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 이야기
2024 봄을 닮은 전시, 아야코 록카쿠 《꿈꾸는 손》& 유이치 히라코 《여행》
2024 청룡의 해! 다들 안녕하시죠? 새로운 한 해가 시작됐습니다!
이맘땐 작심삼일이라도 여러 다짐들이 무수히 교차되고 있을 텐데, 저 역시 작년에 못 끝낸 일들과 새롭게 맞이할 일들에 대한 처리 계획을 대략적으로 짜두고, 하루하루 실천하고 있습니다. 올핸 시작이 좋아서 그런지, 좋은 일이 많이 생길 것 같아요. 게다가 작년 말 올 초에 걸쳐 민간 신앙에서 액운을 물리치는 효험을 지닌 사물들을 잔뜩 봤더니, 뭔지 더 든든합니다. 플라시보 효과이겠지만, 그래도요.
그렇게 좋은 기분을 잔뜩 담아 소개할 전시는, 아야코 록카쿠 AYAKO ROKKAKU(1982-)의 《꿈꾸는 손》 과 유이치 히라코 YUICHI HIRAKO(1982-)의 《여행》입니다. 하나만 소개할까 하다가 일본 동시대 동갑내기 작가이기도 하고 작품 스타일도 확고한 데다 둘 다 우리나라에서는 첫 대규모 전시라 묶어봤어요. 아트 마켓에 관심이 있다면 들어 본 이름이겠지만, 그게 아니라면 좀 생소하실 테니, 이제부터 꼭 주목해 보세요. 전시는 둘 다 유료입니다.
아야코 록카쿠는 일본 치바현 출신으로, '스케치 없이 맨손에 아크릴 물감을 묻혀 즉흥적으로 그림을 그리는' 작가입니다. 이러한 방식을 핑거페인팅 finger painting이라 하는데, 지두화(指頭畫, 핑거페인팅) 스타일의 작품 중 저는 오치균 화백의 그림을 좋아합니다. 아야코는 스무 살 무렵, 말로 표현하는 것 이상의 표현 방법을 찾기 위해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고 해요. 정규 미술 교육을 받지 않았지만, 무라카미 다카시의 카이카이 키키(Kaikai Kiki)가 2006년 주최한 게이사이 아트페어(GEISAI Art Fair)에 참가하면서 주목받기 시작했고, 현재는 요시토모 나라, 쿠사마 야요이 등을 잇는 일본 차세대 아티스트로 활약 중입니다. 세계 여러 지역에서 활동하는 MZ 세대 컬렉터들이 주목하는 아티스트로, 2022년 제52회 일본 SBI 옥션에서 16억 원으로 개인 최고 낙찰가를 갱신하기도 했죠.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에서 3월 24일까지 진행되는 아야코 록카쿠의 《꿈꾸는 손》은, 그의 역대 최대 규모 개인전입니다. 138점의 출품 작품은 모두 델레이브 패밀리 소장품으로, 이 전시에서는 아야코 록카쿠의 작품 세계와 함께 그에게 전폭적인 지원을 한 갤러리 델레이브 DELAIVE의 디렉터 니코 델레이브와 그의 가족 이야기가 곁들여져요. 갤러리 델레이브는 네덜란드의 유명 현대 갤러리로, 샘 프란시스 SAM FRANCIS(1923-1994), 이브 클레인 YVES KLEIN(1928-1962), 니키 드 생팔 NIKI DE SAINT PHALLE(1930-2002), 앤디 워홀 ANDY WARHOL(1928-1987), 제프 쿤스 JEFF KOONS(1955-) 등 이름만으로도 빛나는 아티스트들의 작품을 거래하고 있고, 무라카미 다카시 TAKASHI MURAKAMI(1963-)와 아야코 록카쿠 등이 소속 작가로 활동 중이죠.
