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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반장 Jun 27. 2023

용서는 꼭 해야 할까

영화 '밀양'

갓길에 세운 차창 밖으로 태양이 눈부시게 빛난다.

신애: 좋다


아들 준: 뭐가?


신애: 햇볕?


 2007년 개봉한 영화『밀양』은 신애로 분한 전도연이 카센터 사장 역의 송강호에게 ‘밀양’의 의미를 알려주면서 시작한다. 밀양은 ‘비밀스러운 햇볕’이라는 뜻이자 신애 남편의 고향 이다. 신애는 서울에서 교통사고로 남편을 잃고 밀양으로 내려왔다. 사람들은 남편이 바람을 피웠다고 말하지만 그녀는 믿지 않는다. 그녀는 누구 하나 자신을 알지 못하는 이곳에서 이웃과 적당히 거리를 두며 자신이 원하는 이미지로 살아가려고 한다. 이웃의 뒷담화와 연민의 말에도 그녀는 괜찮다. 보이지 않는 곳에도 신의 사랑이 있다던데, 그녀에게는 그 사랑이 필요치 않다.


  그러던 어느 날 신애의 아들이 사라졌다. 신애는 유괴범에게 전 재산을 주었지만 아들은 하천에서 시신으로 발견됐다. 범인은 아들 준이 다니던 웅변학원 원장이었다. 신은 왜 아무 잘못도 없는 준을 데려갔을까. 그 어떤 질문과 후회에도 아들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녀는 교회 부흥회를 찾아 울음을 터뜨렸고, 이 고통도 신이 계획한 사랑의 일부였음을 받아들이기로 한다.  


  평안을 찾은 신애의 얼굴이 빛났다. 그녀는 하느님의 뜻에 따라 원수도 사랑하기로 마음먹는다. 자신을 응원하는 목사님과 집사들에게 이 결심을 알리고, 들에 핀 꽃을 꺾어 아들을 죽인 살인범을 찾아간다. 떨리는 마음을 다잡고 면회실에 들어서는데, 그의 낯빛이 심상치 않다. 신애가 그를 용서하고 신의 사랑을 전하러 왔노라 말하자, 그는 이미 회개하고 하나님에게 용서받았다고 말한다. 살인범의 얼굴이 평안으로 빛났다. 꺾인 꽃은 바닥으로 추락했다.


 


  용서란 무엇일까? 내가 용서한 적 없는 가해자를 신이 용서했다면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나? 피해자만 지독하게 외로운 싸움을 해야 하는 삶의 부조리는 어떻게 치유하나? 현대인이 병적으로 집착하는 정의와 공정, 그로 인한 공공의 보복은 당한 사람만 억울할 뿐이라는 냉소의 또 다른 가면이 아닐까? 영화는 수많은 질문을 던진다. 추상적인 질문처럼 보이지만 기저에는 평범하고 일상적인 우리의 문제가 녹아 있다. 다시 말해, 영화가 우리 인생에 던지는 질문은 이것이다. 나의 고통은 끝나지 않았는데 나에게 상처 준 사람은 잘살고 있다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할까? 그를 용서해야 할까, 말아야 할까?


 


  용서란 무엇일까. 나는 용서가 내적으로는 상처받은 자신을 수용하고, 외적으로는 타인과 화해하는 것이라고 정의한다. 내적인 관점에서 용서는 과거의 나와 화해하여 자신 안의 부정적 감정을 떠나보내는 과정이다. 나와 화해한다는 것은 지나간 일을 후회하지 않고, 더 나은 선택을 하지 못했던 자신을 탓하지 않고, 과거의 고통스러운 이미지를 재현하는 굴레에서 벗어나, 변해버린 상황과 자신의 처지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나와의 화해는 나의 ‘잘못’을 시시콜콜 캐묻고 실체적 진실을 추궁하여 반성을 강요한다고 이루어지지는 않는다. 자신을 용서한다는 건, 자신을 미워하지 않는 상태에서 저절로 반성하고 성장하도록 만드는 힘이다. 용서가 먼저, 그 다음이 반성인 것이다. 그러므로 나와의 화해란, 내 안의 진실에서 시작해 실체적 진실에 도달하려는 용기이다.


  마음으로 하는 용서는 스스로를 위해 나아가야 할 길이지, 주고받을 수 있는 물체가 아니다. 정량화할 수도 없고, 보이지도 않는다. 용서하려 애쓴다고 해서 무조건 용서에 이르지도 않고, 결국은 실패할지도 모른다. 용서하려는 마음은 용서를 향해 나아간다는 인식만을 가지고 허공을 응시하며 달려가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신애는 이 사실을 간과했다. 대상을 향한 개인의 감정을 주고받는 듯한 개념이 덧씌워져 있지만, 용서란 ‘내 안의’ 대상에게 느끼는 ‘내 안의’ 감정일 뿐, 지극히 주관적인 내 안의 경험이기에, 그녀는 자신 안에서 ‘용서’라는 마음의 작용은 일으킬 수 있을지언정 아들을 살해한 그에게 용서를 ‘하사’할 수는 없다. 신애는 살인자를 용서하려던 것이 아니라 ‘용서의 상(image)’을 쫓았을 뿐이다. ‘용서의 상’에서 신애는 은혜를 베풀고, 살인자는 몸을 낮춰 그 영광의 은혜를 받는다. ‘용서의 상’이 깨지자 신애는 미쳐갔다. 도둑질하고, 간음하고, 자해하며 울부짖었다.


