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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반장 Jan 16. 2022

골방에서

산에서 내려와 글을 읽었다

며칠 간의  휴가를 가졌다. 휴가 내내 골방에 박혀 책만 읽었다. 브런치에 썼던 글을 살펴보니 여전히 내게는 해결되지 않은 일만 무성하다. 영원히 해결되지 않을 성싶기도 하다. 안락을 향해 미끄러져가는 본능을 일으켜 세우는 일, 인간의 죽고 사는 순간에 우뚝 서서 나의 안위에도 관심을 가지는 일, 고통의 부르짖음에 압도되지 않고 하루의 소소한 즐거움에 미소 짓는 일, 내가 욕망하는지도 몰랐던 일-예컨대 승진 같은 하찮기도 하고 중요하기도 한 것 같지만 포기해버린 일을 이룬 타인을 사심 없이 축하하는 일, 도통 단어를 고르지 못해 미뤄뒀던 '좋은 글을 쓰고 싶다.'는 욕심에서 '좋은 글'이 무엇인지 고민하고 '좋은' 까지는 아니어도 적당한 '글'을 쓰며 나 자신과 타협하는  일까지도. 오늘도 역시나 유별난 콘텐츠도 없고 해박한 지식도 없이 희미한 정체성만 늘어놓는 구멍 난  일기 같은 글이 되지 않을까.

 

지난 한 달간 무언가에 압도되어 흘러왔다. 그 끝에는 지나친 음주와 격앙된 감정만 남아 다시금 모든 것을 멈추고 골방에 숨어들었다. 지난 시간을 치유하지 못하겠지만 그래도 새로 시작할 힘을 얻기를 기대하며 익숙한 감정들로부터 거리를  두는 처치를 한 것이다.


나는 죽은 사람을 찾으러 다녔다. 아니 죽었을지 살았을지 모를 사람이었지만 모두들 죽었을 거라 확신했다. 검정 비닐봉지를 들고 덤덤하게 걷는 그의 마지막 길을 쫓다가 광역시 전체에 걸쳐있는 산으로 향하는 뒷모습을 망하게 바라보며 우리는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인력을 투입했다. 기온은 영하를 밑돌았고, 때때로 비가 왔고, 멧돼지가 길을 낸 야산을 뒤지다 미끄러져 누군가는 다쳤다. 사람들은 쉬는 날에도 출근해 산을 뒤지고, 나는 매일 더 넓은 범위의 지도를 만들었다.


매일 오전 10시부터 오후 4시. 일주일이 넘어가면서부터 사람들은 의심하기 시작했다. 정말 산에 올라간 것은 맞나. 다시 내려온 것은 아닌가.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해 사람을 찾는 동안 여기저기서 불만이 터졌다. 분명 이 산에서 땅을 쑤시고 있는 동안에도 누군가는 죽고, 맞고, 불행은 쉼 없이 터졌던 것이다. 오후쯤 산책을 나갔던 치매 할머니가 길을 잃었을 때는 산에서 급히 내려와 CCTV를 보러 달려가야 했고, 술 취해 사라진 딸을 찾는 부모의 격앙된 전화에 시달리며 누군가는  20시간을 쉼 없이 해야 했다.


두 번째 사람이 또 다른 산을 오른 날, 50명이 넘는 사람들은 두 번째 사람을 찾으러 산에 올랐다. 이번엔 한 시간이면 정상을 찍는 작은 산이라 희망이 있을 거라 여겼다. 두 번째 산을 오르는 도중 기적처럼 첫 번째 사람을 발견했다. 첫 번째 산에 남아 수색하던 늠름한 개가 찾았다. 기적처럼 찾아왔지만, 기적은 없었다. 나는 왈칵 눈물을 쏟았다. 모두 산으로 떠난 빈 사무실에서, 혼자서 또 다른 사람들의 비명을 해결하며 오전 내내 엉엉 울었다.


