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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반장 Jun 27. 2023

독서동아리 수기 공모전

김씨 할아버지가 또 집을 나갔다. 어르신은 집을 나가면 기억 속의 아득한 고향을 찾아 배회하곤 했다. 아무리 쫓아도 멀어지는 어르신의 고향처럼, CCTV만으로는 어르신을 도무지 따라잡을 수가 없었다. 어르신을 쫓는 동안 어느 집 가장은 죽는다고 집을 나갔고, 어느 집 딸은 부모님의 훈계를 못 견디고 집을 나갔다. 저만치 앞서서 달려가고 있다는 세상의 불행을 바라보다 보면 실성한 사람처럼 헛웃음이 터진다. 불행은 언제나 경찰보다 빠르다.
  현장에서 사람들의 울분을 온몸으로 받아내며 인생은 참으로 괴로운 것이구나, 하는 생각을 자주 한다. 매일 기차를 타고 도심 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가 출근과 퇴근을 반복하다가 어느 날 갑자기 저렇게 몰려오는 먹구름 아래에서 온통 젖고 소중한 것을 떠내려 보낼 수밖에 없는 것이 인생인 것만 같아 가슴에 찬바람이 든다. 일상은 무료하고 때론 견디기 힘들 만큼 무겁고 그 아래는 공허하다. 귀신 달래듯 술을 부어줄 수도 있고 놀아줄 수도 있지만 글을 읽는 편이 낫더라. 황현산은 막막한 삶 속에서 현실의 이 귀찮음과 저 거룩하고 완결된 어떤 세계를 연결해주는 것이 시(詩)라고 했다. 글을 읽다 보면 혼란한 세상 속에 가야할 길의 표지를 찾을 때가 있다.
 
  그러나 꾸준히 책을 읽는다는 것은 여간 힘든 일이 아니다. 매일 저녁 집으로 돌아와 지쳐 쓰러져 영상을 탐닉하고, 최소한의 집안일을 해치우다 보면 어느새 밤이 늦었다. 퇴근 후 책상 위에 앉는 것이 이리 힘들어서 어찌하나 고민만 깊어지다 시작한 것이 ‘밤이 선생이다’였다.
  ‘밤이 선생이다’는 황현산의 책 이름을 빌려 2021년 7월부터 이어온 온라인 독서모임이다. 매주 목요일 밤 8시 오픈 카톡방에 줌 링크가 뜨고, 어떤 해명도 요구받지 않은 채 다만 진심으로 참여를 원하는 사람만 링크를 눌러 각자 조용히 책을 읽고 필사를 한다. 정해진 책도 없고 과제도 없다. 9시가 되면 사람들은 간단하게 안부를 나누고 필사한 부분을 소리 내어 읽는다. 필사한 부분이 왜 감명 깊었는지 단어를 고르다가 내 안에 중요한 것, 어두운 것, 진정 욕망하는 것이 드러난다. 내가 이미 읽은 책이라도 타인의 시선으로 찾아낸 구절은 새로운 빛의 줄기로 다가온다. '저런 구절이 있었나?'하고 다시 책을 뒤적거리기도 하고 내 안에 이미 있었던 구절과 결합하여 더 큰 세계를 발견한 즐거움을 느끼기도 한다.
   지난 1년 간 ‘밤이 선생이다’에 꾸준히 참여했다. 매주 목요일 저녁 시간을 비우기 위해서 야근이나 회식, 친구와의 약속을 거절해야 하는 노력이 적지 않았지만 억지로라도 책상에 앉기만 하면 자연히 달라지는 세계를 몸소 경험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줌 링크를 열고 책상에 앉으면 침묵 속에 나를 싸고 있던 역할이 벗겨지고, 글자를 따라 삶의 유속을 감각했다. 나의 호흡과 작가의 글이 만나 인간으로서 삶을 인식했다. 매주 목요일 저녁 2시간은 '책 읽는 인간'이라는 정체성을 음각하는 나의 리추얼이 되었다.
  2시간의 의식은 일주일의 독서량을 변화시켰다. 한 시간으로 책 한 권을 다 읽을 수는 없지만, 그 의식으로 우리는 일주일 간 조금 더 자주 책을 찾아 들었다. 가진 책은 읽은 책이 되었고, 서로의 영향을 받아 취향을 확장시켜 새로운 책을 사들이게 되었다. 한 시간의 대화는 평면적인 일상적 대화를  넘어 서로의 삶 깊숙이 핵과 같은 인간성을 변화시켰다. 지정 도서를 정해 읽어 오거나 대화거리를 준비해 오라는 의무 없이 각자 원하는 책을 읽고 필사한 부분을 공유하여 자연발생적인 영감으로 호응했을 뿐인데 오히려 그 대화에 깊이 몰입할 수 있었다.
  한 동안 우리 독서 모임은 헤르만 헤세와 이어령, 무라카미 하루키와의 대화였다. 누군가가 <헤세>라는 책으로 역할로서의 자아 에고(ego)와 그 아래에서 삶의 균형을 찾는 진정한 자아 셀프(self)를 이야기 할 때, 다른 누군가가 <상실의 시대>의 나오코가 에고와 셀프를 통합하지 못하고 고달픈 청춘의 수레바퀴 아래서 죽어간 이야기를 했고, 또 다른 이는 <딸에게 보내는 굿나잇 키스>의 한 페이지를 펼쳐 시를 읽어주었다. 어느 여름밤, 서로의 영혼이 달그락거리는 소리를 내고 고요한 촛불 같은 순간이 찾아들었다. 그 어떤 고통에도 살아남으라, 살아서 성장하라는 명령이 불꽃처럼 높게 일었다.

  태양은 차별 없이 빛을 내리 쬐고 땅은 제 계절에 맞춰 싹을 틔운다던가. ‘밤이 선생이다’는 각자의 속도가 어떻든 모두에게 열려 있어 더 의미 있는 만남이다. 온라인으로 모임을 진행한다는 점에서 물리적 한계 없이 누구든 참여할 수 있고, 미리 책을 읽어올 필요도 없이 자유 도서로 참여할 수 있다는 점에서 심리적 장벽이 낮다. 장벽이 낮기에 모이는 사람들도 다양하고, 읽는 책도 다양하고, 모임 형식도 생동한다. 이번 해 7월부터는 독서동아리지원센터의 지원을 받아 월 2회 오프라인 철학모임을 시작했다. 매주 목요일 온라인 독서모임을 기본으로 하여 기간이 한정된 오프라인 독서모임 프로젝트를 병행하는 방식이다. 이제 ‘밤이 선생이다’는 닫힌 동아리에서 열린 네트워크로 변모하고 있다. 오로지 책을 읽고 대화를 나눈다는 본질만을 취하고 다양성을 환대하여 무한히 변화할 수 있는 유연성을 갖춘 부산 대표 모임이 되어, 함께 읽는 즐거움을 널리 나누고 싶은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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