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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반장 Feb 19. 2022

온라인 필사 모임을 하고 나면 생기는 변화

매주 목요일 밤 8시

지난해 7월-8월 온라인 독서모임 '밤이 선생이다'를 진행하고 새로운 리더의 주도로 매주 목요일 저녁마다 온라인 필사 모임을 이어 오고 있다.


원래 내가 했던 기획은 각자 1시간씩 책을 읽고 나머지 1시간은 독립서점주강연이책 소개, 주제 별 소그룹 모임으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오래 지속하기 위해 그 내용 약간 바꿨. 이제 우리는 각자 1시간 필사를 하고 나머지 1시간은 필사한 부분을 공유하며 편안하게 대화를 나눈다.  모임의 장은 '어렸을 적 학교 마치고 골목길로 뛰어 나가면 언제나 친구들이 모여 있었듯, 이 온라인 공간도 언제나 열려있는 어른들의 골목길이 되었으면 좋겠다.'라고 말했다. 그 덕에 나는 매주 목요일이면 느슨한 우정을 찾으러 '줌(zoom) 골목길'로 뛰어 들어간다.  


모임 장의 원칙대로 이 모임은 별다른 원칙이 없다. 굳이 암묵적인 원칙을 들자면 '-님'이라는 호칭과 경어 정도? 시간이 되면 오픈 카톡방에 줌 링크가 뜨고, 불참에 대한 죄책감이나 해명도 요구받지 않은 채 다만 진심으로 이 시점에 이 놀이를 원하는 사람만 링크를 눌러 참여한다. 그리고 각자 조용히 책을 읽는다.


정확히 9시가 되면 모임의 장이 인사를 건넨다. 안녕하세요. 잘 지내셨나요? 지난 한 주간 특별한 일 없으셨나요? 잔잔하게 안부를 나누고 오늘 읽은 책에 대한 간단한 소개와 전체적인 감상평을 이야기하면 다들 책 제목을 받아 적기 바쁘다. 부작용이라면 부작용이다. 평소에 취하지 않았을 타인의 취향대로 책을 접하고, 그 시선을 흡수하며 동하는 감성에 기꺼이 지갑이 열린다. 먹을수록 늘어만 가는 나이처럼, 책도 읽을수록 많아진다.


아직은 모임원이 많지 않기에 대화를 나눌 시간이 충분하다. 사람들은 돌아가면서 각자 필사한 부분을 읽는다. 소리 내어 읽고 나면 왜 감명 깊었는지 단어를 고르다가 내 안에 중요한 것, 어두운 것, 진정 욕망하는 것이 드러난다. 내가 이미 읽은 책이라도 타인의 시선으로 찾아낸 구절은 새로운 빛의 줄기로 다가온다. '저런 구절이 있었나?'하고 다시 책을 뒤적거리기도 하고 내 안에 이미 있었던 구절과 결합하여 더 큰 세계를 발견한 즐거움을 느끼기도 한다. 일상의 소용돌이 속 촛불 같은 시간이다.


한 동안 우리 독서 모임은 헤세와 이어령과 니체와 무라카미 하루키와의 대화였다. 내가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이란 책을 읽고 모임장에게 새해맞이 책을 선물했고 모임장은 그 답례로 나에게 정여울 작가가 헤세의 발자취를 따라 여행하는 '헤세'라는 책을 선물했다. 내가 이어령의 이야기를 꺼내자 궁금증이 생긴 다른 모임원은 '딸에게 보내는 굿나잇 키스'를 읽기 시작했고 모임장도 니체의 인생 강의를 완독하고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을 읽었다. 바쁜 와중에도 한 달에 한 번은 모임에 들르는 다른 모임원은 '상실의 시대'를 읽었다. 나는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을 읽고 '헤세'와 '수레바퀴 아래서'를 읽었다.


그 대화 내용을 정리하면 아래와 같다.