아야코와 니코 델레이브는 2006년부터 인연을 맺어왔는데, 당시 신인이었던 아야코의 잠재력을 발견한 이후 그의 모든 작품을 니코 델레이브가 구매했고 전폭적인 지원도 아끼지 않았기에 오늘날의 아야코 록카쿠가 더 빛을 낼 수 있었죠. 전시 인트로에서도 <운명적인 만남>이란 제목으로 이들의 만남을 샌드 아트 영상으로 표현했는데, "나는 이 순간부터 당신이 만드는 모든 것을 전부 소장할 것입니다"란 말이 정말 인상적이었습니다. 갤러리 델레이브 누리집에 들어가면 현재까지 판매 및 소장하고 있는 작품 개수가 나오는데, 그중 아야코의 작품 수가 965점인 걸 보면, 그 약속을 꾸준히 지켜왔다는 걸 알 수 있죠.
전시는 2006년 초기작부터 최근작을 <맨발의 소녀>, <꿈꾸는 손가락>, <넓은 세상으로>, <나의 친구들>, <봄의 시작> 5개의 소주제로 분류해 소개하고 있습니다. 아트 마켓에도 몇 점 정도만 나오는 상황이니, 이렇게 한 자라에 쭉 모아놓고 보는 건 드문 기회죠. 회화뿐만 아니라 도자, 영상, 설치 작품들도 다양하게 있고요. 아야코의 그림은 밝은 색상의 안료를 손가락에 묻혀 그리는 방식으로 제작되는데, 화폭과 매체의 차이가 있을 뿐 그 구성이 크게 다르진 않습니다. 그가 그리는 대상이 대부분 큰 눈 소녀, 동물, 자연물과 어린 시절의 기억과 같은 소재들이라서 주제의 변화도 크진 않고요. 그러다 보니 어느 정도 보고 나면 살짝 지루하게 느낄 수는 있지만, 작품이 주는 밝고 순수한 기운도 좋고, 단조로움을 깨기 위해 다양하게 심어놓은 장치들도 꽤 매력적이고, 무엇보다 이 안은 봄 그 자체로, 분명 그림을 보고 나왔는데 꽃밭을 다녀온 듯 걱정 근심이 사라져서 좋습니다. 전반적으로 핑크 톤에 소녀 취향이라 남성분들이 어떻게 느낄지는 모르겠지만요.
꽤 오래전에 지인이 아야코의 골판지 그림 이미지를 보내주며, "이게 얼마인지 알아?" "얼마면 살 거 같아?"라고 물었었는데, 아야코 록카쿠는 현재 작품 거래가가 평균 억 단위인 작가입니다. 골판지에 그린 그림도 몇 천을 호가하죠. 가격이 그 작가와 작품의 가치를 오롯이 반영한다고 생각하진 않지만, 대중들이 거금을 주고 살 땐 여러 이유가 있긴 하겠죠. 그러니 여러 의미로, 이 전시를 봐두시면 좋을 듯합니다. 얼리버드 할인은 끝났지만 잘 찾아보면 할인 예매도 가능하실 거예요. 아, 해보고 싶었는데 성인이라 못해 아쉬웠던 어린이 무료 참여 프로그램도 진행되고 있으니, 누리집 내용을 꼭 확인하세요.
유이치 히라코의 《여행》은 2월 4일까지 마곡에 있는 스페이스K에서 볼 수 있습니다. 그는 자연 자원이 풍부한 오카야마 출신으로, 도쿄를 기반으로 활동합니다. 런던 윔블던 대학교에서 회화를 전공했는데, 졸업 한 해 전인 2005년도부터 꾸준히 국내외에서 전시를 열며 작가로서의 경력을 차곡차곡 쌓아왔죠. 제가 이 작가를 알게 된 건 한 4년 전인데, 그때 이 작가의 작품들을 보고 작품 표현 형태도, 사상도 마음에 들어 쭉 눈여겨보고 있습니다. 생태주의에 기반한 그의 작업은 '자연을 개척과 정복의 대상이 아닌 동등한 존재로 바라보길 바라는' 제 자연관과도 일치하거든요.
