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 이야기
그때 그 시절 우리가 사랑한 그녀, 매염방梅艶芳 Anita Mui
추운 겨울이 시작되면 유독 생각나는 것들이 있죠. 저는 호빵과 군고구마, 따뜻한 코코아 그리고 익숙하고 따뜻했던 모든 것들이 차례차례 생각납니다. 얼마 전에 제가 좋아하는 방송 프로그램이 폐지된다는 뉴스에, 난생처음 폐지 반대 서명도 해봤으나 결국 폐지 확정이란 기사를 보고 나니 너무 허무하더라고요. 애착 인형을 빼앗긴 느낌이랄까? 아직 몇 주분이 남아있고, 한동안은 다시 보기에 빠져있다가 어느 순간 추억이 되어 버리겠지만, '기다리던 프로그램의 새 에피소드가 더 이상 업데이트되지 않는다는 게 이런 느낌이겠구나'를 오래간만에 경험하고 있어요.
그렇게 생각은 꼬리의 꼬리를 물고 가다, '최근에 본 OTT가 뭐였더라?'까지 이르렀는데, 이 시리즈가 마지막이더라고요 제가 본. 모두가 《무빙》에 빠져 있을 때, 저를 유혹한 시리즈의 이름은 《매염방: 디렉터스 컷》입니다. 디즈니 플러스에서 볼 수 있어요.
전 어릴 때부터 집에서 자연스럽게 홍콩 영화를 접했습니다. 한국 문화가 지금처럼 세계의 주류가 되지 못했던 시절엔 대부분 홍콩 영화에 열광했고, 저희 집도 예외는 아니었거든요. 비디오 가게에서 빌려온 비디오는 다 중화권 콘텐츠로, 이소룡, 성룡, 주윤발, 유덕화, 곽부성, 여명, 매염방, 임청하, 왕조현, 장만옥 등은 너무 친숙했고, 세상 모두가 홍콩 영화나 중국 무협 드라마 팬처럼 느껴졌을 정도였달까. 그 이후 일본 대중문화가 휩쓸기 전까진 홍콩 배우들이 한국 CF에도 자주 등장했어요.
어쨌든 그 영향으로 저는 그때부터 지금까지 쭉 성룡 영화를 좋아합니다. 대중적 인기에 힘입어 성룡 영화는 명절 때마다 개봉을 했고, 온 가족이 함께 보기에도 적합해 집에서도 자주 봤고, 텔레비전에서 명절 특선 영화로도 많이 방영해서, 때 되면 만나는 그런 친척 같았달까? 제 기억으론 당시 불호가 없었던 스타였어요. 그때나 지금이나 성룡은 '탑티어'여서, 당시 전도유망한 신인이나 인지도 높은 국내 배우 중 그의 영화에 출연하지 않은 배우를 찾는 건 어렵습니다. 저 역시 성룡 영화를 통해 중화권 배우들을 알게 되었으니까요. 매염방도 그중 한 명이고요.
'홍콩의 딸'이란 애칭이 붙을 만큼, 매염방(1963-2003)은 전 국민의 사랑을 받았습니다. 정말 정말 유명한 가수 겸 배우 그리고 자선가였어요. 2022년에 공개된 드라마《 매염방 : 디렉터스 컷 》 은 그의 어린 시절부터 죽기 전 마지막 콘서트까지의 이야기를 다룹니다. 40여 분짜리 에피소드 5개가 전부이니 길진 않죠. 축약판을 보고 싶다면, 부산국제영화제 폐막작으로 상영된 영화 《매염방》을 보면 됩니다.
매염방은 그의 언니와 3살 때부터 무대에 오릅니다. 생계를 위해서요. 쭉 함께 활동하던 자매의 운명은 함께 지원한 신인가수 선발 대회에서 매염방만 붙으면서 갈리게 되죠. 연예계 활동을 시작한 매염방에겐 운과 인복이 따랐는데, 그의 초기 활동을 담은 1, 2부 에피소드를 보다 보면, 매염방의 연예계 데뷔와 막 부흥하기 시작한 홍콩 연예계와 영화계 이야기와 섞이면서 흥미로운 지점들이 많이 있습니다. 낯선 퍼즐들이 익숙하게 맞춰지는 느낌이었는데, 그 과정엔 그의 오랜 벗 장국영의 이야기도 살짝 얹힙니다.
드라마와 영화에서는 왕단니(王丹妮,Louise Wong)가 매염방을, 유준겸(劉俊謙,Terrance Lau)이 장국영을 연기했어요. 왕단니는 이 역으로 2022 홍콩금상장영화제(1982년에 설립) 신인 연기상을 받았습니다. 드라마에선 왕단니의 연기와 함께 매염방의 실제 영상과 사진이 오버랩되는 부분이 많아요. 그러다 보니 얼마나 닮았나 자연스럽게 비교하게 되는데, 매염방과 유사하게 보이기 위해 얼마나 많은 공을 들였는지 볼수록 알겠더라고요. 그의 노래들도 연대기에 맞춰 들려줘서 일반 드라마라기보다는 다큐멘터리나 뮤직비디오 같은 느낌이 진해요. 저도 매염방의 노래를 자주 듣긴 했지만, 광둥어라 가사는 이해 못 한 채로 멜로디만 흥얼거렸는데, 영상을 보다 보니까 '저 가사가 저런 내용이었구나', '저 영화에 쓰인 음악이었구나'하며 추억의 조각들을 맞추는 시간이 되더라고요.
