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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반장 Jun 27. 2023

우리가 가야 할 곳

-자살하려는 마음, 에드윈 슈나이드먼-

 얼마 전 한 청년이 죽었습니다. 고뇌를 거듭했을 그의 작은 원룸에서 결국 그는 혼자만 아는 한 걸음을 뗐습니다. 무엇이 너를 결단케 했느냐고 묻고 싶습니다만, 스스로에게 수없이 물었을 그 말이 아쉬워도 내뱉지 않기로 합니다. 입에 들큼한 군내가 납니다.
  한정된 정보로 어기적거리며 그의 삶을 톺아보려는 노력이 애도인지 결례인지 모르겠습니다. 그나마 가장 공적인 죽음을 빗대어 말하자면 악플로 고통을 호소했던 배구선수의 죽음과 비슷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젊은 나이에 커리어를 이어갔던 그는 화려한 외모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의 외모는 사람들의 관심을 모았고 사람들은 그가 화장을 했다거나 성소수자라고 말했습니다.
  사실적 명제도 맥락 안에서 주관적 판단을 동반합니다. 이 의심들은 그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었습니다. 남자는 화장을 해서는 안 돼. 남자는 남자를 사랑해서는 안 돼. 너는 남자답지 않으니 비난받아야 해. 해명해 봐. 내가 믿어줄 때까지. 사람들은 그에게 ‘정상’이라는 권력에는 필요치 않았을 해명을 요구했고, 이는 자신들의 우월성을 전제한 도덕적 명령과 다름없었습니다.
  스물여덟. 그가 죽었습니다. 그에게 끊임없이 질문을 던진 이들은 그를 非존재로 떠밀고 나서야 그 물음을 멈췄습니다. 그가 화장도 하지 않았고, 성소수자도 아니라고 몇 차례 해명해도 소용없었습니다. 대답할 주체라는 질문의 조건이 사라지자 물어볼 수 없었을 뿐, 질문들은 여전히 허공을 부유하다 연가시처럼 누군가를 아케론 강으로 이끌지도 모를 일입니다.  
  ‘자살하려는 마음’에서 작가는 인간의 가장 중요한 욕구가 훼손되고 그 고통의 유일한 해결책이 죽음일 때 인간이 자살을 택한다고 말합니다. 해명을 요구하는 질문에 숨은 ‘비정상’에 대한 혐오가 그의 생존 욕구를 난도질했습니다. 그 고통의 해결책으로 그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선택은 죽음이었습니다. 이것을 단순히 불운이라 말할 수 있을까요?
  매일 아까운 생명이 우수수 죽어 나갑니다. 가끔 그런 생각을 합니다. 인권이란 존재를 해명하지 않아도 될 권리가 아닌가. 타인의 시선에 무력하게 非존재로 떠밀려가지 않을 수 있는, 죽지 않아도 될 권리가 아닌가.
  해명을 요구하는 질문들이 향하는 곳을 봐야 합니다. ‘정상’이라는 권력이 지나치게 높지는 않았는지, 당연했던 질문을 돌아봐야 합니다. 매번 사람도, 상황도 달라지는 것이 현장입니다. 촌각을 다투는 절체절명의 순간에서 영원 같은 순간의 행간을 채우는 것은 매뉴얼이 아닌 경찰관 개인의 소양일 것입니다. 인권수호자로서 지금, 여기서부터 일상적인 노력이 필요합니다. 우리들의 노력으로 더 많은 이들이 사람들이 살아남기를 바랍니다.

동시에 젊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이러한 욕구에는 성취하고, 소속하고, 지배하고, 해로움을 피하고, 자율적이 되고, 사랑을 받고 의존하며,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이해하고 싶은 무형의 욕구들이 포함된다. 누군가 자살할 때는 그를 ‘살게 하는’ 심리적 욕구가 꺾여서 생긴 심리적 고통을 지워버리려고 하는 것이다.
-자살하려는 마음, 에드위 슈나이드먼, p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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