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35 우리는 모두 부서지기 쉬운 것들에 불과했을까.
p290 오염된 지역에 남은 우리만이 이제 부림지구의 주인이다.
지진 이후, 부림지구의 제철단지는 무너졌다. 원초적이고 야성적인 붉은 철, 부림의 시대는 갔다.
새로운 시대의 사람들은 몸에 칩을 심고 효율적으로 관리된다. 칩은 모든 사실을 기록하기에 거짓말은 통하지 않는다. 더 이상 자신이 누구인지 설명할 필요도 없다.
자신을 정의하던 것을 모두 잃은 주민들에게 칩이 있었다면, 부림 사회는 무너지지 않았을 것이다. 감정의 알맹이 없이 기록된 칩의 데이터로 토씨 하나 놓치지 않고 부림 사회를 재건했을 것이다.
그러나 칩이 있었다면, 부림의 '인간'은 존재할 수 있었을까. 녹슨 못에 혀를 대고 끈적한 철의 맛을 음미하는 부림의 인간이 쇠락한 아버지의 생에 언어를 부여할 때 붉은 철은 시큰한 쇠냄새를 풍기며 춤을 춘다. 인간의 희미한 기억에 붉은 물감이 번지면 인간은 짐승처럼 울고도 살아갈 수 있지 않을까.
부림지구에는 자신이 누구인지 스스로 해석하려는 인간만이 남아 있다. 무너진 부림지구에 '안전'과 '청결', '명백한 사실'은 없지만 타인의 시선이 투과되지 않는 그 매캐한 연기 속에 숨은 어떤 것이 있다. 개의 내장이 쏟아지고, 사람이 굶어 죽어도, 부서지고서야 드리우는 씨줄과 날줄, 이야기가 있다. 비록 거짓의 외피를 두른 진실이라 해도,
부서지고 오염돼서라도,
그들은 부림지구의 주인이기를 택했다.
*야만성을 잃지 않고 혼돈 속에 스스로의 의미를 창출하는 힘, 니체적 인간을 그려낸 소설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