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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반장 Feb 12. 2022

배꼽이 어디 있는지 알고 살아가려면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

사고 싶은 책이 있어 점심시간 서점에 들렀다. 이어령 선생님 생의 마지막 인터뷰집이었다. 서점에는 입구부터 편향적인 정치색을 드러내는 책들이 쌓여 있었다. 누군가에게 굿바이를 고하거나, 억울하게 옥살이한 가련한 여성을 그리워하는 책들을 지나 내가 원하는 책을 고르고 점원과 마주해 책을 사서 다시 돌아오는 여정은 그 책에 대한 감각도 특별하게 만들었다.  일종의 아이스브레이킹이랄까. 곧바로 사각진 테이블에서 카페라떼 한 잔을 두고 글을 읽고 싶어 다. 일주일 간 나와 동행할 이 책과의 첫만남으로는 꽤 괜찮을 것 같았다.

연말 연초는 승진과 인사이동의 시기이다. 누구나 자신이 보상받아 마땅하다고 생각하기에 지나치게 시끄럽다. 보상의 한계는 정해져 있고 누군가가 독식하면 대다수는 탄식의 소리를 내뱉는다. 공정한 그림 속에서 조금이라도 욕망을 끼워 넣으려 아우성치는 사람들은 그나마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이 있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기막힌 우연으로 내 이름이 한 번 거론되지 않을까라는 내심의 대와  이것이 뭐 그리 중요하다고 야단법석이냐는 자포자기 사이에서 방황한다. 여기저기 인사를 다니던 사람들은 돌고 도는 조직생활의 끈을 읊어 내리며 인연을 자랑한다. 거봐, 여기서는 원한지고 살면 안 된다니까. 누구는 쇠를 그렇게 좋아한다던데. 그래도 차를 받아 챙겼던 놈은 퇴직해서 이제는 예전 같지는 않을 거라며 희망의 말도 한다.


마음이 공처럼 튀고 가슴에 겨울바람이 인다.


유리컵이 육체이고 그 안에 찰랑이는 액체가 마인드고 그 외에 비어있는 공간은 모두 영혼이라는 이어령 선생님의 말을 읽는다.


마음은 출렁여도 나의 영혼은 훼손하지 못할 거라고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고마웠던 분들께 드릴 새해 선물을 준비했다. 한 달 넘는 산악수색에서 두 사람을 찾아준 핸들러에게도 따뜻한 양말과 감사 카드를 보냈다. 이제는 광주에서 무너진 공사현장을 수색하고 있다는 말을 들었다. 식당 앞에서 목탁을 두드리는 노승에게 시주하고 푼돈으로 한 군 데 더 후원하기로 결정했다. 받는 거 없이 줄 때의 마음으로 가슴속의 바람을 잠재운다. 이것은 나를 위한 의식이다.


이 의식의 사제는 나 말고도 한 사람 더 있다. 바로 우리 신랑이다. 순수하게 타인에게 무언가를 주었을 때는 꼭 신랑에게 칭찬을 받고 싶다.


신랑은 10년째 같은 개그를 하고 아이같이 똥방귀 장난치고 티비를 보면 사심 없이 크게 웃는 사람이지만, 불의에 화내고 사랑을 위해 싸울 줄도 다. 나는 삶을 대하는 그의 태도를 사랑한다. 우리는 근본적으로 타인의 감정에 민감해 베푸는 성향이 있는 기버(giver)인데 신랑에게 있었던 일을 얘기하면 호구 짓과 좋은 짓은 기막히게 분별해 낸다. 나도 신랑에게 그러하다. 우리는 타인의 슬픔을 같이 아파하며 베풀되, 타인의 욕심에 이용되는 호구는 되지 않으려 한다. 그것이 세상에게 좋은 일이라 믿고 있다.


10년 만에 알게 된 신랑의 꿈은 부자가 되는 것이다. 부자가 돼서 도깨비처럼 살고 싶다고 했다. 드라마 도깨비의 공유처럼 절망적인 사람들을 도와주는, 익명의 독지가가 꿈이다.


평생 부자는 못되겠구나 싶다.

