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과 제도만으로는 삶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 법은 최소한의 도덕, 제도는 최소한의 사회적 합의일 뿐이라 그것만으로는 선/악을 정의할 수도 없고, 주기적으로 생성되었다 떨어져 나가는 각질같은 가능성들을 모두 차단할 수도 없다. 법이 가진 한계에 부딪힐 때 사람들이 분노하는 이유는 문자로 존재하는 그 하한선에 대한 해석이 우리와는 다르기 때문일 테다. 사람들은 문자로 다 담지 못한 분노의 찌꺼기를 우리에게 던진다. 문자 그대로의 말도 그에게 가닿지 않는다.
‘지적장애인이 아니기 때문에 저희가 성인인 그 분의 의사에 반해서 가족들에게 소재를 알릴 수 없습니다.’ ‘아니, 사람이 딱 보면 모자라다니까요’ 무한한 동어반복을 넘어, 단어 하나마다 왜 그랬냐며 추궁하기 시작한다. 어떤 제도를 통해서든 그들은 삶의 문제를 해결하고 싶어한다. 그들이 정의한 삶의 도덕에서 나는 ‘아니오’라고 반응할 수밖에 없는 무능한 노예다.
자동차에 집착하는 치매환자에게 진짜 자동차를 주어서는 안된다는 도덕적 판단은 누구나 할 수 있다고도 감히 단정하지 못한다. 생업에 지친 가족들이 아이가 되어버린 아버지의 지치지 않는 투정질을 재빠르게 달래고 싶은 것은 당연하다. 그것이 현명한 판단은 아니었지만 이해하지 못할 것도 아니기에, 아버지가 자동차에 키를 꽂고 떠나간 사실로부터 파생된 고통은 누구의 몫인가를 셈하기도 전에 또다시 그들이 정의한 ‘최소한의 도덕’에 이끌려 뭇매를 맞고 있다. ‘왜 실시간으로 자동차를 추적하는 게 안된다는 거죠?’
절박한 생의 현장에서 고통으로 휘두른 팔에 한 두 대쯤 맞다보면 우리의 일이 살풀이에 불과한가 싶을 때도 있다. 아들이 뛰어내린 강물만을 하염없이 보고 있던 어머니가 혹시나 아들이 다시 수영을 해서 강물 밖으로 살아나왔을 가능성을 제기했을 때, 우리들은 다시 무거운 발걸음을 돌려 한 달 전에 흘러간 강물을 비추는 CCTV를 다시 찾아 돌렸다. 특전사 정도는 되어야 가능할 일이라지만 허약한 그가 살아나왔을 일말의 가능성이 전소될 때까지 강물은 흘렀다. 이제 가능성은 사라졌다. 우리는 너무 자주 죽음에 패배한다.
어떤 경험은 그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이 인간을 훼손한다. 그 정도의 압도적인 고통이라면 인간은 슬픔인지 분노인지 모를 혼돈에 빠진다. 삶의 고통 앞에서 세계에 대한 신뢰를 잃고 상처받은 이의 정체성으로 영원히 굳어지지 않으려면, 언젠가는 용서해야 한다. 책임소재를 가려가며 원인을 명확히 밝히는 과정도 중요하지만, 누군가를 죽일듯이 미워해도 나의 고통은 끝나지 않기에, 그 또한 용서로 가는 길일 때에야 의미가 있다. 나에게 상처 준 사람을, 상황을, 그리고 나를, 용서해야 이 고통은 바닷바람에 일그러진 해송처럼 완결된다.
끊임없이 전화가 울렸다. 아니, 이명이다. 분노받이로 전락한 영혼이 무겁다. 번쩍이는 보라빛이 잔혹하다. 나도 얼마 전엔 저렇게 소란스럽게 웃었던가. 니체의 글을 읽고 나는 나의 고통의 귀인을 어디로 돌렸던가, 고민한다. 나는 누구의 도덕에 순응하고 있었나.
흠결로 정의했던 경험을 다시보고 훼손되어 일그러진 나를 어루만진다. 부당함을 주장하는 건 가해가 아니지. 나를 용서한다. 고통의 바다에서 물에 잠길 때마다 목청껏 외치는 당신 옆에 내가 있다. 소리를 낮추어도 나는 들을 수 있지만, 당신은 고통스럽기 때문에 그 사실을 믿지 않는다. 당신을 이해한다. 나는 여기에 있다. 당신을 위해 나는, 나에게 주어진 한계 안에서 다시 생각하고 판단할 준비가 되어있다. 그러니 당신을 용서한다. 나에겐 그럴 힘이 있다.