그의 마지막 모습은 참혹했다. 보고 싶지 않았지만 보지 않을 수 없었다. 그토록 눈물이 난 것은 그가 왜 산을 올랐는지 알고 있었고, 그의 마지막을 영상으로나마 쫓았고, 죽든 살든 빨리 발견이나 됐으면 좋겠다고 잠시나마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 마지막이 얼마나 괴로웠을지 상상조차 할 수 없어 절로 죄송함에 바닥에 납작 엎드리고 싶기도 하고, 언젠가는 나도 마지막을 맞겠지만 영원히 생각조차 하지 않고 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철없는 생각에 몸서리를 쳤다.


사람들은 잊지 못했다. 그의 마지막이 잔상에 남아 잠들지 못했고, 회복할 새도 없이 맞이한 또 다른 처참한 죽음이 이상하게 신경에 남아 한 때 살아있었던 사람과 만난 잠시의 순간이 영상으로 재생되듯 명징하게 기억 속에서 기어 다녔다. 사람들은 말했다. 웃으면서 말하기 싫지만 웃으면서 말하는 것인데 도무지 잊히지가 않는다고.



두 번째 사람을 찾은 것도 개였다. 첫 수색을 시작한 지 한 달 여가 다 되어갈 때쯤이었다. 내가 그 사람의 마음으로 정확히 그 시간에 산을 올라 찾아보겠다며 호언장담하고는 걷고 걸어 해가 넘어가고 숲이 어둑 해질 때쯤 다급하게 산을 빠져나왔던 그 지점이었다.  두 시간 동안 임도에서 야산의 현장까지 사람들을 몇 번이고 안내하며 나는 개만도 못하구나, 라는 자책과 찾아서 다행이라는 작은 위안과 사는 게 허망하다는 감상에 젖었다가 산비탈 아래로 발을 헛디디고 말았다. 한 바퀴 굴러 떨어졌다 삐죽한 마른 나뭇가지를 잡고 올라오는데 한 인간의 고뇌가 끝난 자리에서 산을 구르는 육체의  이질감에 헛웃음이 났다. "저는 괜찮습니다! 정말 괜찮습니다!"를 3번 외쳤지만 역시 인간은 자연에 패배하고야 마는 존재인걸 , 매일 패배하는 게 인간의 일이라 이거지, 하고 힘이 빠졌다.



김연수는 '청춘의 문장들'에서 공허는 알을 깨고 성장으로 나아가야 할 때라고 말했다. 후회하고 서글퍼는 해도 돌아갈 수는 없는 것이 청춘이라며 청춘을 애도하는 그의 글에서 나는 공허의 알을 깨고 어디로 가야 하나, 하는 생각에 잠겼다. 한 가지 고통이 사로잡던 시기가 지나면 그다음 고통의 과제가 주어지는데 그 사이 정거장 같은 시간(김연수는 청춘을 정거장 같은 시기라고 했다. 수많은 잠정적 인연 중 대부분 이른 헤어짐으로 귀결되는 시기기 때문이다.)에 찾아오는 것이 공허라는 녀석이라면, 나는 정거장에 너무 오래 머무르고 있는 듯했다.

 


공허는 때론 나쁜 선택을 하게 다. (정세랑 작가의 표현을 빌리자면) 소리 지르는 것쯤은 '양심에 실금도 긋지 않'을 만큼 다급한 상황에 놓인 사람들을 포용할 힘이 없을 때면, 나도 버럭 소리라도 지르고 싶었다. 내가 인식하는 한은 힘껏 참았지만 듣는 입장에서는 짜증스러웠는지도 모른다. 누구의 줄을 잡고 승진할까, 어떻게 더 일을 미루고 공부할 시간을 확보할까, 얼마나 뽐을 내야 이걸로 승진할 수 있을까, 승진하면 또 어떤 자리로 가야 할까, 기민한 고민들로 이뤄낸 생의 자잘성공들은 원래도, 앞으로도 것도 아닌데 괜히 신경을 긁었다. 도무지 출구가 없어 작은 부스러기라도 구걸해야 하나, 비굴하게 웃고 싶기도 했다. 딱딱하게 식은 빵을 뜯어먹듯 꾸역꾸역 알맹이 잃은 오욕칠정을 따라 파도치는 하루가 매일 이어졌다.

