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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반장 Jun 27. 2023

유령에게 말걸기

달력이 몇 장 남지 않았다. 기대도 지나갔고 다짐은 잊은 지 오래, 다가오는 세월은 무례한 빚쟁이 같기만 하다. 잊을 만하면 불쑥 문부터 두드리는 모양새가 뭐든 내놓아야 할 것만 같아 마음이 조급하다. 다이어리 첫 장에 정성스레 적어 놓은 독서 계획이 너덜너덜 해졌다. 이제는 정말 책을 좀 읽어야겠다며 도서관 홈페이지에 들렀다.

홈페이지를 클릭하자 <세상의 모든 청년> 북토크 행사 공지가 나를 맞이했다. 북토크를 진행하는 허태준 작가는 지난 책 <교복 위에 작업복을 입었다>에서 4년제 대학생을 중심으로 흘러가는 청년 담론 밖의 삶을 이야기 했었다. <세상의 모든 청년>은 그처럼 ‘청춘을 논할 때 슬그머니 제외되는’ 청년들의 인터뷰를 진행한 다양한 작가들의 에세이 모음집이었다. 북토크 행사장은 부산의 한 독립 서점. 일요일 오후의 햇살을 머금은 서점 마당으로 들어가는 길가에 오래된 기왓장들이 멋스러웠다.

청년들의 이야기는 평범하기도 하고 극적이기도 했다. 그 중 보호종료 아동으로 살아남은 바이올리니스트의 삶은 특히 외롭고 쓸쓸했다. 그는 사랑하는 사람에게 자신의 출신을 고백하지 못해 이별을 고했다. 결혼식에 오고갈 무심한 말들로 그의 주된 생계인 레슨을 잃을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그의 출신을 아는 순간 그들의 존재 자체를 '혜택'으로 여기는 말들을 쏟아냈다. 그와 같은 처지의 사람들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그의 동기 중 10%는 세상을 떠났고, 그 중 한 명은 산업재해로 목숨을 잃었다. 누구 하나 그의 죽음을 애도해주는 이 없었기에, 그는 익명의 숫자로 사라졌다.  

청각장애 대학생 민선 씨는 우수한 성적으로 대학에 입학했지만 수어 통역이나 속기 지원을 제대로 받지 못해 학교를 그만뒀다. 2007년 제정된 '장애인차별금지법'에는 청각장애인이 차별 없이 수업을 들을 수 있도록 명시되어 있었지만 현실은 요원했다. 그녀는 배리어 프리(barrier free 장애인 등 사회적 약자에게 물리적/제도적 장벽 없는 세상)가 일상인 사회를 꿈꿨다. 그 꿈을 이루기 위해 그녀는 장애 인식 개선 영상을 만드는 사람이 되기로 했다.  

책 속의 청춘들은 각자 자신의 그림자를 짊어지고 주어진 하루를 덤덤하게 살아가고 있었다. 그들의 요구는 하나같이 평범하고 일상적인 것들이었다. 생업을 영위할 자유, 수업을 들을 자유, 내리쬐는 햇빛을 받고 길을 나설 자유. 세상은 그 작은 요구들도 욕심이라고 말했다. 북토크 말미에 한 청년은 장애인들의 지하철 시위에 비장애인들의 이동권이 침해당하고 있다며 민선씨의 사례를 쓴 김수안 작가님의 의견을 물었다. 청년의 질문에 작가님이 답했다.

"시민들이 '아무리 자기들 권리가 중요해도 그렇지, 일반 시민들에게 피해주는 건 잘못됐다'라며 목소리를 높였을 때 저도 그들을 마냥 비난할 수는 없었어요. 저도 막상 시위로 인해 명절날 고향 가는 기차를 놓쳤을 때 미운 마음이 들었거든요. 그래도 다시 마음을 다잡았어요. 사실 장애인들의 이동권 시위는 그 역사가 오래되었습니다. 그들은 오래도록 피 터지게 외쳤지만 사회는 관심 가져주지 않았죠. 그래도 요즘에는 '장애인의 이동권'이 담론의 중심에 있다는 사실이 고무적이라 생각합니다."

작가님의 말처럼 대한민국에서 장애인 지하철 시위는 그 역사가 길다. 2001년 오이도역에서 리프트를 이용하다 추락한 장애인이 사망했고, 그 사건을 계기로 지하철 시위가 본격화된 지 20년이 넘었다. 그 이후로도 13명의 장애인이 지하철 리프트 사고로 죽거나 다쳤으니 그들이 목숨 걸고 집 밖을 나선다는 말도 과언이 아니다. 아무리 말해도 들리지 않는 삶은 어떤 표정일까. 말을 해도 들리지 않으면 살아있어도 유령이 아닐까.

<세상의 모든 청년>의 청년들도, 지하철 시위를 하는 장애인들도, 목소리 없는 유령과 다름없었다. 이제 그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 그들에게 말을 걸어야 하지 않을까. 융 심리학자 제임스 홀리스는 그의 저서 <사랑의 조건>에서 ‘우리가 타인과 맺는 애정 관계의 질은 우리가 자기 자신과 맺는 관계와 정비례한다’고 말했다. 타인의 고통을 보지 못하는 사람은 자기 안의 고통도 귀신 대하듯 할 수밖에 없다. 당장 내가 불편하고 불쾌하더라도 타인의 삶을 담대하게 상상하고 그들과 함께 살려고 의식적으로 노력하는 것이 덜 아픈 삶을 사는 방법이다.

강연이 끝나고 밖으로 나서는 길, 켜켜이 쌓인 기왓장을 보니 험준한 산길 누군가가 정성스레 쌓아올린 돌탑이 떠올랐다. 산비탈을 구르던 돌멩이로 아득한 산 정상을 향하는 사람들에게 저기 앞에는 그래도 희망이 있다고 말을 거는 이, 누구인가. 기왓장 위로 은빛 햇살이 머무르고, 비로소 사랑,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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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어떤 사람이었을까. 우리처럼 열아홉 살부터 일을 시작했을까. 어쩌면 그보다 더 빨리 돈을 벌어야 했을까. 왜 돈을 벌어야 했을까. 군대에 가지 않기 위해 산업기능요원으로 편입했을까. 불안했을까. 서러웠을까.
<교복 위에 작업복을 입었다>, -기숙사엔 유령이 산다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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