내 머리로 생각한 이야기를 하기 때문에 어떤 자리든 어떤 주제든 겁날 것이 없었다고 했다.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 中-


신랑에게 가장 닮고 싶은 부분은 두려워하지 않아도 될 것은 두려워하지 않는 심지다. 무엇이 옳고 그른지 최선을 다해 생각하고 문제를 해결해 나갈 때 타인의 어긋난 욕망들에 흔들리지 않는다. 자신의 감정을 믿고 그 근원을 가만히 관찰하되 행동해야 할 때는 망설임 없이 행한다. 그는 자신의 불안타인을 이용해 해소하는 행동이나 편리하려고 원칙을 지키지 않는 행동을 단호히 질타하지만 근본적으로 사람을 아끼고 사랑해서 스스로 약자가 된다. 감정에 솔직하지만 함부로 분출하지 않고, 때론 후회해도 어리석은 선택에서 새로운 것을 배우고 과거를 미워하지 않는다.


그가 두려워하지 않는 태도는 무지해서 두려움을 모르는 것과는 다르다.


무지한 인간은 자신이 보지 못한 것을 상상할 능력이 없어서 두려워하지 않는다. 보이지 않는 것은 없이 취급하면 그만이고 자신이 겪지 않은 것을 겪었다고 착각하기에 두려워하지 않는다. 타인의 언어를 제대로 읽지 못하면 언제나 자신의 짧은 경험 안에 타인을 멋대로 가두고 자신의 아픔보다 못하다고 소리 지를 수밖에 없다. 공감은 동일성의 단어가 아니다. 타인이 내뱉는 언어가 자신이 아는 언어라도 알지 못하는 영역(타자성)이 있다는 인식을 단단히 벼리고 있지 않으면 공감이 아니라 멋대로 하는 짐작에 가깝다.


'타자를 나의 것으로 만들지 말고 그가 있는 그대로 있게 하라.'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 中-
 '타자성'

타자성을 상실한 현대인의 불안이 궁금하다면 '페널티킥 앞에 선 골키퍼의 불안'을 읽어보면 된다. 소설의 주인공은 상사의 눈빛을 일을 그만두라는 신호로 알고 일을 그만둔다. 타인을 지레짐작하는 마음의 습관은 타인을 통제하려는 오만이고 그 오만으로 인간으로서는 알 수 없는 신의 손길을 점치려는 사람은 불안하기 마련이다. 공이 여기로 올까, 저기로 올까. 그것은 나의 영역이 아닌 것이다. 마치 '이방인'에서 뫼르소가 죽음의 순간 피할 수 없는 태양을 느끼고,  사제를 만나 우리 모두는 사형수라는 인식으로 삶의 부조리함을 외칠 때처럼 '정다운 무관심'에서 시작해야 할 타자의 영역이 있다는 것이다.  

신의 영역

세계의 일에 무관심해서는 안 되겠지만 인간의 힘으로 끼워 맞추지 못할 일에는 '정다운 무관심'이 필요하다. 그래서 타인을 관찰하며 무관심하지 못해 흔들리는 마음은 잘게 쪼개 세상에 흩뿌리는 의식을 치른다. 뿌릴 게 없으면  화안시라도 한다. 화안시는 가진 것이 없어도 베풀 수 있는 무재칠시 중 하나다.

2022년 1월 20일 경향신문 오피니언, 고영직 문학평론가

의식에는 규칙이 있고 그에 따라 행하는 것은 피곤하다.

영혼이야 어찌 됐든 마음 가는 대로 어둠 속에서 몸부림치는 게 더 쉬운 길이다.


그래도 영혼은 밥을 먹어야 하니까


책을 읽고 글을 쓰며 마음의 언어를 갈고닦

타인에게 자신에게 소중한 무언가를 주고

한 번 더 웃어야 한다.

글을 쓴다는 것은 앞에 쓴 글에 대한 공허와 실패를 딛고 매번 다시 시작하는 것이라고, 그가 환하게 웃었다.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 中-


이어령 선생님과의 일주일 간의 동행이 끝났다.

한 장 읽고 삶을 살고, 또 한 장 읽고 삶을 살며 띄엄띄엄 그렇게 읽다 보니 끝에 닿았다.

배꼽이 어디 있는지는 알고 살라는 정언명령에 실패에도 매 번 다시 시작하라는 강렬한 생의 의지가 서려 있어 지성에서 영성으로 가는 삶을 추동한다.


또 패배하겠지만

영혼을 채우는 N개의 페르소나를 쓰고 싶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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