"인간과 자연의 공존"이라는 메시지를 담고 있는 그의 작품엔 인간과 자연을 연결하는 매개체로 혼종 캐릭터가 등장합니다. 일반적으로 "트리맨"으로 부르는 이 캐릭터는, 사람의 몸에 나무 머리, 사슴뿔을 한 형상으로, 그의 화폭에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뮤즈이자 화신입니다. 사실 저는 '트리맨 Tree man'이란 이름보다는 '미스터 네이처 Mr. Nature'라 부르면 어떨까 여러 번 생각해 봤어요. 어차피 작가가 명명한 이름도 아니고, 후자가 좀 더 포괄적이라서요.
어렸을 때부터 자연 속에서 경계 없는 이동을 하는 자연물들과 함께 자라온 작가는, 그 경험을 바탕으로 자신의 예술관을 공고히 합니다. 자연과 어우러졌던 어린 시절과 도심의 인공적인 자연환경 사이의 간극을 크게 느낀 건, 유학 시절 런던에서의 경험이 컸다고 해요. 가로수나 공원 등 특정 구획에 인위적으로 자리한 자연을 인간의 돌봄이 없으면 유지될 수 없는 인공 자연이라 인식을 했고, 자연을 대하는 인간 중심의 태도부터 바뀌어야 한다고 보았기에, 그의 작품에서는 인간과 자연을 동등한 위치에서 바라보게 하죠. 그래서 그의 작품 속 자연물들은, 크기는 다를지언정 배경이 아닌 인간과 함께 전면에 배치되고요. 트리맨으로 불리는 대표 캐릭터는, 일본 민속 설화의 나무 정령을 참고해 탄생시킨 것으로, 작가는 이 혼종의 인물이 자신의 자화상이자 자연과 관계를 맺고 있는 모든 사람의 초상이라고 말합니다.
이번 전시에서는 《여행》이라는 주제에 맞게 자신의 캐릭터와 동식물이 함께 하는 여정을 다룹니다. 이들과 함께 숲에서, 강에서, 산에서 보내는 장면들이 화폭에 등장하죠. 모험심을 불러일으키는 장면부터 고요하게 자연 멍을 하는 장면까지, 말 그대로 누군가와 함께 여행하면서 만나게 되는 장면들이라 익숙하면서도, 캐릭터 자체가 독특하다 보니 비현실적인 느낌도 들고, 암튼 오묘합니다. 일본 작가의 작품이 일본을 떠나 한국에서 전시하는 자체가 '여행'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서울식물원이라는 거대한 인공 자연 옆 콘크리트와 시멘트 빌딩 숲 속에 자리한 스페이스K로 작가의 작품을 만나러 가는 제 여정 자체도 여행이었어요.
이번 전시에선 회화, 조각, 설치 등 30여 점을 소개합니다. 좀 적긴 한데, 현장에는 드로잉이나 소품들이 많아서 30여 점보다는 많은 느낌이 들어요. 특별한 섹션 구분 없이 구성되어 동선이 단순한 편이지만, 전시장 안팎으로 그의 작품들이 설치되어 있어 찾아보는 재미가 있긴 합니다. 동전을 넣고 뽑기를 하는 체험도 있고요. 경품은 굿즈인데, 체험비는 유료입니다.
그의 작품은, 특별한 설명 없이 봐도 그냥 기분이 좋아집니다. 인간과 자연의 공존이라는 대명제를 차치하고 봐도, 그냥 좋아요. 사랑을 듬뿍 받고 있는 각자의 반려동물과 반려 식물이 떠오르기도 하고, 탐스러운 과일들이 눈에 가득 차기도 하고, 화폭 속 장소가 마치 내가 가본 캠핑 장소의 한 곳 같아 친근감도 들고요. 무엇보다 색상이 어둡지 않습니다. 눈코입이 없어도 무섭지 않은 이유는, 아마도 앞서 말한 여러 부가적 장치들 때문인 것 같아요. 그래서, 이번 전시를 보고 나면 막 숲으로 떠나고 싶어 집니다. 그러니 보고 난 후엔 가장 가까운 서울식물원으로 가보세요, 아마 알고 있던 동식물이 조금 다르게 보일 테니까요.
오늘은 미세먼지도 없으니, 저도 산책을 나가봐야겠어요.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