, 영어, 일본어로 병기되어 있어서 외국 친구와 함께 보기에 좋습니다.
전시쑈에는 퍼포머가 등장합니다. 연극적 전시를 완성시키는 핵심 인물이죠. 제가 본 퍼포머는 총 다섯 분인데, 관련 기사에 열다섯 분으로 적힌 걸로 보아 3교대로 진행되는 거 같아요. 전시쑈 퍼포머의 콘셉트는 '작업실의 정령精靈'입니다. 작업이 끝난 후 정령의 무대가 된 작업실의 모습을 보여주는 거죠. 이 정령들은 따로 또 같이 연기하는데, 각각의 포지션에서 어떤 글씨를 쓰거나 물체를 놓고 자리를 바꾸거나, 자신이 만든 어떤 환경에서 특정한 행동을 하기도 합니다. 그러다 함께 모여 행동하기도 하죠. 전시실 전관에서 계속 어떤 행위들을 지속하는데, 대부분은 무언의 행동이지만 가끔 의성어나 의태어 어떤 단어들을 내뱉기도 해요. 꽤 많은 단어를 들었는데 '에곤 실레'만 남았네요. ㅎ
관람객이 가까이 다가가도 마치 제4의 벽이 있는 양 여념 없이 자신의 행동을 지속하고 가끔 관람객의 행동에 동참하기도 합니다. 퍼포머의 연기 중에 제게 가장 와닿은 건 지하 1층 전시장에서 한 작품을 응시하던 모습입니다. 그 작품은 작가가 그림을 그리게 된 계기가 된 친구의 자화상으로, 이 내용을 알고 있어서 더 와닿았던 거 같아요. 퍼포머의 눈빛과 뒷모습에서 '그리움'이 묻어났거든요. 퍼포머의 행동은 멈춤 없이 지속됩니다. 단 템포가 느려서 전체극을 다 보긴 어렵습니다. 하긴 시작과 끝도 알 수 없으니 전체 극이란 말은 의미가 없겠네요.
이외에도 전시쑈를 특별하게 하는 두 가지가 더 있습니다. 향과 음악이죠. 전시실에는 균일하게 어떤 향이 채워져 있는데, 이 향이 공간과 잘 어울려요. 마스크를 쓴 제게도 짙은 향이었지만 관람에 전혀 방해되지 않고 기분 좋을 정도로 취하게 하죠. 또 선별된 플레이 리스트가 곳곳에 놓인 JBL PARTYBOX1000(?) 스피커로 송출되는데, 사운드가 좋으니까 노래도 귀에 잘 들어오더라고요. 전시를 구경하다 한 노래에 꽂혀 전시 지킴이분께 물어봤는데, 리스트가 공유되진 않아 모른다고 하셔서 많이 아쉬웠어요. 남녀 듀엣 샹송으로 기억하는데, 하룻밤 지나고 나니 기억이 섞여 확신이 없네요. 전시실에서 작품을 보다가 남녀가 같이 부른 샹송 제목을 알게 되시면 제게 댓글 공유 부탁드립니다. 저 그 노래 제목 알고 싶어서 유튜브에 선별된 샹송을 글 쓰는 내내 듣고 있는데 아직 못 찾았어요. 근데, 남녀가 같이 부른 건 맞겠죠? ㅎㅎㅎㅎㅎㅎㅎ 독창이라고 해도, '장밋빛 인생'은 확실히 아닙니다, 그 곡은 알아요 ㅎ
전시실 끝엔 굿즈 숍이 있습니다. 출품작 이미지로 만든 엽서와 포스터, 소품들 그리고 업체들과의 콜라보 제품들이 있어요. 네 컷 사진도 있고요. 전시실 향도 이곳에서 맡아볼 수 있습니다. 도록은 못 봤는데, 이 전시 개막 즈음 출간한 배우 박신양과 인문학자 김동훈의 공저 『제4의 벽』이 도록을 대신할 수 있을 것 같네요. 살짝 봤는데 전시실에서 봤던 그림과 글들이 수록됐습니다.
전시는 먼저 전시실 작품 위주로 한 번, 작가의 글을 따라 다시 한번 보는 걸 권해드립니다. 그렇게 오가며 퍼포머의 연기도 보시고요. 확실히 처음에는 보이지 않았던 것들이 더 잘 보입니다.
얼리버드 티켓 구매 기간은 지났지만 세종 S 멤버십, 경로 우대 등 할인 항목들이 있습니다. 정가를 주고 보셔도 후회는 없을 전시지만 참고하시고요. 전시는 기간 내 휴관 없이 진행되지만, 광화문광장에서 BTS 컴백 라이브가 있는 3월 21일은 확인 후 가시는 게 좋을듯해요. 그 일대 국립민속박물관, 국립고궁박물관, 대한민국역사박물관, 세종문화회관, 경복궁 모두 당일 임시 휴관을 결정했고, 대중교통 운행도 영향을 받을 듯하니까요.
그럼 남은 주말 편안하게 보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