정여울 작가는 헤세의 삶을 따라가며 자기 자신을 셀프(Self)와 에고(Ego)로 나누었다. 심리학에서 통용되는 의미는 아니겠지만 내가 이해하기로 셀프(Self)는 무의식적으로 내 안에서 자연 발생하는 그림자(날 것의 욕망)와 내면의 황금(시적 감성과 영성, 도덕성의 핵)이 있는 인간의 혼란스럽고 내밀한  '타자성'(개성)이고, 에고(Ego)는 셀프와 외부 세계를 연결하는 프리즘, 즉 사회화된 자기 자신이다. 이어령의 인터뷰어가 '나는 시늉이 많았다.'라고 한 고백은 셀프보다는 에고를 돌보는 사람이었음을 자인한 것일 테다.


헤세는 소설에서 주로 진정한 셀프를 찾아 떠나는 여정을 그렸는데 '무의식 영역에 도사리고 있는 그림자와의 대화를 통해 그림자와 내면의 황금을 통합(Wholenes)하는 것'성장이라 여겼다.  이는 '데미안'에서 선과 악을 통합하는 신 아브라삭스의 모습이고, 깨달음을 얻은 '싯다르타'가 친구 고타마에게 보여주는 강물 같은 부처의 모습이다.  그리고 내면의 '경멸'을 찾아 극복해야 한다던 니체의 말과도 닮았다.


통합은 외롭지 않은 상태이나 그  과정 고독하다. 특히 성장으로 가는 마지막 한 걸음은 꼭 홀로 내디뎌야 한다. 고독을 기꺼이 맞이하지 않으면  '에고'에 짓눌린 강박 타인의 욕망에 자신을 짜 맞추는 불안, 그리고  오로지 하나의 길밖에 모르는 외눈박이 욕망이 저절로 절망을 향해 간다. 절망을 지르고 위신과 체면을 세워 살아 보려 해도, 어쩌나 스스로는 속일 수 없는 것을. 절망은 에고의 껍질 속에서 성장하지 못한 셀프의 비명이다. 주체에게 거부당한 셀프다. 남들과 다를 용기, 그리고 고통과의 화해로 나아가지 못한 연약한 과거다.


때로 그 절망 때문에 청춘은 쉼 없이 돌아가는 세계의 수레바퀴 아래서 깔려 죽는다. '수레바퀴 아래서'의 한스 기베란트도, '상실의 시대'의 나오코도, '인간실격'의 요코도 그렇게  눈부신 청춘의 그늘 아래 숨을 묻었다. 그래도 세계의 수레바퀴는 여전히 돌아간. 지성에서 영성으로 가는 수레바퀴가 요구하는 것은 '인간으로 살아남으라.' 이 하나인데, 듣지 못한 척 금수같이 살 수도 없고 듣고도 나아갈 수도 없어 순수한 청춘들이 죽는다.  


일단 살고 봐야 한다. 이어령 선생님의 말을 빌리자면 살아서 비록 어리석음이라도 자유의지였음을 받아들이고 기꺼이 인생의 희비극을 겪어야 한다. 그리하여 스토리, 나만의 개성을 가진 인간이 되어야 한다.




여기까지 대화가 미치자 책을 삼킨 영혼들이 달그락거리며 부딪치는 소리를 냈다.


청춘의 터널에서 걸어 나와 불투명한 채로 살아남으라. 흙 묻은 황금을 안고 고통스러운 채로 살고,

살아서 울어라. 

아무리 쪽팔리는 생일 지라도,

살아 있어서 더럽고, 

되돌릴 수 없는 과거가 간지럽혀도, 

살자. 

수레바퀴 아래서 그림자를 깨부수고 황금도 부서져도  혼란스러운 먼지로 살아남으라는 소리가 우리 사이로 흘렀다.


모임원 한 분이 이어령 선생님 시 한 편을 읊어 줬다. '딸에게 보내는 굿나잇 키스'의 한 부분이었다. 먼저 떠나보낸 딸에게 미처 해주지 못한 굿나잇 키스를 보내는 아버지의 언어가 슬퍼서 따뜻하고 아름다웠다.  고독이 아득하게 멀어져 노을이 졌다. 이것은 아침놀인가 저녁놀인가. 상관이 없어졌다. 눈을 감고 달그락 거리는 소리를 들었다. 가만히 들어보니 종소리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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