전혀 몰랐던 그의 연애 스토리도 인상적이었어요. 비록 이뤄지진 못했지만 남자친구 캐릭터들이 다 의리는 있었던 터라 다행이다 싶기도 했고, 그 당시에도 연예 기획사에서 대세 남녀 연예인의 연애를 반대했구나 ~ 뭐 이런 시시한 생각도 해봤고요. 예전엔 조폭을 다룬 홍콩 영화들이 많았는데, 장국영과 양조위의 아내인 유가령 사건 등을 내밀하게 들여다보면, 조폭과 개념 없는 파파라치, 과열된 매체 취재로 인해 그 당시 홍콩 연예인의 삶이 얼마나 파란만장하고 무시무시했을지 짐작이 됩니다. 이 드라마에도 그런 부분들이 조금 나와요.
앞서 언급했듯, 매염방과 장국영은 무명시절부터 친분을 이어온 사이입니다. 그리고 죽기 전까지 서로의 든든한 조력자가 되어 주었죠. 장국영과는 관금붕 감독의 영화 《연지구(인지구)》(Rouge, 胭脂扣, 1987)에도 함께 출연했는데, 드라마에도 나오지만 이 영화에 장국영을 추천한 사람이 매염방입니다. 이 영화를 찍을 당시 매염방은 이미 스타였지만, 그 역시 여주인공을 맡은 건 처음이었으니, 상대 배우로 장국영을 얼마나 신뢰했는지 알 수 있죠.
결과적으로 그의 선택은 옳았고 영화는 평단과 대중의 사랑을 받습니다. 홍콩에선 이 작품이 1988년에 개봉했는데, 1989년 홍콩금상장영화제에서 작품상, 감독상, 여우주연상, 편집상, 영화음악상, 주제가상을 휩쓸었어요. 매염방도 이 영화로 24회 대만 금마장, 8회 홍콩 금상장, 34회 아시아 태평양 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수상했고요. 장국영이라는 배우에겐, 순수하고 열정적이지만 유약한 남성의 이미지를 심어준 첫 영화가 아닌가 싶네요.
《연지구(인지구)》에서 매염방은 1930년대 기생 '여화'를 연기합니다. 극 중 여화 스타일을 좋아해서 스틸 사진을 영정으로 쓰길 바랐다는 이야기도 있어요. 장국영은 여화와 신분을 초월한 사랑에 빠진 부유한 청년 '진진방'을 연기했는데, 극 중에서 첫눈에 반한 둘은 열렬히 사랑했지만 결국 신분의 벽을 넘지 못하고 내세의 사랑을 맹세한 채 동반 음독자살을 합니다. 하지만 만나기로 한 진진방이 내세에 오질 않자 50년이라는 기다림 끝에 여화는 그를 찾아 현세로 옵니다. 그리고 그를 찾기 위해 신문 구인 광고를 내려고 신문사를 찾아가죠. 우여곡절 끝에 여화가 원혼이란 걸 믿은 신문사 기자와 그의 연인은 여화를 도와 진진방을 찾는데, 그는 70대 노인이 되어 근근이 살아가고 있었죠. 목숨을 걸고 맹세한 약조가 물거품이 된 걸 안 순간, 사랑의 증표인 연지 상자를 진진방에게 전해주고 여화는 떠나가면서 영화는 끝납니다.
지금과 비교하면 화질이 정말 좋지 않음에도, 장국영의 미모는 뭐, 그 자체로 빛납니다. 여기서도 경극 분장을 했는데, 이후 《패왕별희》(1993) 속 그를 떠올리기 충분합니다. 이 영화는 원작이 있어요. 동명의 소설을 쓴 작가는 이벽화(李碧華)로, 그는 이 작품 외에도 첸카이거 감독의 《패왕별희》, 서극 감독의 《청사》(1994) 등의 원작자이기도 해요. 이 영화는 2005년 중국 영화 백 년 명작 100선에도 뽑혔고, 2011년 홍콩 영화자료관 선정 '1916~2000년도 영화 중'꼭 봐야 하는 홍콩 영화 100편'에도 뽑혔으니, 꼭 한 번 보세요. CG는 크게 기대하지 마시고요.
매염방이 연예인으로서 최고의 위치에 있을 때 그에겐 최악의 상황이 펼쳐집니다. 언니가 자궁경부암으로 죽은 지 얼마 되지 않아 그 역시 암 진단을 받았고, 홍콩엔 사스(중증 급성 호흡기 증후군)가 터져 많은 사망자가 나왔으며, 절친인 장국영이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나거든요. 그리고 그 역시 얼마 지나지 않아 합병증으로 세상을 떠났죠. 2003년은 그렇게 모두에게 혹독한 한 해였어요. 드라마에도 나오지만, 그는 병세가 심할 때도 콘서트를 강행합니다. 그게 무대에서 팬들과 만나는 마지막이었기에, 팬들과 무대와 결혼했다는 의미로 웨딩드레스를 입고 무대에 올랐죠. 죽기 전 마지막 콘서트 포함 그는 총 292회의 공연을 했고 이 기록은 중화권 가수 중 가장 많은 개인 콘서트를 한 여가수로 2009년 기네스에 등재되었는데, 지금 깨졌는지는 모르겠네요.