 

술이란 술은 다 마셨다. 해소하지 못한 감정을 술로 녹이면 다음 날은 괜찮았다. 그러나 무언가를 빌려 나아지기를 바라는 것도 위험하기는 매한가지다. 술에 관대하고 술로 화합하고 술로 더 이상의 것을 해결해보려 했다 실패했던 내 지난 시간들이 그 증거다.  캐롤라인 냅은 '드링킹'에서 지난한 알콜중독의 세월을 고백하며 술을 마셔서 감정을 마비시키는 것은 인생의 고통을 마주하고 공들여 선택하는 상황을 미루는 행위라고 말했다. 이라는 마취제로 나는 얼마나 많은 인생의 과제를 외면해 왔던가.


술뿐만 아니라 무언가를 빌려 감정을 해소하는 행위는 언제나 예상치 못했던 '반응'으로 돌아온다. 괴테는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으로 죽음을 갈망하는 자신의 페르소나를 묻어두고 다시는 그 작품을 거들떠보지 않았다고 한다.('우리는 자살을 모른다' 中) 자신의 감정을 쏟아부은 소설로 자신은 '자살 사고'로부터 벗어났으나 그 글을 읽은 청춘들은 그 감정에 동화되어 죽음에 이르게 된 것이다. 세련된 단어를 조합한 현란한 글솜씨라도 사람의 특수한 감정을 휘몰아치게 해 죽음에 이르게 하는 글이, 스탕달 증후군을 일으키는  예술적 경지에 이르렀다고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과연 좋은 글이라고 할 수 있을까? 눌변이라 하더라도 사람이 살게 하는 글이 좋은 글이 아닐까?


그리하여 공허의 늪으로, 고독으로, 나의 골방으로 들어오게 된 것이다.  


가난과 열병에 시달리다 나폴레옹을 빙자한 해괴한 이성의 논리로 백해무익한 전당포 노인을 죽이려다 순진한 그 동생까지 죽여버린 러시아 청년 로쟈가 창녀 소냐의 신성한 마음에 이끌려 회개의 짐을 어깨에 자백하고는, 뒤늦게 그녀의 구원에 눈물짓는 그 순간이던가. 제대로 이해하지도 못하면서 손가락으로 글을 따라 쓰고 있는 쇼펜하우어의 책에서 스치듯 봤던 '시적 진실성'을 배제한 인간 이성의 논리, 그 공허한 울림이 어떤 것인지 잠시 이해했다. 쇼펜하우어는 행복이라는 목적을 위해 인간의 특권인 이성을 발동시켜 고통(고뇌)의 원인인 욕망을 제거하고자 하는, 극단적으로는 이러한 이성이 아니라면 죽음에 이르러야 한다는 암시까지 주는 스토아학파의 면면을 비판하며 그들을 '시적 진실정'이 없는 나무 모형이라고 했다. 그 반대로 인도의 지혜, 그리스도교 구세주, '깊은 생명이 가득 찬 시적 진실과 최고의 가치를 가지면서 완전한 덕과 신성, 숭고함을 구비하고 최고의 고뇌 상태 속에 서 는 탁월한 인물'이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시적 진실성'으로 향하기 위해서는 불완전한 이성이라도 열렬히 따랐던 경험도 필요한 것이 아닐까. 그 과정에서 타인을 해치는 한이 있더라도 자신의 두려움을 이겨내려는 경험 없이, 신에게 가는 길이 가능할까. 어쩌면 그것이 니체가 말한 낙타의 단계가 아니던가. 이름 모를 짐을 지고 어딘지 모를 곳으로 가는 그 모습이 한낱 조직의 부속품으로서 기능하는 내 모습이 아니던가.