  용서를 타인과 화해하는 외적인 과정이라는 관점에서 봤을 때, 용서는 평화를 위해 맺은 공적인 합의의 영역이다. 사람이 고통스러운 상황에 처하면 심장박동수가 올라가고 부정적인 감정이 증폭되고 그로 인한 방어반응이 반복적으로 송출되어, 시야가 좁아진다. 그런 상황에서 타인을 이해할 여유는 누구에게도 없다. 하지만 상처를 준 사람이 자신의 정보를 충분히 제공한다면 어떨까? 피해자가 납득할 만한 상황과, 상처를 준 것에 대한 후회, 반성하는 태도를 보인다면 피해자는 생존전략으로서 공적인 화해를 택할 수 있다.


  생존하려면 아군이 필요하다. 그것이 연약한 육체로 지난 몇 만 년을 생존한 호모사피엔스 유전자의 법칙이기에 문명으로도 무너뜨릴 수 없는 본능의 아성이다. 피해자는 일어난 사실로 외에도 세계에 대한 불신과 수치심, 트라우마로 더 큰 상처를 받는다. 이 세계가 더 이상 안전하지 않다는 감각은 그를 수렁으로 빠뜨린다. 그에게는 세계에서 자신의 명예를 회복하고 더 이상 공격당하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이 필요하다. 화해하고 나면, 적군이었던 사람이 아군으로 인식되어 피해자의 DNA에 각인된 생존 가능성이 더 커진다. 그 작은 위안에서 피해자의 신체 반응이 회복되고, 시간을 들여 내적인 용서로 가는 길이 열린다.


  살인자는 그 사실을 간과했다. 신의 사랑으로 스스로 용서받았다고 하더라도, 피해자는 여전히 남아있다. 피해자의 고통 회복에 보탬이 되고자 하는 노력 없이 신의 용서를 운운하는 살인범의 얼굴에 신의 의지는 없다. 유대인들은 살인을 절대 용서받을 수 없는 죄라고 여긴다. 용서를 구할 피해자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토록 어려운 용서의 길이 어찌 자기 자신에게만 쉽겠는가. 살인범은 비겁했다. 그가 얻은 마음의 평화는 나르시시스트가 타인의 고통을 지워버리고 세계를 장악한 이기심의 발로다. 그가 진정 신에게 용서를 받았다면, ‘신의 사랑(신애)’이라 불리는 피해자의 고통에 그토록 무관심할 수는 없을 것이다.


 


  진정한 용서는 사회적 당위도 아니고, 교리에 의한 온정주의도 아니며, 비겁하고 강박적인 뻔뻔함도 아니다. 내 안의 진실과 공적 영역의 합리가 만나 지나간 운명을 받아들이는, 떳떳함이다. 진정한 용서의 길에 살인범의 그로테스크한 미소나, 신애의 분열증적 증세는 어울리지 않는다. 그럼에도 영화의 마지막에서는 신애의 삶에 비밀스러운 햇볕이 드리운다.


  신애가 정신병원에서 나와 미용실에서 살인범의 딸을 우연히 만났을 때, 신애의 머리를 자르던 그녀는 눈물을 흘리고 신애는 머리를 다 자르지도 못한 채 뛰쳐나왔다. 신애는 집으로 돌아와 마당에서 가위를 들고 머리를 마저 자르고, 곁에서 항상 그녀를 지켰던 카센터 사장은 그녀를 위해 거울을 들어주었다. 지나간 시간의 머리카락이 마당 위로 떨어지고 비밀스러운 햇빛 한 조각이 빛났다. 그 순간 영화를 보는 내내 쥐어짜던 고통이 날숨으로 빠져나와 손등의 잔털 같은 기대감이 일었다. 살인범 딸의 눈물 한 방울과 그녀를 비춰주는 ‘곁’이 그녀를 구원할 것이다.


   ‘둘이서 갈 수도, 셋이서 갈 수도 있다. // 그러나 마지막 한 걸음은 / 혼자서 가야만 한다.// 아무리 어려운 일이라도’라는 헤르만 헤세의 시구처럼 타인의 사랑을 한데 모아 그녀는 결국 깊고 짙은 고통의 바다를 건너 마지막 한 걸음을 혼자서 내딛었다. 영화의 시작에 비추었던 태양 빛에 비할 수 없게 흐린 빛 조각에도 부서지기 쉬운 작은 인생에 신의 뜻이 비쳤다. 복잡다단한 현실에서 구질구질한 마당 위의 삶을 살며 ‘용서’라는 고차원적인 가치를 실천하라는 비전은 꿈꾸듯 엿보는 빛 조각으로 겨우 드러났다. 내가 용서하기도 전에 신이 용서해버린 가해자를 용서를 해야 할까, 라는 질문에, Es muss sein!(그래야만 한다)이라고 장엄하게 외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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