영화에선 영향력 있는 자선가, 활동가로서의 매염방의 모습도 보여줍니다. 그가 "홍콩의 딸"이란 애칭을 갖게 된 것도 이런 활동 때문이죠. 우리가 세계사를 통해 배웠듯, 홍콩은 아편전쟁의 결과로 영국령이 되었고, 1984년 반환 협정을 맺어져 1997년 반환됩니다. 일국양제로 50년간 이전의 시스템 유지를 약속받았지만, 지금 우리가 알듯, 홍콩은 그때의 홍콩이 아니죠. 이를 염려한 많은 사람들이 홍콩 반환을 앞두고 해외로 거주지를 옮깁니다. 매염방도 캐나다 여권을 받았지만, 중국에서 일어난 수많은 재난으로 상처 입고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떠올리며 홍콩에 남기로 결정합니다.
이후 그는 자선 사업을 펼치며 선한 영향력을 펼치죠. 2003년 사스 때도, 오랫동안 생기를 잃은 홍콩인들을 위해, 자신이 직접 총감독이 되어 동료 연예인들을 모아 《1 : 99》자선기금 모집 콘서트를 열어요. 당시 홍콩은 사스 피해가 큰 지역 중 하나로, 매염방 외 홍콩 유명 가수 22팀이 참여해 장장 4시간 반 동안 진행된 이 공연은, 홍콩이 사스에 굴복하지 않고 잘 이겨낼 거란 의지를 되새기는 기념비적 공연이었어요. 공연명은 왕가위 감독의 아이디어였다는데, 1은 모두의 마음을, 99(九九無窮)는 사스에 꺾이지 않을 홍콩 사람들의 믿음을 상징한다고 해요. 슬램덩크에서 나온 "중요한 건 꺾이지 않은 마음"이란 말이 떠오르네요.
2003년 12월 30일 새벽, 매염방은 자궁경부암이 야기한 폐 기능 약화로, 인생을 마감합니다. 그때 나이가 40세였어요. 그리곤 하늘의 별이 되었죠. 2018년도에 중국어 소행성 이름이 45개 추가되었는데, 그중 4개의 행성에 홍콩 유명 연예인의 이름을 따 명명됐다고 해요. 이중 홍콩 천문학자 양광우(楊光宇) 선생이 발견한 번호 55384 행성이 바로 매염방 (Muiyimfong, 임시 번호 2001 SQ267) 행성입니다. 그의 죽음에 많은 사람들이 슬퍼했고, 그를 향한 추모는 지금도 지속되고 있습니다.
2014년에 7월 18일, 홍콩의 유명 관광지인 스타페리 선착장 근처 스타의 거리엔 매염방의 동상이 세워집니다. 이때가 매염방이 참가한 신인가수 선발전의 32주년이었다고 해요. 이곳에 많은 분들이 다녀오셨겠지만 아마도 이 동상에 주목하지 못하셨을 듯해요. 제 글을 읽으셨으니 다음엔 꼭 유덕화의 글씨로 '홍콩의 딸'이라 적힌 매염방 동상 앞에서 사진을 남겨보시고요. 저도, 홍콩에 가면 다시 자세히 봐야겠어요. 영화에 나왔던 장소들도 다시 가보고요.
끝으로, 매염방의 노래 추천드립니다. 좋은 곡이 많아 고르느라 어려웠지만, 드라마를 보다 보면 궁금해지는 노래와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노래 중 딱 4곡만 선별했습니다. 모두가 히트곡이지만 우리나라에서 대중적으로 가장 유명한 건 《영웅본색 3》주제곡인 <석양지가 夕陽之歌> 일 거고요, <심채 心債>는 TVB 드라마 《香城浪子》의 주제곡으로, 드라마 초반에 나와서 노래를 먼저 듣고 드라마를 보면 꽤 반가울 거예요. <친밀애인 親密愛人>, <여인화 女人花>도 꼭 들어보길 추천드립니다.
이 글이 올해 마지막 포스팅입니다. 긴 글임에도 찾아와 읽어주셔서 늘 감사드려요.
다들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2024 갑진년, 청룡의 해! 원하고 바라는 모든 일들이 청룡의 기운을 받아 다 이뤄지길 바라겠습니다. 내년에 뵐게요! : )
안타깝게 세상을 떠난 배우 이선균 님의 명복을 빕니다
부디 그곳에선
좋아하는 사람들과 좋아하는 일들 맘껏 하면서,
평안하게 잘 지내길 바라겠습니다.
좋은 배우로,
오래오래 기억하겠습니다.
2023.12.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