나는 요즘 조직의 부속품으로서 생사의 담대한 진실 앞에 무력하게 서 있는 나 자신이 하찮아 견딜 수가 없다. 하찮은 외피에 짓눌렸던 슬픔은 기침처럼 터져 나왔다. 변호사 출신의 승포판(승진을 포기한 판사)이라는 작가가 늘어놓은 슬픔의 군상에 눈물을 뚝뚝 흘렸다. 이렇게 많은 슬픔을 짊어지고 판단의 고뇌  '양형 이유'에 녹여낸 그의 글에 자꾸만 눈물이 나니 벌써 갱년기인가 싶었다.

어떤 양형 이유 中

그러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뺨을 때리는 눈보라는 맞을 수밖에 없지만, 그 거센 눈보라 속으로 길을 떠난 사제들이 있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그는 말했다. 그렇지. 눈보라에 뺨을 맞는다고 그게 아프고 무섭다고 이 자리에 서서 술 마시고 울고 불고 징징거릴 수는 없지. 누군가는 그래도 길을 떠났지. 나는 무력하고, 하찮은 부속품이라 거대한 불행 앞에는 무릎이 꺾이기도 하지만 슬픔을 아는 부속품이니 또 힘을 내야지. 부속품으로 삐걱대며 기능하더라도 그 슬픔이 나를 녹슬지 않게 해 '시적 진실성'을 찾아야지. 조고각하, 발아래를 살펴 하심을 지켜야지.

오래된 질문 中

나고 죽는 것도 혼자, 고통을 느끼는 것도 혼자, 생의 감각을 짊어져야 하는 것도 혼자인 인간이 무탈한 건 당연한 게 아니다. 나를 살 찌운 모든 것이 거저 주어지지 않았다. 내가 가지고 태어난 것은 아무것도 없다. 나는 인연으로 살아남았고, 모든 인연은 이별의 그림자를 달고 있다. 어차피 이별할 것에 집착한들 무엇이 이로울까.  발아래를 살피고 살지 않으면 삶에 남는 것이 무엇이 있을까.  골방에서 나는 잠시나마 감정이 휘몰아치는  일상의 거죽을 벗고 앉아 쓸데없이 게으른 시간에 몸을 맡겼다.


공허라는 건, 죽지 않고 무사히 살아온 내가 삶에서 상처받은 만큼 누군가도 상처받고 고통받고 살아왔다는, 때론 내가 그 상처의 발원이기도 했다는 서늘한 인식을 깔고 앉아 있는 것 같다. 불완전한 인간으로서 말하고 행동하고 역동하는 생의 기제는 자기충족적일 수 없어 언제나 타인의 희생을 필요로 하고, 나도 모르게 발아래 두고 왔던 누군가의 희생에 참회하며 묵묵히 오늘을 사는 힘을 내야 한다는 무언의 시선 같기도 하다. 신성을 잃은 공허한 논리로 사람을 죽이고도 그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 로쟈를 말없이 지켜보며 그를 자백과 참회의 실천, 그리고 결국 사랑으로 이끄는 소냐의 시선처럼.


오늘이 지나면 일상의 거죽을 다시 껴입고 나는 다시 세차게 뺨을 때리는 눈보라 속을 걸어 나가야 한다. 내일은 아직 오지도 않았는데 벌써부터 멋대로 단정 짓고 겪지 않고도 지루하고 미리부터 두려운 기분이 든다. 나는 아직 멀었다. 과연 이번에는 잘 해낼 수 있을까. 분별없이 인간을 우주같이 대하고, 나를 취하게 하는 것들은 멀리하고, 몸을 더 움직이고 글을 더 읽고, 작은 것을 돌보고, 무엇보다 하찮은 자신을 미워하지 않을 수 있을까. 죽어가는 것들을 사랑하는데 얼마나 큰 용기가 필요한지 알지 못했기에, 막걸릿집 벽지에 백 번이고 천 번이고 그려져 있던 윤동주의 시가 이제야 마음에서 노래가 된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해결되지 않은 지난 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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